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다시 만난 세계 (2)
* * *
아직 몸의 피로감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다시 눕고 싶다.
"아름아 옆에 누워도 괜찮아?"
"얼마든지요. 힘드실텐데 달래주신다고 고생하셨네요..."
아름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머리를 떼고 내 옆에 누워 침대 옆자리를 탁탁 친다.
"어서 누우셔요. 제가 안아드릴게요."
스르륵 몸을 눕혀 옆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내 품에 안긴다.
뭐가 자꾸 불안한지 나를 꼭 안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이건 안아준다기 보다는 나한테 안긴거 아닌가? 뭐 상관없나?'
머리가 복잡하지만 지금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도 아니고 미래의 나에게 미루기로.
아까 부끄러워한 이후로 여전히 분홍빛 물감이 볼에 묻어있는 아름이에게 슬며시 물어본다.
"아름아, 지금 행복해?"
"..."
바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름이는 슬며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다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뭔가 계획대로 안됐나?'
"아름..."
"선배."
답이 없어 다시 물어보려는 내가 입을 엶과 동시에 아름이의 대답이 내 말을 끊는다.
"모르겠어요.
행복, 기쁨, 만족감, 황홀감, 사랑. 호감.
그 단어의 정의는 알지만,
항상 선배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이게 정말 사랑일까요?
선배가 내 사랑, 내 동생이라고 해주셔서 기분이 좋긴 했지만...
저는 아무도 선배를 가지지 못했으면,
선배는 오직 저만 바라봤으면 해서
선배를 망가뜨리고.
선배가 제 언니가 되어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다시 못깨어날 뻔하게 만들고.
처음 선배를 잡아온 납치부터 시작해서 온갖 일들을 벌일때는 앞만보고 달려와서 자각을 못했는데.
선배도 좋다고 해주시니 다 잘됐다고 생각하려는데.
옅게 미소짓고 있는 선배를 보면 갑자기 너무 무서워져요...
제가 선배를 보고 느끼는 건 행복일까요?
이게 행복이면 저는 뭔가를 부수고 일그러뜨리고 망가뜨려놓고는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괴물일까요?
한번도 제 행동에 확신을 가지지 않은 적이 없는데,
누군가 위에 서고 제 뜻대로 세상이 맞추도록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는데.
지금 선배를 보면 스스로가 너무 괴물같이 느껴져요.
손에 피랑 얼룩이 잔뜩 묻어있는 제가,
제가 억지로 표백시켜 새하얘진 선배를 감히 만지는게 죄스럽게 느껴져요.
자꾸 죄책감이랑 검은 응어리들이 제게 속삭이는 것 같아요.
저같은 괴물이 평범한 사람처럼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척 하지 말라고.
내 기분 내키는대로만 살았으면서 감정을 나누려는 연기를 그만두라고.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단계까지 와서야 자책하는 척 하는 위선자라고.
선배.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항상 제가 제일 똑똑하다고.
저는 차갑게 정답을 짚어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선배만 떠올리면 여기랑 여기가 너무 떨리고 아파와요..."
침울한 목소리의 아름이는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말한 후 내 옷을 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수분은 모두 나왔는지 또 울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힘든 건 똑같아도 울고있는 아름이를 보고 있는 건 내 마음도 찢어질 것 같아서 더 힘드니까.
아까 울음도 그쳤고 나름 태연하게 내 몸이 어떻게 된건지에 대한 설명도 해주고 새 신분도 알려주고 해서 아름이는 이 상황이 그저 만족스러운 줄 알았는데 속으로는 그렇지 못했나보다.
그러면서도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걸 아니까 티를 내지 않으려 적당히 기분 좋은 상태를 연기한 것 같은데 방금 내가 물어본 질문이 치명적이었던 걸까.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보다 몇배는 똑똑한 그녀가 자기합리화를 해보려 노력했지만 실패해서 괴로움을 끌어안게 된 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아름이의 상황일 것이기에.
제대로 공감할 수도 없는 사람이 이해하는 척 당장에 듣기만 좋은 말로 달래려 해봤자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빤히 바라보고만 있으니 얼굴을 찡그린 채 돌아 눕는 아름이.
'아름이랑 했던 그날 밤까지만 해도 별로 자책하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내가 일주일이나 못일어나서 걱정하다가 죄책감이 깊어진건가?'
아름이한테 무릎을 꿇고 발등을 핥으며 사랑을 구걸했던 그날.
