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얀데레 그녀의 공대여신-27화 (27/96)

〈 27화 〉 5일차 (5) ­ 바보같지만 나만을 사랑해줘봐요

* * *

...

"학기 말 리포트를 쓰기 전에 각자 쓴 프로포절을 다 읽어봤습니다.

오늘 아침메일로 코멘트를 달아서 보냈는데 이번학기는 다양한 주제에서 다들 써줬네요.

어디보자... 정훈학생...?"

"네. 이정훈입니다."

"정훈 학생은 형이상학 부분이 흥미로웠나 보네요.

필요한 진도는 다 나갔으니 오늘은 각자의 제안서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보죠.

'테세우스의 배는 널판지가 하나 바뀌는 순간부터 오리지널리티가 손상받기 시작한 것이다' 가 전체 제안서를 관통하는 문장인 것 같은데 맞나요?"

"네. 그 사물이 정의된 시점의 각 구성요소가 완전한 상태를 100%로 보고 그 부분이 정량적으로 다른 것으로 대체되면 그만큼 본질도 대체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흥미로운 관점이지만 그만큼 반론이 많이 나왔던 관점이에요. 사람으로 대체했을 때 세포가 6개월이면 전부 바뀌는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다루는 뇌가 그 사람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서 신경세포는 한번 생기면 다른 세포로 대체되지 않으니 약간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흠... 좋아요 좋아요....

신경세포는 죽고 바뀌는 순환을 거치지 않는다...

그럼 원자 레벨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마 뇌세포의 아주 일부와 눈, 심장의 일부분 정도만 처음 태어났을 때의 원자 그대로 죽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러면 인공심장, 인공 눈을 가진 사람이 뇌의 그 부분을 다치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정의할까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새내기 때 교양시간 내 리포트 제안서의 내용은 논리적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산으로 답이 나오는 학문이 아니라서 그런지 각자의 논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 수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러면 사람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정의한다고 하면...?"

"우리가 보통 누군가를 사람이라고 말하고 권리와 의무를 주는 것은 법과 제도가 보장하는, 즉 그 사회의 시스템이 대상을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에 에틸 알코올이 들어간 걸 술이라고 정의하듯 말입니다.

그래서 보편적 관점으로 아까의 주제를 가지고 오려면 사회가 약속한 틀 안에서 그게 변하는가를 따져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훈 학생의 그런 시각도 되게 흥미롭네요. 리포트 기대해보겠습니다.

다음은 강진 학생 제안서군요."

다리에서 아름이를 마주쳤던 것 같은데 교양 강의실인 걸 보면 이건 꿈이겠지.

그걸 자각한다고 내용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영화 안에 들어온 것처럼 기억의 일부를 3인칭으로 보고있었다.

사람은 그걸 정의해주는 사회가 있기에 사람...

그래 결국 마지막 리포트에는 그런 관점으로 바꿔서 썼던 것 같다.

워낙 꿀교양으로 유명한 교수님이셔서 학점은 나 말고도 다들 잘 받았던 것 같고.

...

"헉.. 헉..."

새내기 때 꿈을 꿨는데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깨어났다.

깨어나보니 구속복이 아니라 평소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고 나 혼자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시 그 시설에 잡혀온건가 생각했지만 일어나 옆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시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큰 창문이 어두운 강과 도시의 불빛을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정신이 드니 자는 동안 못느꼈던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일시불로 갚는 것처럼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소름끼치도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내가 죽어있다는 사실.

즉 바꿔말하면 고기덩어리로 이루어진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정체성이란 것이 없어졌다.

원래부터 내 편이 없었고 내 사람이라는 것을 만들지 못한 나는,

사회와 고립되어 그저 무력감과 우울감에만 젖어있을 수 있는 나는, 아직 죽지않았기에 살아있는 그냥 동물일 뿐이게 되었다.

혼자 또 우울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똑. 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름이였다.

