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5일차 (4) 외로운 이 현실 속에서 나를 데리고 도망가 주오
* * *
에타는 꽤 핫한 상태였다.
갑자기 온 나라가 우리학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뭐 당연한 일일지도.
[지금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
최근에 HOT 게시판에 올라간 글을 들어가본다.
누구긴 누구야 멀쩡히 학교다니던 우리지.
우리 중에 학점 2.7 안되면 장학금 잘리는 거 모르고 들어온 사람있나?
장짤 당해도 한학기 200만원도 안되는데 이거 인서울 사립대 반의 반값이잖아?
막말로 반년에 200이 뭐 그렇게 큰 돈이라고 거지새끼 하나 자살한 것 때문에 우리가 싸잡아 헬조선식 경쟁주의 공부기계라고 욕을 먹어야됨?
당장 돈이 그렇게 급하면 휴학하고 알바를 하던가.
집에도 자기가 얘기 안하고 '나는 혼자 해내는 멋진 대학생' ㅇㅈㄹ 하다가 힘들다고 뒤진 거 아님?
ㅅㅂ 나도 18인데 주변에 그 놈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더만, 우리학교 다니긴 한거냐?
잘사는 애들이 착한 건 아닌데 존나 힘들게 산 애들이 되지도 않는 부심 있는 거 같다.
이런 말 하면 고인모욕이니 또 싸움 나겠지만 개인적으로 ㅇㅈㅎ 걔는 지가 뭐라고 유서에 그런식으로 우리를 다 욕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음.
나는 그냥 멀쩡히 학교 6학기 다녔고 학부 졸업하면 연구를 더 해볼지 벤처 창업을 해볼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온 나라가 우리 학교 욕 밖에 안해서 답답한 마음에 쓴다.
와...
상당히 매운 맛의 글이었는데 이게 핫게를 갈 정도면 학교 안에서 이번 일에 대한 여론이 이 쪽 스탠스가 주류인가보다.
언론에 공개된 내 유서라고 이야기하는 글 중간에는
'학교는 날 돈으로 협박해서 몰아세웠고, 동기라는 사람들은 자기 학점 챙기기에 급급하지 제대로 된 토의나 지식의 습득에는 관심 없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학교를 다니는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고 쓰여있었다.
뭐 쟤들이 나한테 화날만 하네.
나 때문에 욕먹고 있는 건 맞으니까.
댓글들 중 내 편을 들어주는 글은 10개 중에 1개가 될까말까 했다.
익명1) : 솔직히 우리학교 못사는 애들도 많이 오긴 해. SKY 붙었는데 등록금 부담돼서 오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런애들이랑 나고 자란 환경이 다르니까 나도 결국은 친해지기 어렵긴 하더라.
익명2) : 자살은 안타깝다 쳐도 학교 말고 학생들까지 싸잡아 좆같다고 욕한게 개에바긴해.
익명3) : 그냥 '힘들어하는 22세 청년 자살' 하면 사람들이 별 관심을 안주니까 소년가정이니 K 공대니 하는 타이틀도 붙이고 시스템이랑 사회가 사실상 살인을 한거라고 프레임 붙여다가 관심몰이 하는 듯. 죽은 애 보다도 그거에 간판 달아서 광고팔이하는 기레기들이 문제임 걍.
나도 참 바보같다.
여기에 들어오면 그래도 같은 학교 학우들이라고 나를 쉴드치는 글이 있기를 바랬던 걸까?
나 혼자서는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팔다리가 잘린 상황에서 정말로 내 편을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구나 하는 확인만 받은 셈이 되었다.
멍하니 의미없는 클릭질을 하다 PC방비를 낼 돈이 없어 고민한다.
아까 주인아저씨가 별로 나한테 관심을 안쓰던데 화장실 가는 척 도망쳐야하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장실 가는 길이 카운터를 지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카운터를 지나쳐 문으로 나가려 하면 누가봐도 명백히 먹튀겠지.
화낼 기운도 없어 계속 멍하니 앉아있으니 에타 페이지에서 알림이 올라온다.
띠링!
[익명] 님께서 쪽지를 보내셨습니다.
쪽지는 댓글 작성자에게 보낼 수 있는 귓말 같은거라 최근에 댓글을 단 적이 없는 나한테 쪽지를 보낼만한 사람이 없을텐데.
이상한 상황이지만지금 내 처지만큼 부자연스러운 사태가 있을까 싶어 그냥 확인한다.
[익명] 님이 나에게 :
선배 이제 화 안내셔요?
아이디는 가려져 있었지만 말투랑 지금 상황을 보면 무조건 아름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봤지만 아름이나 관련 인물들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나를 보고 있는거지...?
나를 이런 꼴로 만들어놓고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는 거 마냥 웃고있을 그녀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지만 그녀만이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므로 답을 보낸다.
쪽지를 보낼 수 없는 이용자입니다.
??
아름이 계정은 관리자라도 되는 건가, 그녀는 나한테 글을 보낼 수 있었지만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익명] 님이 나에게 :
앗! 선배, 오늘도 듣는 시간이에요 ㅎㅎ..
원래같았으면 이 상황이 너무 좆같았겠지만 감정을 다 소모해버린 것인지 멍한 우울감만 가슴에 내려앉았다.
[익명] 님이 나에게 :
어제 선배 말때매 아름이 삐졌어요 ㅡㅡ
선배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용서해드릴게요.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 내 인생은 씹창이 나있는데.
