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나랑 같이 쇼핑 가자 용돈 갖고 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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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식오픈도 안한 새 백화점의 명품관은 번쩍번쩍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나도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브랜드 매장들의 쇼 윈도우 안에는 비싸보이는 옷들을 마네킹에 입혀놓았고 모델이 나온 커다란 사진이나 브랜드 로고들이 가득하다.
벽 중간중간에 금빛 광택으로 포인트도 있고 중앙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홀에는 윗윗층까지 연결된 유리조각 전시물까지.
사실 백화점은 나랑은 거의 연이 없는 곳이었다.
밥 먹으러 한 두번 가던가, 백화점 안에 있는 아이스링크, 서점 등을 이용하려 갔지 명품관이라니.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어리버리하게 여기저기 둘러보는 나를 못 보는 것은 다행이다.
'직원들이 우리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살짝 신경 쓰이긴 하지만.'
"선배는 어떤 브랜드 좋아하셔요?"
"어… 그게 들어만 봤지, 사본 적이 없어서…"
"그럼 원래 옷은 어디서 보통 사셨어요?"
"무O사 에서 시즌 할인 하는 옷 중에 고르거나, 다른 사이트들도 인터넷 특가 하면 그냥 비슷한 디자인 색깔만 바꿔서 여러 개…"
"음… 원하는 스타일 있으신가요?"
"무난하게 예쁜 옷…?"
"흐음~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려운데… 잠시만요."
아름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휴대전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 네. 괜찮아요. 네. 감사해요."
"선배."
"응."
"곧 도와주실 분께서 오실거에요."
"어, 그래.."
30초 정도 지났을까. 우리가 서 있는 곳 바로 옆 에스컬레이터로 익숙한 실루엣이 내려온다.
"어, 김실장님이다."
"아가씨, 정연님 여기 계셨네요."
"아름아, 도와주실 분이 김실장님이야?"
"아뇨. 뭐 사실 거 있다고 하셔서 이 건물에 계신 줄은 알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신기하네요. 실장님 쇼핑은 만족스러우셨나요?"
"아 네, 다음달에 아버님 생신이셔서 시계 하나 사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별일 없으셨죠?"
"이제 막 도착했는데 선배 옷 고르기가 힘들 것 같아서요. 사실 뭐든 걸치면 옷이 선배빨을 받을 것 같긴 하지만, 선배가 뭘 원하시는 지가 안명확해서요…"
"미안…"
"아녜요. 이렇게 옷 사시는게 처음이신데 그럴 수 있죠. 오히려 그게 저랑 같이 왔을 때라서 좋은 걸요?"
"그럼 다행이구.."
또 1 2분정도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정장을 입은 여성 한분께서 서둘러 이쪽으로 뛰어오셨다.
"하.. 하… 죄송합니다. 오늘 오신다고 연락 주셨었는데 언제 오시는 지를 정확히 몰라서…
바로 입구부터 모셨어야 되는데 헉… 헉…"
"괜찮아요. 오늘 잘 부탁드려요."
여성분께서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나와 아름이한테 명함을 한장씩 주셨다.
"안녕하십니까, S 백화점 대전점 명품관 총괄 매니저를 맡고 있는 김미영 매니저입니다. 오늘 편안한 쇼핑 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아…."
"전화로 말씀해주시기로는 오늘 고객님…"
"정연이에요."
"정연님께서 시즌에 맞춰서 새로 의류 위주로 구매하시려 하신다고요."
"네, 제가 패션을 잘 몰라서…"
"인상이 따스하고 러블리하셔서 웜톤 쪽으로 추천을 해드리면, 이번에 O찌 가디건이 되게 잘나와서 좀 캐주얼한 코디로 우선 가디건에 O넬 울 팬츠 하나 보시고 포멀한 코디로는 파스텔 톤 드레스랑 밝은 계열 아우터 몇 가지 먼저 보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종류별로 보시다가 이거다 하시는 게 있으시면 비슷한 느낌으로 또 추천드리겠습니다."
'웜톤이 뭐지? 울 팬츠? 쉽게 설명해주시려고 되게 풀어서 말씀하신 것 같긴 한데… 가디건이랑 캐주얼이랑 드레스는 알아들었는데. 뭐 그냥 추천해주시는 대로 보기만 하면 되겠지?'
"네 그럼 그렇게 하죠."