"선배, 정신이 좀 드시나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일단 여기로 데려왔어요."

아름이, 그래 아름이는 아직 내 편일 것이다.

아니 애초에 아름이가 나를 고립시키려고 이렇게 판을 짠 거겠지.

이런 일을 꾸며서까지 나를 자기만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 소름끼치고 무섭지만 그녀를 따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이제부터는 그녀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름님, 아 아니.. 아, 아름아...?"

"오늘은 아름님도 괜찮아요. 많이 힘드셨나보네요."

"그동안 사랑한다고 해주셨는데 항상 튕기고 속으로 다른 생각하면서 참고 그래서 너무 죄송합니다.

앞으로 말 잘들을테니 한번만 살려주시면 안될까요...?"

"네 그렇게 할게요."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한테 남은 게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다면 그렇게 해야지.

"이제 선배 안건드리려고요. 저도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연애하고 싶어서.

이번 주 동안 했던 일은 미안해요.

근데 선배를 그대로 두면 그것대로 또 저희쪽은 문제가 되니까.

그래도 이제 다시 잡아가지도, 해코지하지도 않을게요.

제 쪽이 더 죄송해요. 캠프 때 한번 뵀다고 사람 하나를 이렇게 만들어놔서."

어 이게 아닌데.

내가 이제 안튕기고 얌전하게 있겠다 그러면 '앞으로는 말 잘들으셔야 해요' 라던가 해서 이제야 나를 가졌다고 기뻐하는 그녀를 떠올렸다.

내가 그 건물에 잡혀간 이후로 아름이가 나를 원하고 내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상수였기 때문에 나만 스탠스가 바뀌면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이제 갈게요.

이 집 제 앞으로 되어있는데, 쓰지는 않을 거라 계실 곳 없으면 여기 계셔도 괜찮아요.

저는 대전 올 일이 없어서 아마 이게 마지막이겠네요.

잘 지내셔요."

침대 옆쪽에 앉아있던 아름이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

그녀에게 뭐라고 해야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해도 떠오르는 말이 없어 우선 팔을 잡았다.

"왜요, 선배. 하실 말씀 남으셨어요?"

"아니 그.. 오늘따라 더 예쁘네. 아 앞으론 진짜 말 잘들을 수 있는데, 너가 침대에서 막 그래도 전혀 안 튕기고 때리고 전기로 지지고 그래도 한마디도 불평 안하고. 또.. 또..."

"선배."

"으응.. 아니. 네.."

"제가 또 어떻게 할까봐 계속 떨어요?

안그런다니까요.

선배한테 이제 볼 일 없다고요.

사과를 더 듣고 싶으신 거에요?

아님 뭐 돈이라도 드려야하나?"

아름이는 들고들어왔던 클러치백에서 5만원짜리 다발을 건넸다.

"이거 현금으로 천만원 쯤 돼요. 이걸로 여기서 좀 계시고 나중에 생활에 필요할 만큼은 보내드릴게요.

이제 됐죠? 저 바빠요."

아름이는 돈다발을 내 앞에 던지고 일어서서 문고리를 잡고 내게 말했다.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시나 본데, 선배가 말 잘듣고 안튕겨준다 그러면 제가 뭘 해주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참 나. 어이가 없네."

...

선배한테 한마디 하고 천천히 문을 열고 현관까지 나가는 것에도 뜸을 들인다.

굳이 마지막이라고 얘기도 덧붙이고 잡으려면 지금밖에 없다는 것을 한껏 강조했으니 진짜 마지막 단계만 남은 상태였다.

부엌에서 물도 한잔 마시고 거실을 지나 현관을 가려 하는데 발에 뭐가 채인다.

침대에 있던 선배가 언제 뛰어왔는지 내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이 상황이 너무 즐거워서 아까부터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았지만 차가운 톤을 유지한 채 말을 뱉는다.

"뭐에요? 말했잖아요, 저 바빠요."