스스로가 너무 보잘 것 없이 느껴져 그녀의 사랑만이 내 가치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해 애걸복걸하던 그 날 이후 계속 의식은 없었지만,
무의식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한 덕분인지 호르몬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좀먹는 자기파괴적인 생각을 하는 조금의 시간조차 내 눈과 머리에 아름이를 담는 시간을 줄이는 낭비로 느껴져 상대적으로 덜 하게 되었다.
같은 자극이 같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가.
같은 시간이지만 서로에게 너무도 다르게 작용한 이 대비감은 환자복 같은 디자인의 내 새하얀 옷과 그녀의 블랙 블라우스 만큼 진하게 차이를 드러냈다.
"아름아."
숨을 헐떡이는 아름이를 뒤에서 안아주며 귀에 속삭인다.
"...네..."
"왜 갑자기 스스로를 상처주게 됐어...
네 말대로 흰색 방에서 봤을 때는 훨씬 확신이 있었잖아."
"..."
"힘들면 말 안해줘도 괜찮아.
우리 조금만 이렇게 있자."
아름이의 몸이 눈물을 뽑아낼 기력이 없는 것이지,
아름이의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소녀는 여전히 상처받은 채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기에 무릎베개를 해줬던 것처럼 조금 더 시간을 준다.
"... 선배를 위한다고 생각했어요."
몇 시간이라도 이대로 아름이를 기다릴 마음이 있었는데 괜찮다는 듯 그녀는 십 수초의 시간 뒤에 바로 답을 돌려줬다.
"제가 선배에게 고통을 주고,잡아다 가두고 했지만,
결국은 선배도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 별 생각 없었어요."
"응. 그런데...?"
"선배는 잠들기 전이랑 오늘 깨어난 후의 기억만 있겠지만, 저한테는 선배 곁에서 선배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는 일주일이 한달, 아니 일 년보다도 길게 느껴졌어요."
"들었어. 너무 고생했더라."
"선배는 무채색이던 제 세상에 색을 입혀준 사람.
제 심장이 이렇게도 뛸 수 있구나 하고 감정을 가르쳐준 사람인데...
선배도 좋아할 테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대로 하다가 그런 선배를 죽일 뻔 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요...
선배도 좋아할 거라는 건 제 망상이랑 자기합리화고. 사실은 자기만족 때문에 아무 관련도 없는 선배한테 고통만 준 것 같아서..."
완벽한 사람, 빛나는 사람, 혹은 나랑은 아예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아름이가 이렇게 자신의 약하고 어두운 면을 이야기하니 또 나와 되게 닮은 아이라고 생각된다.
아름이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름이가 악몽을 꾸며 나를 부르던 때가 생각난다.
"아름아."
"네 선배..."
"솔직히 너 좀 너무한 거 맞아."
"죄송해요..."
"멀쩡히 밥먹고 들어가던 날 납치해서 가두지를 않나.
뇌가 덜 활성화 돼있다고 온갖 고문을 하지를 않나.
내가 오갈 데 없이 너만 보게 하려고
가짜 시체 만들어서 나 자살한 것처럼 세상도 속이고. 그거 내 원래 몸 정보로 복제한거지?"
"네 맞아요. 죄송해요..."
"솔직히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상상으로만 할 정도의 나쁜 일들이지만,
그것보다 너무한 게 하나 있거든?"
"...선배 죽일 뻔 했던거요...?"
"아니 그거 말고.
자꾸 너는 나한테 고통밖에 안줬다고 말하는거."
"그치만... 사실이잖아요..."
"아름아. 내가 어릴 때부터 갖고 싶었던 건 뭔지 알아?"
"잘 모르겠어요."
"나는 항상 그게 자아 성취, 인정욕구, 명예, 성공 그런 건줄 알았거든?
자존감도 낮아서 항상 껍데기를 쓰고 살면서 말이야."
"네..."
"근데 너가 해준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어린 정훈이가 원했던 건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더라고.
가족이었어. 가족.
꼭 잘난 부분이 없어도 사랑해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해주고.
조금 틀린 길로 가려고 하면 옆에서 고쳐주고.
친척들 집에 옮겨서 얹혀살다보니까.
나도 진짜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부모님은 바란다고 살아돌아오시지 않으니까
그걸 좀 다른 포장을 씌워서 생각해낸게
그런 단어들이더라고."
"네."
