소설리스트

얀데레 그녀의 공대여신-36화 (36/96)

〈 36화 〉 나랑 같이 쇼핑 가자 용돈 갖고 와 (4)

* * *

정하은.

아름이가 언론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베일 속의 재벌이라면, 정하은은 그 반대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과학고에 다니고 있을 적에 그녀의 이름을 기사를 통해 처음 접했다.

[재벌가의 젊은 천재, 정하은 양을 만나다.]

대충 그런 제목이었을 것이다.

중학생인 정하은양이 대학 기계공학 연구실에서 연구 참여했다던가, 여러 경시대회, 산출물 대회 등에서 상을 휩쓸었다는 내용에 조금 놀랐지만,

사실 재벌가에서 재벌 4세가 대회에서 상을 타고 싶다고 하면 협회나 관련 부서에 얼마든지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냥 뻔한 스펙 만들기, 돈으로 입상 사오기 같은 건 줄 알았다.

없이 자란 내가 공부에서도 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서 나온 자격지심 같은 것이었을까,

너무 대놓고 상 몰아주기해서 티가 많이난다고 이야기했던 나의 생각은 내가 대학생 때 완전히 깨져 버렸다.

S 그룹의 사립고등학교에 다니던 정하은이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본인이 참여한 논문들로 인해서 다시 언론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가 내가 대학교 2학년이었을 때였다.

비록 전공이 조금 다르긴 해도 나름 기본 적인 역학을 배우는 공대생인 나도 겨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알 정도의 논문 내용에 관해 기자들 앞에서 설명하는 그녀를 O튜브에서 봤을 때는 오히여 부럽다거나 시기한다는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수한 천재가 노력까지 한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그녀가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재벌 4세였다면 굳이 학문에 힘을 쓰지 않았을 것 같았기에 더욱.

그즈음부터 방송에도 꽤 여러 번 출연하고 SNS 나 O튜브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양지에서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 놀라움까지 받는 젊은 재벌이 정하은이라는 사람이었다.

...

'아름이랑 정하은이 아는 사이였어? 재벌들은 다 서로 건너건너 아는 그런 건가?

근데 사이가 되게 안 좋아 보이는데...

아름이한테 폰팔이니 그만 야리니 하는 거 보면...'

"감사해요. 근데 그쪽은 이 폰팔이년이랑 관계가 어떻게 되시길래 같이 다니세요?"

이 광경이 신기하게 느껴져 말을 잠깐 멈추고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넨다.

"어, 저는.. 그게..."

"친척 언니야. 니까짓게 관심 둘 필요 없어 약쟁이 차팔이년."

좀 전까지는 그래도 존댓말하면서 비꼬던 아름이는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네자 반말로 쏘아붙였다.

"어머 우리 아름이 존댓말 놀이 그만하는 거야? 너는 쪼그만해서 나한테 반말하면 좀 어색한데? 하핫...

그나저나 친척언니시라고요? 근데 왜 한 번도 못 뵀지?"

정하은은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앞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 왔다.

"되게 수수하게 예쁜 스타일이시네요. 화장도 거의 안하신 것 같고. 이름은 뭐예요?"

내 머리카락 끝을 살짝 만지며 물어 보는 그녀가 당황스러워서 아름이를 쳐다본다.

"저런 년 상대해주지 마요 선배. 괜히 기분만 나빠질 테니까요.

우리 이만하고 그냥 돌아가요."

나를 뺏기기 싫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는 팔에 힘을 꾹 주며 나를 당기는 아름이.

"아니, 그래도..."

"와 친척 언니신데 부르는 건 또 선배야?

언니 아름이가 되게 좋아하나 보네요. 제가 조금만 말 걸어도 저렇게 으르렁거리는 거 보면."

"초면에 죄송합니다. 우리 아름이가 요즘 많이 힘든 일이 있었어서..."

"선배! 왜 저런 년한테 사과하시는거예요! 그냥 빨리 가요!"

아름이가 소리치며 내 팔을 더 강하게 당겼다.

내가 그녀와 이야기하는게 정말 싫나보다.

아름이랑 같이 뒤로 돌아 매장을 나가려 하는 그때, 내 어깨를 누군가 잡아서 나도 모르게 뒤돌아봤는데.

쪽.

내 볼에 입을 맞추고 우리를 통과하듯 먼저 매장을 나서는 정하은.

그녀의 입맞춤을 받은 나는 당황스러워서, 옆에 나와 팔짱을 끼고 있던 아름이는 방금의 상황이 너무나 화가 나서 말이 안 나오는지 둘 다 매장을 나서는 정하은을 쳐다만 보고 있는다.