"저... 아름님..."

오늘 내내 울어서 완전히 잠겨있는 선배의 목소리. 지금도 또 울먹이며 말하는건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름님 없으면 저 진짜 못살아요..."

이 얼마나 좋은 울림인가.

나 없으면 못살겠다는 선배가 내 다리를 잡고 안놓아주고 있는데 그걸 싫은척 튕겨야 되는 이 상황이 싫지만 역설적으로 또 너무너무 좋다.

"저는 사실 어릴 때 이미 마음이 부서져서......"

선배는 눈에 생기를 잃은 채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얘기를 뱉어냈다.

사실 녹음해두면서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선배에게 관심없는 싸늘한 재벌 4세를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표정을 유지한다고 제대로 못들었다.

'아 더 듣고 싶은데, 굳은 표정 유지가 너무 어려워요 선배...'

대충 평생을 연기하고 흉내내는 가식적인 삶 속에서 사랑이란 걸 못받아봐서 내가 좋다고 했는데도 건방지게 튕겨버렸다.

자기같은 쓰레기를 사랑한다고 해주셔서 황홀했는데 아닌 척 해야될 것 같아서 못되게 굴었다 등등.

선배가 갇혀있는 동안 내게 했던 원망과 증오는 그런 가식이 아니라 진짜였을 것이다.

선배가 오늘 너무 많은 감정을 느끼면서 자신의 인생이 가식과 연기였다고 생각하니 내가 선배를 납치해놓고 했던 일들에 대해서도 가치판단이 흐려진 것 같다.

'어쩜 이렇게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귀엽게 되었을까요...'

"저 같은게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게 돼서 죄송한 맘 뿐이지만...

저 이제 진짜 아름님 없으면 못살아요...

숨만 쉬고 피만 도는 가축이지 사람으로 못살아요... 이런 보잘 것 없는 저라도 제 몸과 마음을 전부 드릴테니...

혹시 기분 안나쁘시다면,

따분하실 때 저로 약간의 재미라도 보실 수 있다면, 연인은 바라지도 않고 애완동물이나 장난감 그 이하도 괜찮으니까..."

[제발, 진짜 제발 저를 조금만 사랑해주시면 안될까요...?]

무릎꿇고 생기를 잃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해주면 안되겠냐는 선배.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너무 황홀한 행복감에 억지로 내리고 있는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조금은 티나도 선배가 그걸 알아차릴 만큼의 정신이 없긴 하지만 최대한 미간에 힘을 주고 답한다.

"선배 저랑 그 건물 지하에 있을때도 사랑하니 예쁘니, 온갖 달콤한 말은 다 해놓고.

결국 다 연기였잖아요?

제가 수요일에 좀 풀어주니까 서재에서 저 때리고 책상에 이마 내리찍고.

저는 선배 좋아했는데 선배가 저를 자꾸 밀어내니까 저도 사람인데 어떻게 안지치겠어요?

늦었어요 선배. 그것도 한참."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사랑스러워질 수 있을까 싶어 자꾸 괴롭히는 나. 나도 참 나쁜 년이다.

"흑.. 흐흑.. 흐윽.. 흐흐흑..."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 꿇은 채로 엎드려 우는 선배.

'달래주고 싶다. 쓰다듬고 싶다. 내가 어루만지면 기뻐할 때 키스해버리고 싶다.'

엎드려 울던 선배 때문에 그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선배가 내 발등에 입을 맞췄다.

쪽 쪽

연거푸 내 발등에 입을 맞춘 선배는 내 발을 핥다가 이제는 고양이처럼 다리에 볼을 부비고 있었다.

"...애완동물 키운다 생각하시고... 한번만 봐주시면 안될까요...?"

울먹이며 겨우 말하는 선배.

'아 못참겠다.'

"선배 일어나요."

"...네...?"

"닥치고 일어나서 침대로 가요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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