"어.. 음.. 네! 저도 좋은 것 같아요. 하핫..."
매니저님을 따라 매장에 들어가니 마찬가지로 잘 차려입은 직원 두 분이 우리에게 인사했다.
'가만히 계시다가 우리가 들어가니까 반응하시는 게 RPG 게임 같기도...'
매니저님이 직원 분께 이것저것 이야기하자 안쪽으로 안내해주셨다.
피팅 룸 앞에 특이하게 생긴 의자들과 큰 거울이 있는 별도의 공간.
매장 앞쪽 보다도 뭔가 조금 더 고급스러운 듯한 인테리어였다.
아름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니 바퀴 달린 행거에 옷들을 잔뜩 가져오셨다.
"어... 어떤거 먼저 입어보면 될까요...?"
"네~ 고객님, 아까 말씀드린 가디건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
가디건, 스웨터, 셔츠, 드레스, 재킷, 코트, 스커트까지. 입어볼 수 있는 옷은 다 입어본 것 같다.
하나같이 예쁘고 독특한 옷들을 내가 입고 있는게 뭔가 어색하지만, 거울 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 옷은 뭐가 이렇게 종류가 많냐...'
나는 나름 마음에 드는 옷들이 몇 개 있어서 비슷한 스타일의 다른 옷도 보여주실 수 있냐고 직원분께 여쭤보기도 했다.
'아름이만큼 있어보이지는 않겠지만...
아름이가 나 때문에 쪽팔리지는 않을 만큼 나도 괜찮게 하고 다니는 걸 목표로...'
내 나름대로 아름이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뭐가 더 좋을까를 고민한다.
이것 저것 입어보며 아름이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처음 입었을 때 잘어울린다고 해준 이후로 아름이의 표정이 영 어둡다.
"음..."
"아름아..?"
"네, 선배."
"이 옷도 별로야? 계속 표정이 어둡네."
"아뇨, 잘어울려요."
"그치만, 처음 옷 입었을때만 웃으면서 잘어울린다 그러고 그 이후로는 계속 인상쓰고 있잖아... 역시 잘 안어울리지...?"
아름이는 거울 앞에서 지금 모습이 어떤지 확인하고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볼을 가볍게 꼬집는다.
"으이구 선배, 저때문에 걱정했어요?"
"아니... 나도 너 옆에서 같이가도 너가 안부끄러울 정도로는 예쁘게 하고 다니고 싶어서..."
"잘어울려요. 진짜로. 처음 옷이 너무 괜찮았는데 가면 갈수록 전부 잘어울려서 전부 다 사버려야 되나 고민한다고 인상 찌푸리고 있었나봐요. 미안해요."
"뭐야 그게~ 정말이야? 달래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고?"
아름이는 잠깐 나를 두고 직원분께 뭔가를 말한 뒤 카드를 건네고 돌아왔다.
"진짜라니까요. 어떻게 마음을 꺼내서 보여드릴 수도 없고."
여전히 조금 못믿겠다는 표정으로 아름이를 보고 있으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저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골랐던 거에요? 선배는 마음까지 예뻐서 자꾸 귀여워지려고 하시네요."
부끄럽게 왜 직원분들 있는데서 그러냐고 하고 싶었지만...
아름이가 쓰다듬어주는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서 또 가만히 쓰다듬받았다.
'아름이한테는 항상 뭐라고 못하겠네.'
"선배 방금 입었던 옷 다 사기로 했으니까 다른 매장도 구경하러 가요."
"뭐?! 아니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막 싼 옷이 아닐텐데..."
"괜찮아요. 옷이나 더 골라보셔요. 지금 건 입고 가시구요."
매장 앞쪽으로 돌아가니 김실장님이 큰 쇼핑백을 몇개나 들고 계시고 직원 분께서는 아름이에게 카드랑 영수증을 건넸다.
아름이가 영수증은 버려달라는 듯 계산하는 곳 앞 테이블에 올려두고 나갔기에 몰래 챙겨서 확인한다.
'나중에 나도 이런거 한벌이라도 선물해줘야지. 어디 보자 가격이...'
10벌도 넘는 옷들이 쭉 쓰여져 있고 가장 아래에 총 결제액을 확인하는데,
"......4200만원...? 뭐지? 내가 0을 하나 더 붙인건가"
'셔츠가 95만원, 가디건이 240만원, 재킷이 350만원...'
