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다시 만난 세계 (1)
* * *
사실 그보다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엄청 긴 꿈을 꾸는듯한, 나 자신이 없어져버릴 것 같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영원과 같은 시간동안 갇혀있다가 기억을 지우고 풀려난 느낌.
온몸은 내가 그 부위에 신경이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을 준다.
"으으..."
눈을 몇 번 꿈뻑꿈뻑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니 겨우 초점이 잡힌다.
내 오른손을 꼭 잡고 있는 검은 블라우스의 아름이.
내가 기억하는 아름이보다 더 마르고 가녀린듯한, 사람이 작아진 느낌이다.
"흑.. 선배, 제 말 들리셔요? 끄흑.. 흑..."
아름이가 꽉 쥔 손이 찌릿찌릿하지만 그녀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굳이 고통을 호소하지는 않는다.
고개를 살짝 내렸다 올려 대답을 대신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걸까. 머리도 아프고 속은 메스껍고 온몸은 고통스러운데...'
이번엔 바싹 마른 입술을 겨우 움직여 소리를 말로 엮어낸다.
"아...름아... 여..긴.. 어디니...?"
"흡... 아, 저희 그룹 병원이에요. 곧 김실장님이 여기 일 마무리 할테니까 같이 돌아가요..."
'아.. 병원... 그나저나 내 목소리 진짜 여자같네'
한글자 한글자 뱉어낼때마다 어색한 음색에 나 스스로가 놀란다.
아름이가 언니가 되어달라고 했던가.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기분이라 감정도 기억도 명확하게 뭐가 꽂히지를 않는다.
위잉~
그 때 김실장이 휠체어를 밀며 병실로 들어왔다.
움직이기 힘든 것을 아는지 나를 가볍게 들어 휠체어에 앉히는 그.
주차장에 있는 검은색 세단까지 난생 처음 휠체어에 탄 채로 인상은 잔뜩 쓰며 앉아서 갔다.
내 몸이 많이 작아진 것 같기도 한데 시야에 걸리는 내 몸도 곡선이 좀 다르고.
"선배..."
병실에서 차에 탈 때까지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아름이.
눈에 초점이 점점 잘 맞게 되니 수척해진 아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빨갛게 충혈되어 퉁퉁불어있는 채로 지금도 젖어가는 아름이의 눈이 자꾸 시선을 잡는다.
"..아.. 름아.. 눈이... 왜..그래..?"
"흑.. 아녜요. 조금 울어서.. 괜찮아요."
더 묻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내 컨디션이 이보다 최악일 수 없었기에 나중으로 미룬다.
계속 몽롱한 상태라 차 뒷좌석에서 눈을 잠깐 감았다 뜨니 다른 주차장에 와있었다.
아까처럼 김실장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이동하니 마지막 밤에 아름이와 있었던 그 집.
침대에 눕혀진 나는 말그대로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기에 내 옆에 앉은 아름이를 보고만 있는다.
내가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는 울음을 많이 그친 그녀가 태블릿 PC를 하나 가져와서 내게 설명해준다.
...
다행이다.
속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서.
안그래도 속이 메스꺼웠는데 아름이는 평소의 내가 봤다면 속을 전부 게워냈을 것같은 사진을 수십장이나 보여줬다. 입을 꾹 다물고 보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한 붉게 칠갑된 사진들.
'우욱...'
시험 칠 때같은 풀 컨디션의 나도 절반 정도 이해했을 내용과 용어였는데 속이 안좋고 어지러운 나는 그 절반의 반정도도 알아듣지 못했다.
대충 정리하면 한 달 넘는 시간이나 나를 재워둔 상태로 있었다는 것.
온몸을 몇번이나 돌릴 정도의 마취제, 진통제, 면역억제제가 들어가고 나오고 한 상태라 지금 두통, 어지럼증, 구토감, 손떨림, 무기력 등이 있을 수 있다는데 말 그대로였다.
"대충 알아들으셨나요...? 흡.."
아무튼 지금 여자가 된 것이 맞단다.
정확히는 내 세포랑 그 유전자정보를 베이스로 아름이의 형질도 조금 포함된 배양장기나 부위들로 신체 대부분이 대체된 상태?
그 과정에서 눈을 감은 채 토르소처럼 토막나있는 나나 절개해서 열려있는 원래 내 몸통 안쪽 공간 같은 걸 자꾸 보여주는데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위액이라도 뱉어낼 것 같이 어려워서 설명도 제대로 못듣고 사진은 더더욱 못쳐다봤다.
특정 부위로 분화가능하도록 줄기세포에 신호를 줬다 그러고.
신경세포와 뇌세포를 회복시키는 건 줄기세포 기술로 어려워 부분적으로 죽이고 성상세포 이식인가 뭔가로 뇌를 재프로그래밍했다나.
과학고 시절에 '근미래에 생길 수도 있는 생명과학 기술' 로 들었던 것들이 수십개나 이 몸 하나에 박혀있단다.
그 과정에서 학계, 업계 권위자로 이야기되는 의사, 생명과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거의 트럭단위로 연관되어 있다는데,
직접 수술을 진행한 사람은 극소수의 인원이라 대부분 이 일을 제대로 모르거나 어디가서 말 못할 상태로 만들어놨으니 걱정 안해도 된단다.
