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0부 2일차 (3) 너무나 아퍼 내 맘을 모르는 너도 너무 나뻐
* * *
열개의 손가락이 다 붉게 물들 지경이 되자 정훈의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장치가 돌아가도 허공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개겨서죄송합니다. 나대서죄송합니다. 권하신걸거부해서죄송합니다. 배려해주신걸몰라서죄송합니다. 살아있어서죄송합니다. 태어나서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팅.
아름은 정훈의 마지막 손가락에서 장치를 뽑는다.
조금은 움찔할 법도 한데 한 두번도 아니고 손가락 9개가 이미 똑같은 일을 겪은 후이기에 별로 반응이 없다.
아름이는 장치를 다시 상자에 넣어두고 책상을 옆으로 치워 정훈 앞에 가까이 앉는다.
상반신 구속을 풀고 정훈의 목부분 옷을 당겨 머리가 가슴에 오도록 끌어안는다.
"후우~ 선배~ 이제 끝났어요. 고생 많으셨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마지막 장치를 뽑음과 거의 동시에 김실장이 카트를 밀고 들어온다.
카트 위에 놓여져 있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는 아름이.
"으이구, 그 사이에 왜이렇게 꼬질꼬질해졌어요.
동네 이곳저곳 들어갔다 나온 강아지 같아요. 하룻강아지? 개새끼...?
강아지가 좋겠네요, 지금 딱 꼬리내리고 혼날 준비하는 강아지 같기도 하고...♥"
김실장이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아름이가 휴대폰을 조작하자 흰 방 오른쪽 공간이 열린다.
'... ...'
쿠구구구...
아름이는 내 하반신의 구속도 풀어준 뒤 내 손을 잡고 일어선다.
"사실 방금 쓴 장치 기능이 하나 더 있긴 한데, 선배가 영 설명을 들을 상태가 아니네요.
피곤하니깐 침대에 누워서 마저 이야기해요 우리.♥"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에..? 네, 아 아니 응.."
오늘 하나하나가 새로운 고통을 겪은 후 아름이에게 하는 것인지 신, 혹은 이 세상에 하는 것인지 모를 사과를 중얼거리던 나는 아름이의 말을 듣고 기계적으로 대답하려다 다시 반말로 고친다.
중간부터 제정신으로 있어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반쯤 마음을 놓은 상태로 있었는데, 그래도 이제 나한테 할 짓은 다 했다는 것 같다. 다만 눈치없는 눈물샘때문에 아까 아름이가 얼굴을 다 닦아주었는데도 줄줄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얼굴과 목이 축축해졌다.
뇌가 고장난건지 감정이 자꾸 오락가락한다.
겁에 질렸다가, 안일해졌다가, 개겼다가 다시 바닥을 알 수 없는 공포까지.
손가락 끝이 시큰하게 아파오는데 오늘 겪은 일들에 비하면 너무 강하지는 않은 통증이라 정신을 현실에 붙들 수 있도록 해준다.
'아버지, 어머니, 그 곳은 편안하신가요...
저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두분 다 돌아가셔서 참 원망도 많이하고 누가 제 사정을 알고 위로하려고 하면, 무책임하게 떠난 사람들이라서 오히려 밉다고. 얼굴도 잘 기억안나서 안보고 싶다고 그랬는데.
항상 태연하게 그랬는데... 지금은 너무나 뵙고 싶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당신의 아들 정훈이, 포기하지않고 꼭 살아나가겠습니다.
어디하나 고장난 상태더라도 나중에 죽어서 당신들을 뵀을 때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열심히 아둥바둥 해보겠습니다. 끝까지 살아보려 발버둥치겠습니다.
지켜봐주십쇼. 반드시 살아나가겠습니다. 반드시.'
하루종일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날이었는데, 조금 맑아져서 점심 전의 마인드를 다시 불러온다. 아름이에게 개기겠다는 부분은 빼고.
다시.
그녀에게 이해와 공감을 바라지 말자.
그녀가 사랑을 원하면 사랑을 연기하고. 복종을 원하면 기꺼이 엎드리자.
버티고 버텨서 바늘구멍만한 틈이라도 보이면, 죽기살기로 뛰어서 이곳에서 도망치자.
'이젠 화이팅이라고도 못해주겠다 정훈아.
너무너무너무 힘들지만 우리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 그치…?'
'나도 최대한 해볼테니까 미래의 너는 웃고있었으면 한다.
해보자 이정훈.'
내 손에 깍지를 끼고 서있는 아름이는 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반응이 없었음에도 재촉은 하지 않는다.
항상 보여주던 기분 좋아보이는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그녀.
손에 피가 도는 느낌이 들 때 마다 욱신거리지만 도저히 못참을 정도는 아니다.
아름이가 내 손을 이끌고 새로 열린 공간으로 가자고 하니 자연스럽게 따라걷는다.
