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0부 3일차 (2) 정훈이 주도하는 스킨쉽
* * *
어둡다.
어제처럼 조명 한 두개만 켜져있어 넓은 방의 대부분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급하게 뛰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기에 팔의 붕대를 풀어 석고 틀을 분리한다.
관절을 움직이면 조금씩 욱신거리긴 하지만 못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손 끝도 약효가 끝났는지 점심 이후로 한번씩 따끔따끔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나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정도 고통은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개쫄리네. 문열고 나갔는데 김실장 그아저씨 있으면 어떡하지...
아 몰라 씨발. 걸리면 또 개쳐맞고 지져지겠지...'
턱.
혹시나 하고 철문을 밀어봤는데 역시 잠겨있는 듯하다.
문 오른쪽에 재질이 조금 다른, 손바닥 정도 크기의 플라스틱 부분에 카드키를 대니 문이 열린다.
띡 철컥.
조심히 문을 열어본다. 살짝만 열어 주변을 둘러보니 흰색 복도다.
병원을 연상시키는 긴 흰색 복도.
주변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으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와 씨발 그 흰 방을 드디어 벗어나보네...
하아... 긴장 놓지 말고 천천히...'
혹시 갑자기 사람 발소리가 들리면 빠르게 흰 방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잔뜩 쫄아있는 상태였지만 복도 끝까지 도착할 때까지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쪽은 아무것도 없는 벽. 왼쪽은 흰 방과 비슷한 철문.
나가기 직전이 가장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빠르게 철문까지 다가간다.
'그러고보니 이 안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못들었네...
바로 엘리베이터는 아닌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방이 있는건가...?'
띡 끼릭.
마찬가지로 카드를 대는 곳이 있어 카드키를 대고 문을 연다.
조심히, 아주 조심히 문을 연다.
상대적으로 복도는 어둡고 방 안은 밝았기에 갑자기 많은 빛이 눈에 들어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완전히 열린 철문 뒤로 보이는 방 안의 모습...
"헉...!"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
깜짝 놀란 나는 그대로 문을 닫고 돌아가려...
"선배~ 들어오셔요~"
흰 방이, 내가 지나온 복도가 병원과 같은 딱딱한 인테리어라 철문 안에도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복도나 별 거 없는 공간이 있을 줄 알았다.
문 너머에는 서재.
다른 공간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갈색 천지인 서재가 있었다.
그것도 책장 앞의 고급스러운 의자에 아름이가 앉아있는 상태로 말이다.
도망쳐봐야 뒤에는 흰색 방과 침실밖에 없기에 아름이가 시키는대로 방 안에 들어간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같은 화려한 조명이, 벽과 바닥은 나무로 되어있는 것 같다.
번들번들한 마루와 갈색 벽 모두 올곧은 나무의 결이 보인다.
내 키의 두배는 되어보이는 높은 책장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름이.
내가 방안에 들어와 문을 닫자 책을 덮고 일어선다.
'사랑과 집착 사이... 저런 책을 읽으면서 그 지랄을...'
책을 내려놓은 아름이가 내 앞에 와 선다.
"일단 앉으실래요?"
탈출을 위해 복도 끝 철문을 열었는데 아름이가 있어서 나도 놀랐지만 아름이도 놀랄 만한데 그닥 놀라지 않은 듯한 아름이.
"아니, 너가 왜..."
아름이가 내 말을 칼같이 끊는다.
"선배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제 서재에 있는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듣고보니 맞는 말이다.
방 구석에 문이 하나 더 있는 걸로 보이는데 저쪽이 엘리베이터인가보다.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내용은 맞는 것 같은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일단 계획 자체는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지금 경호팀이 없는가?
없다. 이건 맞는 것 같다.
내 카드키에 문제가 있는가?
없다. 여기까지 문 두개를 열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럼 당장 나를 막을 사람이 있는가?
이 부분이 문제다.
낮에도 김실장과 정장의 남성들은 없었지만 조리복을 입은 요리사들은 있었다.
지금 당장 내 앞에는 아름이밖에 없지만 아름이가 연락을 취하면 당장 투입될 수 있는 인원이 대기중일 것이다.
'잠깐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 얘만 확실하게 재끼면 나갈 수 있는건가 그럼...?'
내 앞에 선 아름이가 나를 빤히 처다본다.
"선배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나요?
어차피 선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다정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내용.
내가 대답하지 않자 아름이 혼자만 계속 말한다.
"어떻게 방을 나오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뭘 하실 수 있는데요. 지금 선배가?
첫날에 여기 잡혀와서는 아름씨, 아름님 하다가 제가 겁주니까 무서워서 질질 짜고.
자기가 한 중2병 멘트들 읊어드리니까 쪽팔린건 아시는지 얼굴 빨개졌다가 제가 또 해코지할까 두렵다고 흐느껴 우시고.
제가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너무 한심한 병신이에요 선배는."
