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4일차 (2) I have a dream
* * *
의외다.
사실 이 좆같은 시설에 잡혀온 이후로 내 예상대로 딱딱 흘러간 게 한손에 꼽을 정도긴 하지만 이건 그 중에서도 확실히 의외다.
'싸패년이랑 침대에서 안고있다가 육딜도 되기 VS 보드게임하면서 연인놀이 해주기 하면 후자가 너무 이득 아니냐? 질때마다 전기충격같은걸로 벌칙이라도 주나?'
더 이해가 안되는건 훨씬 야한 멘트는 자연스럽게 말하는 그녀가 이런 연인놀이에 해당하는 걸 제안할때는 되게 부끄러워한다는 점이다.
자기 가슴을 주물러도 된다는 멘트보다 보드게임하자는 말을 하는게 더 부끄러워할 이유가 뭔지 고민해봤지만 어제의 나를 쿨하게 용서해준 것처럼 그녀의 변덕이 나한테 긍정적인 면도 있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간다.
"보드게임 좋지. 우리 캠프에서 뭐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않아 되묻는 내게 그녀는 대답해주는 대신 날 침대에서 일으켜세운다.
"선배가 좋다고 하셨으니 제가 준비해둘게요. 일단은 씻고 오세요.
아니면 같이 들어갈까요?"
어떻게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거절할까 했지만 아름이는 애초에 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 나를 침실 밖으로 밀어낸다.
"욕실 위치 아시죠? 갈아입을 옷도 가져다드릴게요."
아무것도 없는 흰 방을 가로질러 욕실로 간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씻으러 들어가려다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어 거울을 보니 개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아 너무 오래 차서 차고 있는지도 몰랐네.'
생각보다 쉽게 빠지지 않아 거울로 가죽의 구멍 위치를 보면서 겨우 풀었다.
그 후 침대에 오래 누워있어서 그런지 약간 뻣뻣한 몸을 풀기 위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큰 탕에 들어간다.
"으아아아~"
따뜻한 탕에 들어가니 몸의 피로가 확실히 풀리는 느낌이다. 이놈의 손 끝은 아직 물에 닿으면 따끔따끔하지만 뻐근한 관절과 근육들은 훨씬 편해지는 느낌이랄까.
물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조금 맑아진 정신으로 지금의 상황을 정리한다.
어제 분명히 경호팀도, 다른 직원도 없었다.
서재 안에는 아름이 뿐이었는데...
아름이가 도발하니까 눈이 뒤집혀서 뺨때린거랑 팔 꺾고 머리채 잡아서 책상에 박게 만든건 아름이가 봐줬으니 넘어가고,
'마지막에 정확히 어떻게 됐더라?'
어제 밤은 심장부터 머리 끝까지 뜨거워졌던 상태라 기억이 또렷하게 나지 않는다.
아름이가 나한테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말하는걸 어떻게든 보고 나가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옷을 잡아당겼었던것 같다. 음.
근데 막상 벗기고 나니깐 이래도 되는건가 싶어 당황했고, 그 다음에 아름이가 또 뭐라고 하니깐 그냥 휴대폰만 집어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찌리릿.
"흐음~"
!!
'아, 목걸이! 씨발 목걸이에 전기충격기가 붙어있었나보네'
말 그대로 눈앞이 번쩍 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극렬한 고통이 목부터 타고 내려갔던 것 같다. 그 개목걸이 말고는 나한테 전극을 갖다댈 수 있는 부위가 없었기도 하고.
아직 김실장이나 아름이가 갈아입을 옷을 갖다놓지 않았기 때문에 탕에서 나와 목걸이를 찾으러 가본다.
탈의실 앞에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까치발을 들고 다가가 내 옷위에 올려져 있는 검은색 가죽을 챙겨 다시 탕으로 돌아온다.
"와씨. 이거 이렇게 묵직했었어?"
개목걸이를 처음 받을 때는 박스 안에 담겨있어서 박스ㅡ무게까지 생각해서 그정도인가보다 했었다.
아름이가 채워준 이후로는 목 전체가 힘을 나눠서 받으니 가죽에 닿아서 답답한 느낌은 있었어도 목이 무겁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어, 목걸이 안쪽 면에 금속부분이 있다. 이 사이에 전압이 걸리는 구조인가보네."
목걸이를 빼서 위아래 옆을 살펴보니 조금 부자연스럽게 두꺼운 부분이 있긴 하다.
단순히 벨트 디자인의 가죽이라기엔 너무 두툼하게 올라온 부분과 그 안쪽에 있는 금속부분. 목에 처음 채워질때는 앞에 각인판이나 버클부분이 목에 닿았나 했는데 아니었다.
"그러면 이런걸 어제부터 계속 찬 상태로 그 쇼를 한거야 그럼?"
아름이가 혼자 서재에서 기다릴만 했다.
SF 영화에서 외계행성 검투사들도 주인이 전기목걸이 채워두면 고분고분 말을 듣던데 방구석 히키코모리인 내가 온갖 기교를 부려도 버튼 하나면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
근데 그렇게 생각하니 의문이 더 많이 남는다.
'근데 그러면 나한테 뺨이랑 얼굴은 왜 맞은건데? 목은 왜 졸리고?'
