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5일차 (1) 공원에서 깨어난 것은
* * *
그 이상한 건물에 잡혀온 이후로 그래도 눈 뜨면 흰 방이거나 침실이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내 앞에 보이는 건 나를 가둬놓은 벽도, 너무나 새하얀 천장도 아닌 초록색 잔디였다.
넓게 펼쳐진 잔디와 풀내음이 나를 반기는 것이 어색하다.
팔도 잘 움직이지 않고 아직 어제의 숙취가 해소되지 않아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매스꺼운 상태지만 똑바로 앉아 상황을 정리해본다.
먼저 여기는 어디인가.
흐음.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실리를 추구하는 공학도이기에 짧게 정리하면 공원인 것 같다. 정확하게 내가 깨어난 곳을 따지면 공원 벤치.
빈 말로라도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는 길이의 벤치에 몸이 구겨진 채로 깨어났다.
우리나라 어딘가에 있는 산이나 사유지 치고는 저 멀리 산책을 나온 가족들과 썬캡을 쓴 아주머니들도 보이니 도시에 있는 공원이라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난 어떻게 여기로 온 것인가.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그 좆같은 흰 방에 처음 잡혀간 날처럼 전날의 밤까지만 기억이 있고 그 이후는 누가 필름 중간을 잘라서 다시 이어준 것처럼 깔끔하게 끊겨있다.
아 어제 기억이 온전치 못한 건 과음으로 필름이 끊긴 것일수도...
아무튼 내가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름이가 나를 거기에 잡아두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으니 내가 지금 이 공원에 버려진 채로 깨어난 것도 그녀가 나를 여기에 둠으로써 얻고싶은 것이 있으니 그랬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내가 질려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어제까지의 반응을 보면 그럴 스타일도 아니고. 애초에 그랬으면 나를 죽이는게 편하지 굳이 이렇게 얌전히 사회로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뭘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스스로 정리해야 되는 질문 중 아마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일단 지금 움직이는 것이 불편해서 내 몸을 내려다보니 흰색 복장에 검은색 벨트가 몇 개 달려있는 복장이었다.
영화에서 정신 질환으로 충동적인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조커같은 빌런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때 사용하는 구속복처럼 생겼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가슴에 H그룹 계열의 마크가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H 병원 정신과에서 사용하는 옷인 것 같다.
아름이랑 있던 시설에 대한 것은 몰라도 내가 며칠동안 없어졌던 것에 대한 이야기나 내 옷, 지갑, 휴대폰 등에 대해 신고를 해야 할 것이다.
동네 경찰서에 신고한다고 재벌 4세인 아름이까지 수사가 진행되고 처벌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목숨을 보장받으려면 이걸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다. 설마 경찰에서 주시하고 있는 동안 나를 담그러 오지는 못할 테니까.
재벌 4세에게 납치된 후 5일차에 필름이 끊긴 채로 일어나 보니 공원에서 구속복을 입고 깨어났다라...
경찰서 형사님들이 내 말을 그대로 믿어주실지 의심스럽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 해야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폰도 지갑도 돈도 아무것도 없으니.
공원 끝 쪽에 돗자리를 펴고 마실 것을 나눠마시는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아침 조깅 후에 차라도 한잔 나눠드시고 계신것 같은데 여기가 어딘지 혹시 내 옷을 풀어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기 위해 말을 걸어보기로 한다.
다행히 무릎 아래에 있는 벨트 하나는 묶여있지 않아서 팔짱을 끼고 허벅지를 붙인 자세이긴 해도 겨우 걸을 수는 있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어색한 걸음으로 아주머니들께 다가간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그..."
"에구머니나, 이게 머야 꺄악~"
"여기 미친 사람이에요~ 누가 좀 도와줘요!!"
내가 건넨 인사는 내 귀를 찢을 듯한 비명들로 돌아왔다. 나를 본 아주머니들은 보온병과 컵들을 내동댕이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서 멀어졌다.
'지금 내 꼴이 그 정도로 놀랄 모습인가...?'
돈이나 휴대폰을 요구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여기가 어딘지, 혹시 가까운 경찰서가 있는지 여쭤보고 싶었던 것인데 지금 상황이 매우 당황스럽다.
"저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요, 여기가 어딘지 여쭙고 싶어서..."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여기 왠 정신병자가 성추행해요!!!"
아이고 참... 미치고 팔짝 뛰겠네.
두 팔 다 묶여있고 몸통도 벨트에 구속돼서 무릎 아래로만 겨우 움직이는데, 내가 어떻게 성추행을 할 수 있냐고...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신 것 같아 내 자리에 선 채로 상황을 설명하려 했는데, 이미 아주머니 한 분은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고 가장 멀리 도망쳤던 아주머니는 3대 500은 거뜬하게 칠 것같은 건장한 체격의 헬창 형님을 이끌고 돌아오셨다.
"어, 다른 분 오셨네. 저기요 제 말 좀 들어..."
"너구나? 이 미친 성추행범 새끼!"
퍽!
묵직한 주먹이 내 얼굴에 꽂힌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니 내 얼굴은 주먹이 아니라 바닥과 만나있었다. 몸도 땅에 누워있는 상태로.
왼쪽 뺨도 얼얼하고 잔디밭에 닿아있는 오른쪽 뺨도 시큰하다.
