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0부 3일차 (3)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정훈이
* * *
화가 풀리지 않는다.
조금 전 커다란 댐에 작은 균열이 난 것처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던 무언가가 반짝하고 튕겨나갔었다.
하지만 그 균열이 결국 댐 전체를 부수고 가두어둔 물 전체가 쏟아져 나오듯
3일 동안 참고 감춰왔던 감정의 껍질에 금이 가면서 그 안의 화는 점점 더 많이 뿜어져나온다.
"한아름 이 걸레년아. 너도 아무 말이나 해봐."
어떤 대답을 바라고 아름이에게 묻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그녀의 사과인가, 반성과 함께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원하는 것인가.
아마 분풀이에 가까울 것이다.
어떤 답을 듣더라도 지금의 화를 억누를 수 있을만한 이야기가 그녀 입에서 나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기에.
내가 그녀에게 폭력으로 답할 것이라 미리 정해두고 그 당위성을 억지로 부여하는 비겁한 짓이었다.
"선배..."
나보다 체구가 훨씬 작아 뺨을 맞을 때마다 휘청휘청하던 아름이가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연다.
"말해봐. 지금 최대한 신사적으로 대하고 있는 거니까."
마저 이야기하는 아름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제 몸에 손을 대셨어요...
여기서 나가셔도 선배 하나 찾아오는건 일도 아닌데...
다시 잡아오면 몇 토막 내드릴까요...?
적당히 5등분 해서 동해에 뿌려드려요...?"
상상도 못한 대답.
정말 그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답이 나왔다.
'미친년... 진짜 미친년... 근데 정말 어떡하지?
저 년을 여기 두고 나가도 다시 잡히는 거 아닌가?
나가자마자 경찰서로 뛰어야하나?'
내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퀴즈쇼였다면 아름이의 대답은 만점을 넘어선 골든 정답이다.
하지만 정말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증거가 필요하니까 일단 나갈 때 저년 휴대폰을 챙겨야겠다.
근데 한아름 쟤가 지금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었으면 지금 했겠지 왜 저렇게 입을 털지?
사람이 가진 패가 없을 때 입을 터는 거라던데 지금은 개좆밥이 맞잖아.'
나간 다음 일은 그때의 일이고, 이 상황에서까지 내게 저런 태도를 유지하는 아름이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아름아."
...
그녀를 불러봤지만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다.
휙!
"아..! 아앗...!"
아름이의 머리채를 잡아들어 강제로 내 눈을 바라보게 한다.
"어제 내가 밥 좀 안먹었다고 썰어주실까 했던 년이 지금 내가 부르니까 듣는 척도 안하시네?"
"앗... 아야..."
내가 잡고 있는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쓴 채로 겨우 나를 보고 있다.
톡 톡
아름이의 머리채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아름이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한다.
"아름아~ 대답을 해야지.
난 되게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아름이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이 선배도 어떻게 대해야할지 헷갈린단다...?"
...
퉤!
나를 올려다보던 아름이가 내 말이 끝나자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와... 독한년'
"안되겠다 아름아, 아니 아름씨.
우리 진솔한 대화의 시간을 좀 가집시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게 많은데, 조금 솔직해져보는겁니다~"
쿵!
아름이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돌려 책상에 이마를 찧게 했다.
팔과 다리로 아둥바둥하는 그녀지만, 성인 남성과 갓 20세의 여자가 근력으로 상대가 될 수 있을리 만무하다.
"오늘이 3일차니까 3번만 더 갑니다 아름씨~"
쿵!
쿵!
쿵!
꽤 아플 법도 한데 처음 머리채를 잡혔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아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처음 이후로는 팔다리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머리를 잡아 다시 내 얼굴을 보게 한다.
이마가 꽤 빨개져있다. 책상이 평평해서 어디 찍히거나 긁힌 상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약하게 찍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새하얀 그녀의 다른 피부와는 대조되게 뺨과 이마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름씨, 첫날에 아름씨가 저한테 뭐라 그러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좋은 대화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진행되는거라면서요.
제 진심이 아직 안닿으셨나?
영 대답을 안해주시네, 우리 아름씨께서는...?"
아무 반응이 없자 내 인내력을 시험하는 것인가 싶어 더 좆같다.
조금 전 엄살이 심하니, 존심도 없니 하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아름이가 나와 똑같은 답을 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이마를 책상에 몇번씩 박고도 전혀 소리도 내지 않은 그녀가,
몇 대 맞은 상태로도 내 얼굴에 침을 뱉는 독한 아름이가 어떻게 해야 미안하다 살려달라 이야기할지 잠시 고민한다.
"아름씨, 제게 마음을 열어주실 생각이 없으신거 같아서 말이죠...
제가 나름대로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힘 좀 쓰겠습니다?
꼭 끝까지 가서 우리의 사랑인지 뭔지까지 도달해봐요."
왼손으로 아름이의 머리채를 위로 당겨 까치발로 겨우 버틸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퍽!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주먹을 아름이의 얼굴 오른쪽에 꽂았다.