정신이 아찔해진다.
내가 장학금이 짤려서 겨우 채워넣은 등록금이 200만원정도였는데,
대학 졸업 후 괜찮은 기업에 들어가서 1년 내내 일해야 받는 돈이 4000만원 정도인데, 방금 30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적당히 입어본 옷을 아름이가 전부 사니 그 액수가 4200만원이었다.
"선배, 이쪽으로 나오시면 돼요."
내가 늦게 나오니 다른 쪽 출입구로 간 줄 알고 나를 부르는 그녀.
쫄래쫄래 따라가서 아름이 팔을 꼭 잡는다.
"아, 아름아..."
"어, 선배 바로 나오시네요. 뭔 일 있었어요?"
"그, 그게... 영수증을 봐버렸, 아 아니 나중에 너한테도 예쁜 옷 선물해주고 싶어서, 그, 조금 비싼 편일 것 같아서, 가격은 좀 맞춰줘야 되니까, 그, 아.."
"왜 이렇게 당황하셔요, 천천히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오, 옷이 내가 입기에 너무 비싼 것 같아서.. 너한테 무리 시킨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나한테 안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해줄 자신이 없어서, 갑자기 막막하고 미안해져서..흐윽, 흑..."
당황스럽고 미안한 감정과 여러 복잡한 마음이 섞이자 또 눈이 말썽이다. 눈가가 촉촉해져 결국 또 울먹이게 되어버린 나.
아름이는 그런 나를 보고 씨익 웃으며 두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누른다.
"선배 뚝! 뭘 그런걸로 고민을 하고 계셔요. 저한테 선배도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서 놀라신거에요? 선배한테 입히기에 너무 싸고 흔한 옷들인가 싶어서 아직 아쉬운데 저는."
나도 그만 울고 싶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아 훌쩍이고 있으니 아름이가 나를 품에 끌어안는다.
"예쁜 옷보다 더 예쁜 선배가 제꺼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빚진 것 같은 마음이 안사라지시면, 제가 예전에 선배한테 하룻밤 사랑해주면 건물 한채 씩 해드릴까 물은 거 그거만큼 해드린다고 생각하셔요.
선배 덕분에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밤을 보냈으니까, 선배는 건물 한채 값 저한테 받아낼 때까지 저한테 빚 없는거에요. 아시겠죠?"
"흡.. 그건 너무 억지자나..."
"제가 불리한 억지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더 길게 말 안할거에요. 여기서는 그 얘기 그만하기."
"아라써.. 미안..."
울음을 다 그치고 보니 O넬 매장 앞쪽에서 매니저님께서 우릴 기다리고 계셔서 급 무안해졌다.
생각해보니 김실장님께서도 매니저님이랑 같이 기다리셨네.
방금처럼 이번에도 우리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매장 안에 누가 있었다. 나보다 조금 크고 포니테일을 한 여성.
그녀는 우리가 매니저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때 뒤돌아보더니 아름이 쪽을 보고 놀란다.
"어머~ 여기서 다보네. 반갑다 폰팔이년."
나랑 팔짱을 낀 채 헤실헤실 웃고있던 아름이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다.
내가 첫날 시설에서 봤던 아름이 표정이랑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
"요즘 너무 행복하게 살아서 그런가 왠 벌레가 꼬이네요 오늘은.
폰팔이라... 그쪽은 차팔이 짓거리 열심히 해서 뿌듯하시겠어요?"
"하핫 참, 이거 또 그렇게 반가워하면 정들잖아. 그만 야려, 내 옷에 구멍뚫리겠다."
"죄송해요, 옷에 구멍뚫리면 안되시는 분인데, 여름에도 긴 팔 밖에 못입으시잖아요? 팔 드러났다가 주사 자국 들켜서 약쟁이인거 소문나면 안되니까요 그쵸?"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것같은 눈빛의 아름이와 디스전을 주고받는 센 인상의 여성은 왠지 모르게 어디서 본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차팔이... 차팔이... 아!'
"저기..."
"이 년이, 아 네?"
"혹시 정하은씨신가요?"
"네, 그런데요?"
"와, 기사로 많이 봤어요. 실제로 보니까 더 미인이시네요."
그녀는 국내 최대의 자동차 기업 S자동차 부회장의 딸. 즉 아름이처럼 재벌 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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