이해할 수 없다. 그냥 그런 성향의 변태라서 '매도당하고 싶은 아름님' 놀이를 한거라고 하기에는 마지막에 내가 목을 졸랐을 때의 반응이 너무 리얼했다.
'진짜 그러다 죽겠다 싶어서 놀랐는데, 그것도 연긴가...'
게다가 M이라기에는 내게 너무 가학적이지 않은가.
'존나 마조년이면 자기 손톱이나 바늘로 따서 오지 왜 나한테 그런거야 진짜.'
여기 온 이후로 대가리를 굴릴수록 갑갑하고 우울해진다.
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대부분은 병신같은 쇼가 되었고
내가 그녀를 이해해보려고 혼자서 자꾸 가정과 고민을 돌려봐도 나는 예측불가능한 싸패년 기분에따라 굴러지는 운명이구나 하는 자존감 하락으로만 이어진다.
"아~ 이제 모르겠다 쓰벌~
그냥 여기 잡혀 있을까? 밥은 잘 주던데."
발버둥 치는게 좀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 꼭 나가고 싶은 이유가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과학자'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부모님 두분이 다 계실 때부터 입버릇처럼 말했던 내 꿈이었다.
사실 지금 나는 엄밀히 따지면 공학자(엔지니어)긴 한데, 뭐 그때는 과학과 공학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였으니까...
친척들 집에 얹혀살면서 눈칫밥먹는게 힘들어 고등학교는 과학고에 꼭 붙고 싶었다. 대학도 잘가고 기숙사 학교인데 공립이라 소년가정 지원항목도 많았다.
대학에 와서도 사실 한 학기 빼고는 계속 장학금 받으며 다녔으니,
외삼촌 쪽이랑은 본가가 그쪽이라고 남들한테 형식적으로만 이야기하고 거의 절연한 채로 살았다.
나 한몸만 잘 챙기면 되는 조건에서 취직이 잘되는 전산과나 기계과를 고르지 않았던 건 나중에 연구를 하고 내 이름을 붙인 뭔가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도 꽤 있었을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사람이 적은 과긴 하지만 '건설 및 환경공학'이라... 뭔가 멋지지 않은가. 도시 시뮬레이션 모델을 가지고 설명하고, 환경 변화에 대해서 연설하고 크으...
돈도 돈이지만 이런 유치한 꿈이 있기에 여기서 싸패 재벌년의 장난감으로 생을 마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탕에서 오래 생각하다보니 약간 어지럽다.
조금 전 김실장이 갈아입을 옷을 두고 가겠다고 했으니 나도 슬슬 나가면 될 것 같다.
...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은 나.
탈의실에 새 속옷이랑 왠 정장이 있길래 놀랐는데 블랙타이랑 셔츠가 포함된 턱시도였다.
'존나 불편해 이거.'
살면서 셔츠를 입어본 일이 교복입을 때 밖에 없었기에 낑낑대며 겨우 입고 나왔다.
대충 옷만 걸칠까 하다가 그러면 또 아름이가 옷매무새를 고쳐준답시고 셔츠를 풀어 이상한 짓을 할 게 뻔하기 때문에 그냥 시간과 노력을 더 들이는 쪽으로 정했다.
흰 방에 들어서니 보이는 건 테이블 앞에 앉아서 손을 흔드는 아름이.
"선배 빨리와요~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평소에 기분좋아보이는 아름이가 행복함에 가까웠다면 오늘은 신나고 들떠보인다.
"어, 응..."
처음 입는 옷이 좀 불편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어 아름이 맞은 편의 의자에 앉는다.
"크으~ 턱시도 차림의 선배도 초 섹시~"
나한테 정장을 줬길래 아름이도 평소처럼 슈트 차림일 줄 알았는데 블랙진에 가죽자켓, 안쪽은 흰 티였다. 저런걸 뭐라고 하더라, 락시크?
"어, 고마워.. 그 오늘은 정장 아니네...?'
"둘다 슈트 입고 오면 너무 비즈니스나 딱딱한 파티 같잖아요.
근데 포멀한 선배도 보고 싶으니까 대신 제가 좀 캐주얼하게..."
자기의 기준이 또 있나보다.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면 더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뭐 이만하면 A드려도 될 것 같아요 헤헤..."
'얘 기분만 좋으면 다 OK지 뭐.'
자리에 앉아 아름이를 마주보고 있으니 김실장이 이것저것 박스가 가득 있는 카트를 밀고 온다.
...
...
어두운 방. 모니터 앞에 초췌한 모습의 이교수가 앉아있다.
화면에는 여러 그래프들이 겹쳐져있고 관련된 숫자들이 빼곡히 써있다.
'이론상으로는 확실히 될 것 같은데 말이지...'
몇번씩 같은 페이지를 확인하며 계산된 수치가 맞는지 확인하는 그.
"이거 위반하는 연구윤리 규정이 너무 많아서 세상에 알려지면 경고장이랑 징계 공지만 해도 평소 한달치 메일을 하루만에 다 받을 거 같은데..."
혼자 중얼거리던 이교수는 눈을 감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심을 굳힌 듯 키보드로 몇가지를 입력하고 방에서 나온다.
"아빠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꼭 구해줄게... 조금만 기다려줘..."
그렇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딸에게 다짐하듯 말하는 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