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4일차 (5) 내일 이 악몽을 깰 때쯤에도 난 눈물 흘려
* * *
포근한 선배 품 속에서 선배 향으로 가득한 상태가 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금방 잠이 온다.
...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복도다. 교실 안에서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깔깔대는 중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게 무거운 가방을 들게 할 수는 없다며 꼭 교실 앞까지는 내 가방을 들어주는 김실장에게서 다시 가방을 받는다.
"늘 고마워요. 이 정도는 혼자서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께 짐을 들게 했다가는 부회장님과 아버지를 뵐 낯이 없습니다."
부회장님은 내 아버지를 말한걸테고 김실장이 말한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비서팀 총괄을 맡았던 원래의 김실장 아저씨를 말한 것이다.
내 곁에 24시간 붙어있는 건 원래도 지금의 김실장이긴 했지만 작년까지 그룹 비서실의 비서실장 직은 아저씨께서 맡고 계셨다.
오라버니들은 조금 방목형으로 둬도 나는 꼭 꼼꼼히 챙기시는 분이셔서 비서아저씨 보다는 친척 할아버지 같은 느낌도 있었다.
어쨋든. 김실장이 그렇다고 하니 굳이 두번 세번 같은 말을 하지는 않는다.
"네, 학교 끝나고 또 봐요. 감사해요."
"즐거운 하루 되십쇼. 아가씨."
내게 가방을 건네준 김실장은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하고 다시 돌아간다.
'즐거운 하루... 즐거운 하루라...'
학교를 온 날의 내게 어울리는 표현이던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교실 앞에 서서 잠시 생각한다.
드르륵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들 나를 쳐다본다.
마치 리모컨 음소거 버튼을 잘못 누른 것처럼 교실의 말소리가 뚝 끊긴다.
늘 똑같은 아침.
내가 교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아이들은 하던 얘기를 멈추고 앞을 보고 앉거나 옮겨앉아있던 자리에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한창 얘기를 하다가 다시 자기자리로 돌아가려는 년 하나를 불러세운다.
"거기 너, 세연이었나? 내 눈치 볼 필요 없어. 앉아서 하던 얘기 마저 해."
내 눈치를 살살 살피는 게 아니꼬워 한마디 한다.
"아, 아니야... 그, 할 말 다 끝나서 원래 자리로 가려고 했어..."
눈을 내리깐 채 겨우 대답하는 그녀.
'떠는 어깨나 가리고 그 지랄을 하지 좆같은 년이.'
나를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깔깔 웃던 년이 내가 들어가자마자 정색을 하고선 일어서는데 그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는지 대놓고 뻔뻔한건지 어느쪽이라도 마음에 안든다.
그녀에게도 굳이 더 뭐라하지 않고 내 자리에 돌아가니 책상 위에 쇼핑백과 작은 박스가 몇 개 있다.
각각의 박스 안에는 잡다한 필기구, 다이어리, 간식 등등과 작은 쪽지들이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다이어리래, 아름이도 즐거운 한 주 되길!]
[주말에 놀러갔는데 너 생각이 나서. 이번주도 해피하게!]
정작 어디 놀러가거나 물건을 사러갈 때 나한테 같이 가자고 말도 안하는 애들이 꼭 어디 다녀오면 선물이랍시고 내 자리에 올려놓는다.
"가식적인 년놈들..."
작게 중얼거린 후 작은 박스들을 전부 한 쇼핑백에 쓸어담아 책상 옆에 걸어둔다.
자리에 앉으니 옆자리 애가 나한테 인사를 한다.
"아름아 안녕? 좋은아침!
오늘 기분 좋아보이네? 주말에 뭔 일 있었어?"
기분 좋아보이긴 개뿔. 나한테 잘보이려고 멘트를 미리 준비해오니 아침부터 썩어가는 내 표정도 못보고 기계적으로 아침인사를 뱉는가보다.
그래도 요즘은 내가 무서워 목소리를 떨지않고 자연스러운 톤이 되었으니 늘어가는 연기 실력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교실에 들어선지 5분만에 완벽하게 기분을 잡치게 해주시는 이 반.
수업은 수업대로 재미가 없고 반 애들은 나를 보고 떨거나 나한테 잘보이려고 우정과 호감을 연기하는 인간들 밖에 없다.
다들 자신들은 즐거운 포인트가 있고, 진짜 친구가 있으면서 나는 그것을 못느끼게 만들고 있다.
모두가 알록달록한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데,
내가 보는 학교는, 이 세상은. 색감과 채도가 빠져있는 무채색이다.
오라버니들이 잘챙겨주시긴 해도 가족으론 채울수 없는 허전함이 나를 쓸쓸하게 만든다.
교실이 한 점으로 뭉개지더니 시점이 갑자기 옮겨져 큰 강당 같은 곳에 앉아있었다.
밝고 시끄러운 강당. 내 옆에 누가 서서 손에 든 A4용지 묶음을 넘긴다.