휴대폰 끝으로 내 배를 쿡쿡 누르며 이야기하는 아름이.
짜증나기는 해도 틀린 말이 없어서 뭐라 받아치지도 못한다.
그것보다 이틀 사이에 아름이에게 각인된 공포때문에 다시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다.
"몇 대 맞았는데도 상황파악 못 해서 저한테 튕기시던 선배도 결국
조금만 겁주면 다시 겁먹고 빳빳해져서 첫키스도 제게 내어주셨잖아요.
속으로는 제가 미우면서도 엄살은 심해서 고문 한바퀴 돌릴 때마다
'살려주세요~ 죽을 것 같아요~ 제발~ 거기 누구 없어요?'
남자가 존심도 없어요?
쪼다같아."
계속해서 매도하는 아름이에게 뭔가 욱한다.
'좆같은년 자기도 재벌 아니었으면 좆도 아니면서 뭐같이 말하네 진짜'
"살면서 제대로 성공해본적이 없으셔서 패배가 학습되셨나?
그냥 제가 돈 좀 넉넉히 드릴게요. 남창 같이 허리나 흔드셔요.
말이 K 공대생이지 작년에 장학금도 짤려서 과외로 겨우 채웠다면서요.
선배는 선배 가족들한테.
아, 가족이 없으시구나.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그래서 그렇게 찐따같이 자라셨나?"
점점 수위를 높여가는 아름이는 휴대폰으로 내 미간을 툭 치며 말한다.
"선배, 없이 자란건 자랑이 아니에요.
악바리 근성이 아니라 주제도 모르고 설친거라고요.
가진 것도 없어. 잘난 것도 없어.
그냥 지나가는 등신인데 제가 사랑해드리면 그냥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하시지...
좆도 아니면서 괜히 자존심은 세우셔서 제가 많이 피곤하네요 후..."
아름이가 폰으로 미간을 쳐서 꽤 아팠지만 그때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저 년 항상 장치 조작이며 연락이며 저 폰으로 하는 거 같던데 저거만 뺏으면 저년 재끼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딱 대라 씨발년아.'
그녀가 다시 내 배를 콕 찌르려는 그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오른팔을 움직여 아름이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는다.
"선배가 어떻게 하면... 앗..!"
휙!
쿵 턱.
미처 잡지 못한 휴대폰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나무 벽을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눈을 한 아름이가 휴대폰을 봤다가 내게 명령한다.
"강아지! 지금 뭐하는 거에요!
말하는 중에 끊는 것도 나쁜데 폰 날리기나 하고.
빨리 주워주세요."
이 머릿속이 꽃밭인 년은 상황파악이 잘 안되시나보다.
'항상 갑으로만 살아오셔서 자기객관화가 잘 안되시나? 본인 좆된걸 잘 모르시네.'
"선배!"
짝!
서재에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난 후에 정적이 흐른다.
살면서 누군가의 뺨을 처음 때려봤다.
일부러 뺨을 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때려야 하나, 때려도 될까를 고민하기 전 욱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 잠시 놓았더니 손이 먼저 나가있었다.
당황스럽다.
흰 방을 나서기 전 많은 변수에 대해 고민하고 나왔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없었다.
진짜 좆된건가. 그냥 방 안에 얌전히 묶여있었어야 했나.
수십 수백가지 불행한 결말이 떠올라 정신줄을 놓을 것 같다.
'아 씨발 모르겠다. 좆은 진작에 된거고, 지금 당장 어떻게 된 건 아니잖아?'
아름이도 예상외였는지 뺨을 맞은 볼을 손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지금 경호팀이, 혹은 다른 인물이 나를 제압하러 들어오지 않고있다는 사실이 내 계획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선배 주제에..."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아름이가 입을 여니 이때까지 억눌러왔던 무언가가 터져나온다.
짝!
한번 더 그녀의 뺨을 때린다.
사람이란게 선을 처음 넘는 것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너무나 쉬웠다.
방금 처음 때린 뒤의 걱정과 후회들이 다시 떠오르는 것보다 내가 당한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증오, 원망이 몇배나 더 빠르고 강했다.
"닥쳐 이 좆같은년아!"
짝!
"등신같은 새끼한테 맞는 건 덜아프디?"
짝!
"왜? 뺨만 맞고있지 말고 그 잘난 김실장 좀 불러봐 썅년아!"
분노란 말 그대로 화(火)라고 했던가.
한번 불이 붙으니 그걸 풀어낼 때마다 더 거세게 타오르는 가슴 속의 불씨를 느낀다.
그녀의 뺨을 때릴 때마다 그녀를 때리고 있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내가 당했던 고문과 고통을 떠올리며 아름이에게 풀어낸다.
"하... 씨발년이. 지야말로 진짜 부모 빽 아니면 좆도 아닌 년이..."
뺨 몇 대 가지고는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