별 생각도 안들어서 컴퓨터를 끄려고 했는데 마지막 쪽지가 왔다.
[익명] 님이 나에게 :
왼쪽 가슴 주머니에 용돈 있어요. 피방비 내셔요.
구속복 왼쪽 가슴에 병원마크 옆 지퍼를 여니 정말로 만원짜리가 접혀서 들어있었다.
아직도 나를 어디서 지켜보는건지 모르겠지만 그 돈으로 피방비를 내고 길을 따라 걷는다.
어디로 가야할까.
아까는 도망쳐야겠다는 목표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멍하다.
머리가 또 지끈지끈 아파와서 전봇대를 잡고 서서 이마를 주무르는데 바닥에 툭 하고 물방울이 떨어진다.
툭
투둑
눈 앞이 점점 젖어가 세상이 일그러져 보인다.
내 감정변화에 나도 당황스러워 구속복 소매로 계속 눈물을 닦지만 수도꼭지에서 가장 약하게 물을 틀어놓은 것 마냥 적지도 많지도 않은 눈물은 내 맘과 다르게 쉽게 멈추지않고 계속 흘렀다.
"흑.. 흐흑... 흐윽.."
갑갑하다.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어지러워 내 감정이 스스로 제어가 안된다.
4일간의 감금 후 벗어난 세상에서 나는 죽어있었다.
어쩌면 일반적인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는 나는 더 일찍 죽어있었겠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부터 평범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으니까.
나는 늘 쉬지않고 달렸다.
그 목표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항상 어디론가 달렸다.
달리면서 상처입고 헐떡이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여유를 연기했다.
그러면서 맡겨졌던 여러 친척 집에서는 짐이 되지 않는 착하고 성실한 아이를 연기했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잘 치면 이모, 외삼촌, 고모부가 화를 덜내셨고 선생님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한번도 제대로 듣지 못했던 칭찬을 들을 수 있었기에 공부가 좋은 아이를 연기했다.
부모님은 없고 용돈은 짜고 게임은 못하는.
그런 나를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부분은 시험 성적과 입시밖에 없었기에 악착같이 공부해서 내 등수를 지켰고 결국 특수전형으로 특목고,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내 생각이, 내 상태가 어떤지에 관심없이 내 성장배경과 지금의 내 간판을 보고 나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줬고 나는 다시 또 그렇게 얻은 내 껍데기를 진짜 나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
거짓말, 위선, 연기.
21년간의 내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들이었다.
진짜 친구를 사귀고 진짜 웃음을 짓고 진짜 고민을 털어놓는 순박한 아이는 내가 소년가장이 되었던 어린 날에 이미 죽었다.
남들을 다 속인 후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돈이 아니라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는 척 스스로도 속인게 나였다.
항상 최대한 몸을 부풀린 허세와 가짜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나 스스로도 그 거짓말에 취해있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기에.
아름이가 말한 대로 과고 조기졸업, K 공대 합격이 인생 최대 커리어였고 단순히 그를 위해 달려온 거짓말 덩어리가 이정훈이라는 사람의 실체였다.
가슴이 뚫리고 눈은 죽어 세상을 흑백으로 밖에 볼 수 없었지만 남들이 세상을 알록달록한 무지개빛이라 말했기에 나도 그렇게 보이고 느끼는 척 거짓 감상과 답지에 있는대로의 답을 읊어내는 놈이었다.
팔다리의 아픔도 잊은 채 눈물을 흘리며 길을 따라 걸으니 다리랑 강이 나온다.
"벌써 갑천까지 걸었나..."
다리 바깥쪽에 보행자 길로 다리 중간까지 걸어가 강을 내려다본다.
강물이 흐르며 돌과 물가의 식물에 부딪혀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할까... 힘드네..."
그만 편해지고 싶다.
지난 일주일이 꿈이었다는 형편 좋은 설정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의 난 마음이 너무 닳고 닳아서 예전처럼 연기하고 애쓰고 싶지가 않다.
보행자 길과 다리 바깥쪽 사이에 난간이 있었지만 그렇게 높지는 않았기에 한쪽 다리만 넘겨 걸쳐본다.
발의 세로길이랑 비슷할 정도의 좁은 폭. 그 좁은 폭을 딛고 난간을 잡고 서서 다시 아래를 내려다본다.
겨울이라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있어 강물이 핏빛으로 보인다.
여기서 뛰어내릴까 싶다가도 몸을 난간 밖으로 던지려 하니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에 다시 난간을 겨우 잡고 돌아와 길에 주저앉는다.
"흑.. 흐흑... 흐으윽..."
잠시 줄어들었던 눈물이 다시 콕 찌른 것처럼 새어나온다.
자기 인생이 위선과 거짓말 투성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는 겁쟁이.
자존감은 이미 한참 전에 바닥을 뚫고 들어가 깊은 지하에서 자신을 좀먹고 있었다.
빵 빵!
내 옆 차도에 검은색 세단이 하나 멈추더니 크락션을 울리고 뒷자리 창문이 내려간다.
"어머 선배 여기서 다 보네요. 시간 괜찮으시면 얘기 좀 할까요?"
싸늘한 눈빛의 아름이였다.
반가움? 두려움? 원망?
정확히 이유를 짚어내기 어렵지만 본능 밑바닥에서부터 뭔가가 올라온다.
그렇게 그녀의 눈을 마주치자 숨을 제대로 쉬는 것조차 힘들어진 나는 그대로 길에 주저앉은 채로 시야가 어두워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