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4일차 (4) 특별한 내용 없이 아름정훈이 꽁냥대는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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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나가린데...'
매우 쫄아있는 상태긴 했지만 오늘 벌칙을 정해두고 한 게임은 결국 다 이겨서 방금은 졌을 때를 크게 걱정하진 않았었다.
제일 처음 한 게임에서 '오늘은 아픈 벌칙 금지'를 아름이가 허용해주기도 했고.
오히려 그렇기에 그녀가 어떤 소원을 말할지가 심히 걱정된다.
저번에 돈을 줄테니 자신을 사랑하는 연기라도, 몸이라도 내어주는게 어렵냐고 했던 것을 소원으로 대신 할 것인지.
평생 이 시설에 갇혀있기, 아름이의 애완동물 되기, 혹은 그녀 앞에서 그녀가 시키는 변태적인 행위들을 이행하기 등 어떤 억지를 부리더라도 싫다는 말을 하기 힘든 것이 내 현실이라 더 씁쓸하다.
'무난무난한 소원이면 좋겠다.'
온갖 걱정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던 중 아름이가 입을 열었다.
"제 소원은 '선배랑 둘이서 술마시기'에요. 게임도 같이요!
들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얼어붙어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정도면 너무나 평범했기에.
상황파악을 하느라 한박자 늦은 내가 그녀에게 답한다.
"물론이지. 소원으로 안 써도 될 정돈데 뭘.
오늘 여기서? 어쩃든 아름이 너랑 술마시면 내가 고맙지 하하..."
"선배는 어떤 안주 좋아해요?"
"음... 보통 소맥이랑 먹으러 가는건 찌개나 치킨...?"
"술마시면서 게임도 해야되니까 치킨 먹어요 그럼!"
"응.. 좋지."
아름이가 오늘 너무 신나보여서 적응이 안된다.
하지만 내 연기가 늘어서 아름이 신경을 안긁게 된 것인지 아름이가 다른 기분좋은 일이 있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애초에 폰, 컴이 없으니까 실제로 잡혀온지 얼마나 됐고 밖은 어떻게 됐는지를 모르겠네.'
사람 한 명이 갑자기 없어진 건데 별 일이 없으면 뭔가 아쉬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자주 만나는 친구도 없고 겨울학기동안은 1인실을 쓰고 있었으니 며칠 없어진다고 그렇게 큰 일이 생겼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저녁겸 술로 같이 먹어요. 그 전까지는 음... 그냥 둘이 누워있을까요?"
"그래, 아름이 너 편한대로 하자."
검은 정장의 남성들이 테이블과 카드를 정리하는 동안 아름이가 내 팔을 잡아끌며 침실로 데려간다.
풀썩.
겉옷을 침대 옆 의자에 걸어두고 뛰어든 아름이 때문에 침대가 살짝 흔들렸다.
"선배 제 곁에 누우셔요. 자켓이랑 불편한 옷은 벗으시고요."
아름이의 말에 나도 자켓을 침실 옷장 안에 걸어두고 그녀 옆에 눕는다.
계속해서 아름이의 심기를 고려해야 한다는 부분은 똑같지만 첫날에 의자에 묶여서 시작했던 것과 그 다음날 배트로 맞았던 것에 비하면 훨씬 무난무난한 하루다.
처음에는 온통 하얀 벽이 공포스러웠는데 여기에 있는 게 벌써 4일째가 되니 엄청 답답하지는 않아졌다. 복도 너머까지 나갔던 어제는 끝이 너무 안좋으니 그냥 이 안에서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침대 있지. 되게 큰 탕 있는 욕실 있지. 밥 잘 챙겨주지. 기숙사보다 좋은데?'
라 생각하며 내 옆의 아름이를 바라본다.
단발머리에 새하얀 피부. 이목구비가 얇은 펜으로 선을 딴 것처럼 샤프하지만 웃으면 또 다정하고 부드럽게 보이는 말그대로 '미소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녀다.
게다가 돈은 한국에 있는 여자 중에서는 무조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많은...
이제 겨우 4일을 본 것이지만 일관되게 아름이가 내게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 거짓이나 위선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진실된 느낌의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 엊그제의 고문이나 어제같은 쇼를 기획해서 그렇지.'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그녀 본인도 명확하게 모르겠다고 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한 번씩 그녀의 뒤틀린 사랑을 견뎌내는 게 문제지 첫날에 말했던 것처럼 나를 죽이려고나 일부러 어디 하나 병신만들어서 갖고놀고싶은 건 아닌 것 같다.
툭.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아름이가 또 이야기한다.
"하아... 선배냄새 너무 좋아...
선배, 우리 서로 번갈아 질문하기 해요. 서로 양심에 손을 얹고 거짓말은 일체 안하는걸로!
혹시 답하기 많이많이 어려운거면 입술에 뽀뽀해주기. 어때요?"
아름이 입장에서 답하기 싫어서 내게 입을 맞춰도 이득이고 서로 얘기를 해도 이득인 것 같지만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었기에 좋다고 답한다.
"저부터 할게요 음... 선배는 취미가 뭐에요?"
"어, 게임이랑 독서...? 아름이 너는?"