"음 보자... 우리조에 여학생이 한 명 밖에 없네? 네가 아름이니? 한아름?"
따분하고 밋밋했던 내 세상에 색감을 입혀준 사람.
오라버니들과 비서팀 직원들조차도 채워주지 못하는 마음의 텅 빈 구멍을 채워준 사람.
나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미디어에서만 보던 소녀같은 웃음을 짓게해준 사람.
두근거리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사랑이라면,
그래 이게 사랑이라면 내게 처음으로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
선배와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
어느새 잠이 들었었는데 갑자기 깼다.
눈을 살짝 비비고 앞을 보니 아름이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나를 세게 안고 있다.
그녀가 갑자기 나를 강하게 안아서 깬건가.
"무슨 안좋은 꿈이라도 꾸나..."
땀에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조금 정리해주니 내 품에 더 파고든 그녀가 뭔가를 중얼거린다.
"...나도 사실 다같이 이야기하고 싶었어...
...왜 나만 보면 다들 딱딱하게 굳어...
...다들 조금씩 달라도 친하게 지내면서 왜 나만..."
아까부터 악몽을 꾸는지 찡그린 표정과 슬픈 목소리의 그녀가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내 품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배는 제게 세상을 선물해줬어요......
...내 편이 아무도 없어도 선배만...
...선배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선배는 저 버리지 마요...
선배마저 없으면 나...
...
...진짜 미쳐버릴 거 같아......"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하던 아름이는 나를 부르는 듯 하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아름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다가 볼을 타고 흐른다.
'무슨 꿈을 꾸길래 나를 부르면서 우는거야. 이거 깨워야 되나? 꿈속에서 내가 해코지하나? 일어나서 나한테 화풀이하면 어떡하지?'
아름이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 옆 버튼을 눌러 잠금화면을 띄운다. 오후 8시... 슬슬 깨워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름이가 저녁겸 술을 먹자고 했으니.
잠깐 저 휴대폰을 가지고 여기서 도망칠까 했지만 어제의 일로 학습이란걸 했기 때문에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아름이의 눈 밑에 고여있는 눈물을 훔친다.
볼과 목을 타고 흐른 눈물은 이불을 꾹꾹 눌러 살짝 닦아준다.
'이래도 괜찮겠지? 수건이 없어서...'
왜 그녀에게 안해도 될 행동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깨어있는 그녀는 무섭고 아직도 좀 원망스럽고 증오스럽긴 한데, 잠든 그녀가 울먹이며 나를 부르니 평범하게 괴로워하는 소녀같아서...
'정신차려 박정훈.
너가 씨발 왜 지금 여기에 갇혀있는데, 너 손톱 아래가 왜 아직도 빨간데, 배트로 맞고, 머리에 비닐 씌워져서 숨 못쉬고 기절하고.
물고문 당한 다음에 그 상상하기도 싫은 전기고문을 누구 때문에 당했는데.
니가 동정할 상대가 아니야. 개미가 인간을 걱정하는 게 더 현실적이겠다.
헷갈리지말자. 흔들리지도 말고.
우리 살아서 나가는것만 집중해.'
머리를 흔들고 마음을 다잡는다.
...
얼굴에 뭔가가 닿는 느낌에 잠에서 깬다.
눈을 뜨니 선배가 슬픈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이불로 꾹꾹 눌러 닦고 있었다.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릴 때 꿈 같기도 하고 뭔가 답답한 기분과 함께 깼다.
'선배가 왜이리 슬픈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걸까. 내가 자면서 뭔가를 한건가?'
"저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니.. 잠결에 슬픈 목소리로 나를 부르면서 울길래...
미안, 나때문에 깬거지? 정말 미안..."
선배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방금 축 처지며 말했을 것이다.
잠꼬대를 했나보다. 그것도 선배에 대한 내용으로.
"아니에요 사과안하셔도 돼요. 고마워요 저 챙겨주셔서."
내가 시킨 것도, 협박한 것도 아닌데 자면서 울고 있던 내가 안타까워서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는 선배.
어제 일로 내가 더 무서워진건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드는 행동을 골라서 해준다.
휴대폰에 손을 뻗어 시간을 확인한다.
8시. 생각보다 조금 더 자기는 했지만 딱 적당한 시간에 깬 것 같다.
기지개를 켰다가 선배를 먼저 일으켜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고 한다.
김실장에게 문자를 보내두고 나도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한다.
...
씻고 나오니 검은색 트레이닝복 세트가 있었다. 흰색 세줄이 익숙한 그 브랜드로.
매번 다른 옷을 준비해두는데 아름이의 인형 옷입히기 같은 심심풀이인것 같다. 매일매일 새 옷을 입는 이런 경험을 살면서 몇 번이나 해볼까 싶다.
'아까 울던게 마음에 걸리네. 하루종일 기분좋아보였는데 마무리까지 무난하면 좋겠다.'
옷을 입고 흰 방으로 돌아가니 실내포차 같은 조명에 빨간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