"아름이 잘 챙겨줘요 언니. 다음에 따로 뵐 일 생기면 그때 이야기 좀 더해도 괜찮고.

아, 폰팔이년. 너 K 공대 간다더라?

앞으로 대전에서 자주 보겠네? 크크..."

마치 친근한 사이인 것처럼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그녀.

'뭐지 방금? 정하은이 내 볼에 뽀뽀한 거야? 왜?'

나는 조금 더 벙쪄있는데 아름이가 팔짱을 풀고 걷기 시작한다.

"선배 돌아가죠."

"어, 근데 방금..."

"선배. 돌아가죠."

"으, 응..."

나한테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한 달 전에 들었던, 화난 걸 참고 있구나 싶은 느낌이 아니라 완전히 감정을 차단한 듯한 딱딱한 아름이의 말에 더 대꾸하려는 마음이 쏙 들어 갔다.

저벅 저벅

아름이가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기에 나도 조용히 조금 뒤에서 따라 걷는다.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건 맞는 거 같은데...

근데 정하은은 아름이랑 이야기하는 게 재밌다는 듯이 굴었단 말이지...

게다가 마지막에 그건 뭐야?'

아름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니 나도 딱딱한 분위기의 아름이한테 무언갈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 혼자 방금 일에 관해 생각한다.

철컥 턱

아름이가 올 때 운전해왔던 슈퍼카 운전석에 먼저 앉는다.

사 온 옷이랑 김실장님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뒤쪽을 슬쩍 보니 검은색 세단 트렁크에 오늘 산 옷을 집어넣고 있는 실장님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해주셨다.

'그냥 우리 둘만 가면 되나보네.'

철컥 턱

차갑다 못해 공기 중의 수분이 물방울로 응결되어 무겁게 내려앉을 것만 같은 차 안의 분위기.

'기분이 많이 나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좀 풀릴까...'

아름이가 내 품에 안기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옆에서 그녀를 살짝 안으며 말을 건네본다.

"아름아, 왜 이..."

찰싹!

아름이는 그녀를 안아주려는 내 손을 뿌리친 채 나를 살짝 째려봤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 집까지 조용히 가주시면 안 될까요?"

'어...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옆에서 살짝 안아주면

'선배 때문에 화를 낼 수가 없네요 헤헤..'

하며 아름이도 다시 나를 꼭 안아주는 그런 그림이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인 것 같다.

...

아름이의 말 대로 백화점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닫은 채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으니 금방 집에 도착했다.

김실장님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셨던 건지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니 옆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김실장님이 계셨다.

"짐은 다 넣어 뒀습니다. 필요하실 때 연락 주십시오."

실장님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인사한 뒤 가셨다.

"..."

백화점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어색한 침묵.

이 고요함이 멈췄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집에 들어서자 마자 이뤄졌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내 손목을 잡고 침실로 나를 이끄는 아름이.

"아야.. 아름아, 조금만 천천히.."

그녀가 강하게 붙잡은 손목이 아파와 이야기했지만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거칠게 나를 끌고 가 침대에 던지듯 밀어 넣는다.

"아름아, 왜 그러는 거야..."

"벗어요 선배."

"아름아, 왜 이러는지 말이라도."

"오늘 자꾸 두 번씩 말해야 들으시네요. 벗어요."

숏패딩, 후드, 청바지.

아름이랑 같이 백화점에 간다고 나름 무난무난하게 괜찮은 느낌으로 골랐던 옷을 하나둘 벗는다.

속옷만 입은 채로 아름이를 바라봤지만 그것까지 전부 벗어라고 눈으로 말하는 듯해서 속옷까지 전부 벗고 가슴과 성기를 가린 채 아름이 앞에 선다.

아름이는 침실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 발 앞에 던졌다.

익숙한 디자인의 가죽으로 된 무언가.

그 시설에서도 보았던 개목걸이였다.

그때와 차이점이 있다면 전기충격 기능이 없는지 두께는 조금 얇아졌지만 색깔은 진한 빨간색 가죽으로 되어 있는 것이 AV에서나 볼 법했다.

"선배. 지금 너무 화나고 짜증 나는데 그게 전부 선배 잘못은 아니겠지만 선배한테 화풀이 할거예요. 싫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말해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통틀어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아는 듯 말하는 아름이의 말은 형식만 달랐지 명령과 다름이 없었다.

"응..."

나는 발 앞에 던져진 목걸이를 스스로 목에 채우며 그녀에게 대답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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