코나 뒤통수부터 떨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하 씨발 존나게 꼬이네 진짜.'
위용 위용
반쯤 체념하고 눈을 감은 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니 저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내 마음이 많이 다쳤을까봐 구급차를 부른 것도 아니고 열불이 나는 내 화를 꺼주기 위해 소방서에 전화한 것도 아닐테니, 나를 체포하기 위한 경찰들이 오겠지.
뭐 경찰서에 가고싶었던 것은 맞으니 반쯤 성공한건가.
...
지구대 직원 분한테 자세한 사정을 다는 설명 못했지만 거기서 추행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내가 심각한 정신 질환을 갖고 있지 않다는 부분은 이해하신 것 같다.
가벼운 신고면 그냥 돌려보내줄 수 있었으나 다른 시민 분께서도 정신 질환자의 성추행으로 신고를 넣어서 가까운 경찰서에 넘겨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뭐 대신에 내가 순순히 잘 따르고 있어서 구속복 팔 부분을 풀어주셨으니 경찰서에서 잘 설명하면 되겠지.
앉아서 기다리니 경찰서에서도 순찰차가 왔다.
형사로 보이는 분들께 직원분이 간단한 상황을 쓴 서류를 드렸고 서에서 마무리되면 전산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넘어오게 바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경찰차에 탄 채로 서까지 왔는데 아는 동네였다.
학교에서 엄청 멀지는 않는 공원이었고 경찰서까지 가는 길을 보니 근처에 밥을 먹거나 물건을 사러 택시타고 몇 번 나와본 적이 있는 길이었다.
'교수님께서 내가 잡혀 있었던 건물이 캠퍼스 근처 H그룹 병원 쪽 골목에 있다고 하셨으니 거기서 차로 20분정도 거리였겠네. 왜 갑자기 밖에 풀어준거지.'
형사님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데리고 차에 타셨다.
금요일 아침부터 공원에서 미친놈을 체포하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긴 한데 그렇게 인상을 쓰실 정도인가...?
경찰서에 도착해서 형사님들은 나를 2층에 데리고 가서 방 구석에 있는 테이블 앞에 앉혔다.
영화에서 보던 유리 너머에 뭔가 있을 것 같은 그런 곳은 아니고 그냥 반대편엔 형사님이 모니터를 보면서 뭔가를 쓰시고 나는 그 앞에 앉아있는 딱 뉴스에 자주 나오는 그 자리.
아까랑 마찬가지로 잔뜩 인상을 쓰신 채 키보드로 뭔가를 입력하고 계신다.
"저... 제가 공원에서 추행이나 그런걸..."
"술냄새나니까 제가 여쭤보기 전까지 잠깐 조용히 계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나 지금 술냄새 나나?'
형사님께서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톤으로 '술냄새 좆같으니깐 닥쳐주십시오'를 순화시켜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냄새를 잘 모르니 자각하지 못했는데 술냄새가 많이 나나보다.
어제 마지막에 젠가를 무너뜨린 기억까지 어렴풋이 나는데, 그 때 이미 소주 3병을 넘겼으니까 아마 벌칙으로 마신 술까지 하면 4병 넘게 마신 셈이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게 8시 이후였으니 지금도 술에 찌들어있을 법하다.
'구속복 입고 술냄새나는 남자면 놀랄 만 하네. 어쩐지 너무 반응이 심하시다 했어.'
내가 입을 여는 걸 원하시지 않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문채로 형사님 등 뒤에 있는 TV를 본다. 아침뉴스는 썩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형사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재미없는 뉴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어이~ 우리 식구들 굿모닝!
오늘만 버티고 주말엔 집 가야지~"
어색한 공기가 흐르던 그때,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봐서는 여기서 좀 높은 분이신가보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어 정 형사 아침부터 바쁘네?"
"아, 공원에서 추행으로 신고가 들어와서요.
옷 보니까 저기 근처 H 병원에서 나오신 분 같아서 담당자 확인 부탁드린다고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곧 연락 주겠답니다."
"내가 마무리할게 어여 일 봐. 우리 아직 그 공대생 보도자료 마무리 안됐잖아?"
"네, 그럼 수사지원팀에 서류처리 좀 하고 병원에서 연락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잔뜩 인상을 쓰고 계시던 날카로운 인상의 형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시고 푸근한 인상의 형사님께서 내 앞에 앉으셨다.
"어후~ 술냄새. 젊은 분이 어제 많이 드셨나보네."
"..."
"이름이 뭐에요."
"이정훈이요."
"흠... 정훈씨? 특이하네. 우연인가?"
'무슨 뜻이지? 나 되게 흔한 이름인데...'
형사님의 말씀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런걸 물어볼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닥치고 있었다.
"나이는요?"
"22살입니다."
"음..."
푸근한 인상의 형사님께서도 표정이 안좋아지셨다.
내 술냄새가 그렇게 심각한 수준인가?
"22살 이정훈씨라...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는데요?"
"00년 4월 28일..."
탁!
형사님께선 읽고계시던 차트로 책상을 내리치셨다.
나는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이 안돼서 형사님을 바라보고만 있으니 형사님이 먼저 말을 꺼내신다.
"이봐요. 지금 저랑 장난치시는 거에요? 여기 경찰서에요. 제대로 다시요."
"예?!"
'뭐지? 왜? 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