"그거 질문 턴으로 쓴거에요? 그럼 저도 게임이랑 독서.. 아 요즘은 선배 바라보기까지요 헤헤..."
항상 느끼지만 이럴 때 너무 헷갈린단 말이지 몇 가지가 결핍, 아니 너무 과다한 환경에서 자라서 표준 20세 여성이랑 생각하는 게 많이 다른가 했지만 이럴 때는 또 풋풋한 소녀같은 표정을 짓는다.
더 내 마음이 좀 그런건 그녀에 대한 공포가 아직 마음 밑바닥에 있는 상태인데도 어제 한 번 마음을 비울만큼 토해냈다가 맞아서 그런지 오늘 이런 아름이를 볼 때는 얼굴만 봐도 답답할 정도로 엄청 좆같지는 않다. 항상 10대씩 때리던 선생님이 하루 딱 봐주시면 좋은 쌤이구나 하는 그런 느낌인가?
"선배 이상형은 뭐에요? 솔직하게요."
"생긴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일단 나랑 공감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
아름이 표정이 조금 안 좋아진다.
아 실수였구나. 공감... 아름이가 되게 약한 부분의 키워드인데, 말을 다시 고쳐야 하나 싶어 눈치를 살핀다.
"꼭 그거 아니어도..."
"됐어요."
아름이의 눈동자가 가늘게 떠졌다가 돌아오며 싸늘하게 내 말을 끊었기에 구태여 변명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선배 차례에요."
나를 안고 있던 아름이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그게 그렇게 충격적인 말이었나.
'애초에 나를 납치해와놓고 자기를 사랑하길 바라면 너무 양아치새끼 아니냐? 게다가 이상형인데 많이 다를수도 있지..'
라 자기합리화를 하고 나도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다.
"혹시 우리 언제까지 이 건물에 있는 거야?"
지금은 방학이긴 해도 학교도 가야하고, 그녀 입장에서도 여기에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일텐데, 혹시 이 감금생활의 끝이 있을까 하여 아름이에게 물었다.
"선배가 어떻게 하시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나가고 싶으세요?"
"며칠 되니까 여기 생활이 엄청 싫은 건 아닌데, 결국 나가긴 나가야 하니까 하하..."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씀하세요 이 안에서도 부족함 없이 지내게 해드릴게요."
내가 달라고 하고 싶은 그 '필요한 거'가 자유라는 말도 굳이 그녀에게 하지는 않는다. 이미 원스트라이크라 두 번정도 더 실패하면 아웃일테니까.
서로 질문을 몇 번 더 주고 받았다. 아름이는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상대에게 물어볼만한 내 관심사나 취향, 생각에 대한 것을 물었고 나는 이 좆같은 납치감금에 대해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녀는 나한테 관심이 있고 나는 여기서 살아나가는 것에 관심이 있으니 질문의 방향이 다른 것이 당연했다. 다만 그렇게 몇 번 주고받으니 너무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 티가나나 싶어 그녀에 대한 질문도 섞어보려 했지만
"선배, 별로 안궁금한 게 티가나는 그런 질문은 안하셔도, 아니 하지 말아주세요. 오히려 그게 더 슬프니까요."
하는 그녀의 대답에 나도 억지 질문은 쥐어짜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질문할 차례.
"어... 혹시 지금은 말해줄 수 있니? 구체적으로 내게 뭘 원하는 건지?"
아름이는 잠시 고민하는듯 하다가 싱긋 웃고는 볼이 좀 빨개진다.
왜 저러는거지, 그런 상상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던 내게...
쪽
아름이가 다가와 입을 맞췄다.
"말해줄까 했지만, 역시 지금 말해주면 별로에요. 미안해요 제가 먼저 제안해놓고 마지막에 뽀뽀로 답을 피해서."
나는 모르는, 그녀의 머릿속 계획이 좋은지 헤실헤실 웃는 그녀는 밤이 되기 전까지 조금만 자자고 말한다.
"아침부터 놀아주셔서 고마워요. 저녁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우리 같이 자요."
아침 일을 생각하면 오싹하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잠에 들자는 말이겠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후에 그녀에게 포인트를 많이 잃은 것 같아서 조금 만회해볼 생각으로 셔츠 팔 부분을 걷고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준다.
"오~ 선배 센스가 제법인데요? 여자 좀 꼬셔봤나봐요?"
놀리듯 웃으며 말하는 아름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저는 선배 팔을 베는 것보다는 안아주시는 게 좋아요.
그 편이 훨씬 선배 냄새가 많이나서...
정후니움을 충전해야되니까...♥"
친절하시게도 더 점수가 높은 답을 알려주셔서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그녀를 안는 것처럼 옆으로 누워 팔을 그녀 위에 얹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그렇게 있던데 내가 먼저 하는 건 또 다른지 얼굴이 빨개진 아름이는 나를 꼭 안으며 몸을 내게 밀착시켰다.
"우리 이렇게 좀만 자요. 너무 행복해..."
내 배 부분에 느껴지는 말랑한 그녀의 가슴과 그녀의 몸에서 은은하게 나는 꽃향기가 나를 침착하게 있기 힘들게 한다.
아래쪽에 조금 반응이 왔지만 그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허리를 살짝 뒤로 뺀 불편한 자세로 나도 같이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