털썩
가녀린 그녀는 선 채로 버텨내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진다.
"아름씨 혼자 일어나실래요,
제가 일으켜드려요?"
대답도, 미동도 없는 그녀.
친히 머리채를 잡아당겨 방금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드린다.
"한 대 더 해봅시다~"
퍽!
털썩
아름이는 또 쓰러졌지만 이번에도 전혀 반응이 없다.
'아아!! 이 씨발년이 어떻게 해야 울고불고 하냐고 씨빨!!!'
"한아름 이 좆같은 년아. 버틴다고 뭐가 되는데?
나한테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냐며,
너는 지금 뭘 할 수 있어서 그렇게 뻐팅기는데?
걍 울고불고해 거지같은 년아.
그게 그렇게 어렵냐? 왜?
등신같은 새끼한테 맞은걸로 빌기에는 재벌 명예가 안살아서?"
"선배..."
쓰러져 있는 아름이가 입을 연다.
"그래 씨발년아, 방금 맞은 건 좀 아프던?
몇 대 더 맞으면 죽겠다 싶어서 힘들지?"
"선배는 힘없는 여자애나 때리면서 자존감을 채우는 찐따셨네요...
그것도 뺨 때리고 얼굴에 주먹질 하는 정도밖에 못하시면서...
얼굴에 집착하는 건 선배가 외모에 자신이 없으셔서 그런건가요...?
때리는 척, 화가 주체가 안되는 척만 하시고 사실 제대로 뭔가를 할 용기가 없으시잖아요 선배는...
다시 여쭤볼게요...
감당하실 수 있으셔요? 지금 저한테 이러신거?"
"아!! 이 씨발년아!!"
너무너무너무 좆같은데 진짜 어떻게 할 지를 모르겠다.
사람도 때려본 놈이 잘 팬다고 일생을 방관자나 맞는 놈으로 자란 내가 갑자기 기술적으로 사람을 잘 때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쯤하고 탈출이나 할까 했지만 그러면 아름이에게 진짜로 지는 것 같아 오기를 부린다.
슥
책상 위에 있던 두꺼운 책을 집어든다.
퍽 턱.
쓰러져있는 아름이 머리에 던졌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우지끈!
아름이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발 뒤꿈치로 밟았다.
손가락 마디가 뒤틀리고 찍혀 상당히 고통스러울텐데 반응이 없다.
한쪽 팔을 꺾어보았다.
더이상 돌리면 안될 것 같은 지점까지 꺾어 인대가 다치는 경계를 훨씬 넘긴 것 같은데도 반응이 없다.
그 뒤에 몇가지 고통스러울만한 것들을 가했지만 아름이는 일절 고통스러워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불같이 끓어오르던 화가 어느새 싸늘하게 식는다.
나는 물에 한번 담궈지자마자 살려달라고 소리쳤는데, 배트로 몇 대만 맞아도 진짜 죽을 것 같다고 사정했는데.
솔직히 나는 그녀보다 훨씬 정신력이 약한, 한심한 인간이 맞는 것 같다.
이런 무기력한 여자애 하나가 아파하는 소리를 듣겠다고 그렇게 고통을 주고서는 결국 원하는 대로도 못하고.
도저히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평소같았으면 절대 못떠올릴 방법을 생각한다.
'이건 하면 진짜 끝인데...
아냐 여기서 이렇게 나가더라도 평생을 패배감에 살거야.
그거보다는 죄책감이 낫지.'
엎드려 쓰러져있는 아름이를 위로 보게 뒤집는다.
고통을 참느라 입술을 얼마나 씹었으면 입술이 다 터져 피가 흘러나온다.
"이 나쁜년아.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거야.
그냥 미안하다. 살려달라. 한번만 해.
나도 이 이상 너한테 그러는건 썩 유쾌하지 않으니까."
아무 대답이 없다.
중간부터 계속 죽은 눈이었던 아름이에게 생기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름이의 블라우스를 좌우로 세게 당긴다.
단추가 튕겨저 나가고 리본이 풀려 아름이의 흰 속살과 검은색 브래지어가 눈에 들어온다.
'진짜 이게 맞나...?
괜히 감당도 못할 일을 오기로 하는 건 아닐까?
이거 진짜 이래도 되나?
돌이키기 힘들지만 진짜 돌이키려면 여기가 마지막인 것 같은데...'
...
그 다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내게 생기가 돌아온 아름이가 말한다.
"에휴, 브라도 제가 벗어드려요?
그렇게 저능아처럼 어버버 하고 있어서 치마는 어떻게 벗기려고 그래요.
저 어떻게 할 거 아니었어요?
이대로 밖에 나가도 빡촌 가는 거 아니면 평생 모쏠아다로 살텐데,
범죄 저지를 용기 한번으로 떼고 나가야죠.
잠깐 일어서계시면 제가 알아서 다 벗고 다시 누워드려요?