'잘 비밀유지 계약을 했다는 거겠지?
죽이거나 한거 아니고...?'
"사실 아직 사람단위로 연구하면 안되는 기술들이라...
선배한테 적용하기 전까지 샘플 수십 수백개에 테스트 한 것도...
그런 배양장기를 만드는 것도...
그리고 그런걸 선배한테 시술하는 것도...
전부 엄~청 불법이지만요오...
제가 너무 갖고 싶어서...
미안해요...
지금도 힘드시죠?"
아름이 말대로면 수술이 마무리되고 내가 깨어날 예정일보다 일주일이나 더 의식이 없었단다.
컴퓨터로 치면 부품은 전부 정상적으로 조립이 됐는데 전원이 안들어가는 상태?
수술 중에는 감염때문에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어 카메라를 통해서만 봤고,
지난주부터 물이나 음식도 거의 입에 안대고 내 옆에서 울면서 자리를 지켰다는 아름이.
내가 깨어나기 몇시간 전에 아름이도 쓰러져서 수액을 맞다가 내가 깨어날 때를 놓쳤다고 또 울먹인다.
"죄송해요.
흑.. 선배가 못깨어날 수도 있었는데..
일어날 때 옆에 끄흑... 자리에도 없고..
제, 크흡.. 욕심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한건데 흑, 훌쩍..."
아름이를 달래주고 싶어서 삐그덕 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침대 머리쪽에 등을 기대 앉는다.
"헉, 선배 움직이지 마셔요.."
"아냐. 여기 누워 아름아"
다리를 옆으로 뻗고 무릎베개를 해주고 싶어 허벅지를 가리킨다.
좀 정신이 든 상태로 보니 확실히 팔다리의 선도, 목소리도 모두 가늘어졌다.
키는 선 상태로 재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름이랑 비슷하거나 약간 클 것 같은데.
"그래도.."
"습! 선배 말 들어줘야지."
못 이긴 척 내 아래에 머리를 갖다대는 아름이.
이렇게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옆으로 넘겨주니 확실히 창백해지고 말랐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자국이 마르고 젖고를 반복해서 눈가에 진하게 남아있는 그녀.
내 옷으로 얼굴을 적당히 문질러 닦고 볼과 턱을 쓰다듬는다.
나와 아름이의 숨소리와 아름이가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침실을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를 올려다보는 아름이가 움찔거리며 울먹이는 것이 거의 줄어든 것 같아 말을 건넨다.
"좀 진정이 돼?"
"네... 그래도 미안해요,,"
"아름이 너 오늘은 미안하단 말 하지 않기.
내가 지금 이렇게 네 옆에 있잖아. 그럼 된거지."
"그렇긴 한데..."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아름이.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니 이제 괜찮다는 걸 일부러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그럼 이제 내가 아름이 언니야...?"
아까보다 컨디션이 많이 괜찮아졌고 어떻게 된건지에 대해서도 긴 시간동안 전부 들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언니... 언니라...♥"
얼마나 운건지 부어있는 눈과 코맹맹이 소리로 언니라는 말을 곱씹는 그녀는 우리가 사랑을 나눈 그 밤만큼 행복해보였다.
"아직은 선배로 할래요.
단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선배를 처음 만난 날을 자꾸 상기시켜주는 말이라..."
"아름이가 좋을대로 해줘."
"네, 아 맞다. 중요한 게 있어요
잠깐만요."
아름이는 내 허벅지를 베고 있는 상태로 팔을 침대 옆의 서랍에 뻗어 큰 서류봉투를 하나 준다.
"앞으로 선배가 가질 신분이에요.
정훈은 죽은 걸로 되었으니까."
"아, 그치. 응..."
원래의 나를 , 정확히는 사회에서 보는 나를 죽인 게 아름이라는 걸 다시 자각하니 조금 움찔했지만 지금 이렇게나 서로를 원하게 되었으니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지금은 아름이 때문에 살고 있으니까.
[성명 : 한정연]
[생년월일 : 2002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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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 한정연.
내가 앞으로 달고 살아갈 이름이었다.
"제가 원래 몇 개 가지고 있는 예비 신분? 같은 거에요.
오라버니들께선 가끔 쓰실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 저는 아직이라...
저랑 같은 나이 중에서 마침 선배랑 생일이 같은 게 하나 있어서 이걸로 했어요.
선배가 원하시면 다른 걸로 해도 되고...
이름도 개명하면 되니..."
동갑이면 언니가 아니지 않은가 했지만 어차피 알맹이인 내가 2살 많고 아름이 생일도 4월보다 뒤라 괜찮단다.
둘 다 한씨니 앞으로 만날 사람들한테는 친척언니라고 해두면 된다고 하고.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가느다란 손으로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아름이의 코를 톡 건드린다.
"왜요 선배?"
쪽
위에서 내려다본 아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기에,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남긴다.
"앞으로 잘부탁해. 내 동생, 내 사랑."
갑작스러운 고백에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져서 눈을 돌리다 겨우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답하는 아름이.
"... 네...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