"아름이 너는 내가 뭔가 못나지면 나를 싫어할거니?"
"아뇨..!! 제가 어떻게 선배를 싫어해요..."
깜짝 놀라듯 답하는 그녀.
"나도 그래.
솔직히 우리가 다시 만난 그날이
나한테 썩 기분좋은 시작은 아니었지만,
새롭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도
내게 유쾌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결국 우리는 지금 서로를 원하는 관계까지 도달했잖아.
너한테 내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듯,
나도 아름이 너 덕분에
스스로까지 속이던 거짓말에서 울면서 뛰쳐나와서 자신을 보게 되고.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보게 되고.
남들이 다 무지개 빛 세상이라고 말하길래 앵무새처럼 흉내내던 것에서 벗어나서 나도 진짜 사랑이란 걸 느껴보고.
이걸 다 아름이 너가 나한테 선물해준 거잖아.
근데 그걸 너가 부정하고 자책하면 어떡해.
뭐.우리 아름이가 확실히 좀 터프한 면도 있지만..♥"
"..."
아름이는 생각이 복잡한 듯 이번에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아름아 너가 얼마나 나한테 잘못했는지 알겠어..?
너는 벌 좀 받아야 돼."
"말씀만 해주세요. 선배가 시키는 대로 다 해드릴게요..."
"어떤 벌이던 달게 받을거야?"
"네... 너무 죄송해서..."
"너가 받겠다고 한거다?"
"네..."
내 품에 등을 기댄채 안겨있는 그녀를 나를 바라본 채 눕도록 한다.
"첫째. 자책하지 말고 속에 담아두지 말기.
아까 울음 그치고 뽀뽀해준 다음에 괜찮은 줄 알고 좀 즐거운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런 생각 때문에 혼자 고민한 벌이야.
앞으로는 다 얘기해주고 같이 고민해."
"ㄴ..헙..!"
아름이가 내게 듣는 시간이라고 말했던 때처럼 나도 아름이가 듣기만 할 수 있도록 검지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막는다.
"둘째. 앞으로 내 곁에서 벗어나지 말기.
아름이가 또 다른 사람 건드릴까봐 내가 옆에서 딱 감시해야겠어. 귀엽고 섹시해서 누가 꼬실까봐 걱정도 되고, 아름이가 너~무 변태라서 그 부분도 문제고...♥
앞으로는 내가 같이 있으면서 감시할거야."
끄덕.
입술을 가볍게 누르고 있으니 아름이는 침울해하던 표정을 옅은 미소로 바꾼 채로 고개를 살짝 끄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지막. 이게 제일 중요한데,
언니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동생 되기.
나한테 한 나쁜 일이 너무 많아서 이것도 계산을 확실히 해서 돌려받아야겠어.
나한테 미안한 만큼 자책 대신에 아껴주고, 사랑해줘야해. 벌이니까 대충대충 하지말고 죄가 많아서 다 갚으려면 한참 걸리겠다.
아마... 평생...?
알겠으면 키스해줘...♥"
말해놓고 나도 부끄러워 눈을 꾹 감은채 입술을 살짝 내민다.
쪽
쪽
츄릅.
촉촉하고 부드러운 아름이의 입술이 내 입술에 두번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가 마지막엔 입술을 포갠 채 혀가 들어온다.
내 입안을 거칠게 들어오는 아름이의 혀를 피하지 않고 나도 어루만져주듯 그녀의 혀를 훑어준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서로의 입술을 맞댄 채로 끈적한 소리만 내던 우리는 혀에 쥐가날 정도가 되어서야 입을 떼어냈다.
첫 키스는 고소한 버터 맛이었는데 오늘은 서로의 진한 감정이 들어가서 그런지 체리같은 새콤달콤한 느낌이었다.
"후아... 엄청 길게했네.
아름아. 우리 과거는 옛날의 나랑 같이 묻어두고 매일매일 새로운 오늘만 생각하면서 살자.
서로한테 사랑을 속삭이기에도 시간이 부족할거야 헤헤..."
이제껏 본 적 없는 한 폭의 그림같은 미소로 내게 웃어주는 아름이.
환한 미소의 아름이의 눈가에 아까는 흘리고 싶어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다시 맺혀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후회와 자책이 섞인 검은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에 흘러나와 밝게 빛나는 눈물이었음이 내 눈엔 보였으니까.
서로의 향기에 취해 꼭 안은채로 잠에 드는 우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