아까 말했듯이 선배 지금 자기가 생각해도 등신같죠.
안그래요? 선배?"
나를 한심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아름이.
그렇게 고통을 주려 내가 생각해도 심했다 싶을 짓을 몇개나 했는데
아름이는 풀이 죽어있거나 떨기는 커녕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게 말한다.
주르륵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분명 지금 우위에 선 것은 나일텐데.
겁먹고 떨어야 하는 건 내 밑에 누워있는 아름이고,
분노와 흥분에 차서 아름이에게 고통을 주고 복수를 할 사람은 나일텐데...
비겁하게 무방비한 여자애를 두고도 뭐 하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패배자스러운 스스로가 한심해 눈물이 난다.
'이 씨발년... 이 좆같은 걸레년이...!'
싸늘하게 식었던 화가 다시 올라온다.
그 화의 대상이 이 순간까지도 나를 무시하는 아름이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뭐하나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나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다시 뜨거운 쇳물처럼 끓어오르는 화를 굳이 제어하려 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두 손이 아름이의 목에 가있다.
처음 뺨을 때리고 몇 대나 더 갈긴 것처럼,
내가 아름이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 직후에나 당황스럽지, 이후는 쉬웠다.
이 방에 들어와서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고통스러운 표정의 아름이가 내 아래에 있었다.
왠지 모를 희열감이 느껴져 손에 힘을 더 준다.
"윽... 끄윽..."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리와 팔다리를 이용해 나를 밀어내려는 아름이.
가는 그녀의 몸으로 그 위에 깔고 앉은 나를 밀칠 수 있을 리 없고.
내 팔을 떼어내려는 아름이의 손에도 힘이 빠져 앙탈부리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뒤져 좆같은년아. 사랑? 뭐, 사랑?
너같은 싸패년을 사랑할 골빈 놈이 어딨냐?
너같은 년이 없는게 이 세상에 수십 수백배는 더 이득일거다.
내가 깔끔하게 보내줄테니까 다음 생에는 예쁘게 생긴 얼굴만 유지하고 고분고분한 년으로 와라 알겠지?
그러면 내가 너로 아다 떼줄게 하하..."
그녀가 몸부림치는게 적어지고 승리했다는 감정이 가슴에 가득 찬다.
그렇게 아름이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선배... 저 진짜 죽어요... 저는 정말 그게 사랑이었는데... 흑... 흑..."
울먹이는 아름이가 마지막 숨을 쥐어짜 말한다.
아차 싶어 재빨리 손을 그녀의 목에서 뗀다.
'내가 뭘 한거지.
얘가 아파하는 걸 보겠다고 때리고 옷벗기고 목조르고...
내가 살인범이랑 다른게 뭐야.'
머릿속에 많은 장면들이 지나간다.
어릴 때 어렴풋이 기억나는 부모님,
중학교때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몰래 이것저것 챙겨주셨던 담임 선생님.
추천서 써주신 K 공대에 붙었다고 말씀드리니 당신의 일처럼 좋아해주셨던 과학고 물리 선생님,
그리고 어제 뵀던 이종국 교수님까지.
'지금 이런 쓰레기같은 내가 되라고 지금까지 도와주셨던 게 아닐텐데...'
자괴감에 온몸이 무기력해진다.
아까부터 흐르던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뺨과 목이 다 젖는다.
"선배..."
"응... 아름아.. 흑.. 내가.. 흑... 미안해..."
복합적인 감정에 사과하게 되는 나.
무기력한 몸을 겨우 일으켜 아름이의 휴대폰을 챙기고 서재 안쪽 문을 향해 가려 한다.
"아... 앞으로 한걸음이면 닿을 뻔 했는데...
선배가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놀려주고 싶어서...
그런 저를 보고도 계속 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아.. 아쉬워라...
그래도 고마워요.
오늘 진짜 너무 좋았어요...♥"
누워있는 채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아름이.
신경쓰지 않고 발을 뗀다.
"선배."
"응?"
알수 없는 말을 하다 갑자기 날 부른 아름이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헐벗고 있는 아름이의 손에 작은 단추 같은 것이 있다.
'? 뭐지 왜 부른거지? 저건 뭐고?'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 또 봬요...♥"
"그게 뭔 개소리야 씨ㅂ..."
띡
찌릿!
"으아아아악!!!!!!!!! 아악!!!!! 윽.. 아아악!!!!!"
익숙한 고통.
목 뒷부분에 뜨겁게 달군 철사를 집어넣어 척추를 타고 하반신까지 관통해서 뚫는 듯한 고통.
신경 하나하나, 혈관 하나하나의 위치를 인식시켜주듯 잠깐 정신이 끊기고 바닥이 없는 듯한 공포의 늪에 빠졌다가 다시 올라온다.
"윽.. 우웨엑....! 욱.. 우엑...!"
격한 메스꺼움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한다.
"아... 아름아... 미안... 내가.."
"잘자요."
"으아악!!!!!"
아름이의 말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