가로세로 모두 원래의 흰 방 절반정도 되어보이는, 큰 침실 사이즈의 새로운 방.
벽쪽에 큰 침대가 하나 있고 방은 무드 조명만 켜져있어 원래 방처럼 약간 어둡게 느껴진다.
"선배~ 옆에 올라오셔요."
침대 왼쪽에 먼저 누운 아름이는 옆 자리를 치며 나도 올라오라 말한다.
"어, 응.."
스윽.
갇혀있던 방 뒤에 일반 가정집 침실 같은 공간이 있었구나 싶어 조금 멍때렸지만, 금방 아름이가 시킨대로 옆자리에 눕는다.
마음같아서는 아름이를 쳐다보기 부담스러워 등지고 눕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심기가 불편해지실 것이 분명하기에 천장을 보고 평행하게 눕는다.
"선배, 피곤하실테니 옆으로 누워달라곤 안하겠지만, 제쪽을 바라봐는 주세요.
저도 오늘 일이 많았는데, 빨리 여기와서 선배 볼 생각에 금방 마무리하고 왔다구요..."
손은 배 위에 깍지를 낀 채 천장을 보고 누워있던 나는 고개만 옆으로 돌려 아름이를 바라본다.
아름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되게 좋아하네 진짜'
"헤헤… 너무 좋아요 선배.
아, 선배는 잠들어있으셨어서 기억이 안나시겠지만, 어제도 여기서 주무셨답니다?
저랑 사랑도 잔뜩 나눴고요...♥"
행복한 자랑이 반,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반 인것 같은 홍조를 띤 아름이.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를 했다는 것 같지만, 현재와 미래의 내 몸도 내가 마음대로 못 하는데 과거의 내가 뭘 당했는지 되물어서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어 따로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스윽 스윽..
내쪽으로 좀 더 가까이 붙은 아름이가 오른 손으로 내 귓볼을 주물럭거린다.
여자랑, 그것도 이렇게 예쁜 여자랑 가까이 누워본 게 인생에 처음있는 경험이라 아래쪽에 반응이 올 법도 했다.
하지만 박동성으로 느껴지는 손 끝의 통증 탓인지 오늘 이것저것 당하면서 이미 몸이 고장난건지는 몰라도 약간 무섭고 긴장만 될 뿐 설렌다거나 흥분된다거나 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손.. 많이 아프시죠...? 교수님 조금 있다 오실테니까 누워서 조금만 쉬고 계시면 오셔서 치료해주실거에요.
미안해요. 나중엔 사랑이랑 행복도 주고싶은데 지금까지는 괴롭히기만 해서...
선배, 그래도 이거 하나만 알아줘요. 저 진짜 선배 사랑하고 있다는거만요."
헤실헤실 웃고있던 아름이는 내가 통증 때문에 손 끝을 자꾸 힐끔힐끔 보던걸 눈치챘는지 우울한 표정으로 사과를 한다. 아까 내 손톱 밑에 바늘을 박아넣던 싸이코년이랑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낮에는 배트로 나를 때리며 홈런왕이니 뭐니 그 지랄을 하고,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한 나를 앉혀두고선 만화에 나오는 고문도구를 만들어봤는데 진짜 아플까 내 몸으로 테스트를 했던 그녀.
오히려 나에게 고통을 줄 때는 되게 즐거워했었는데 지금 우울해 하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오락가락하는 만큼 아름이도 기분이 왔다갔다하는가 보다.
'미친년'
오늘 속으로는 팔만대장경을 파낼만큼 욕을 한 아름이지만 또 나름 상황에 적절할만한 멘트를 생각해내어 뱉어본다.
"아, 아니야 아름아. 필요하니까 한 거였잖아.
점심도 그렇고 항상 너가 배려해주고 있었다는 걸 못느낀 내가 나쁘지.
우울해하지마. 아까처럼 웃던 너가 예쁜데, 마, 마음이 불편하다."
'존나 잘했다 씨발.'
스스로가 이런 재능이 있었는지 몰랐다. 너무 오버했나 싶기도 하지만 슬쩍 아름이 표정을 보니 만점에 가까운 것 같다.
"진짜요..? 아 아니에요. 저는 나쁜 년이에요...
사실 선배가 아파하는 거, 힘들어하는 거 다 아는데.
선배 괴롭힐때 선배가 느끼는 감정이 밉고 원망스럽고 그래도 그게 결국은 선배 마음속에 저만 가득찬거긴 하니깐, 지금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돼서 또 자꾸 아프게하고..."
"아, 근데 선배한테 스트레스가 필요한건 진짜에요. 진짜 맹세할 수 있어요... 그래도 오늘 전기고문같은 건 좀 홧김에 시킨거라 미안해요.."
헷갈린다. 미친 싸패년인건 확실한데 중간중간에 미안함을 느끼긴 했나보다. 점심 이후에 시킨건 홧김에 했다고 사과하면서도 내가 자기를 미워하는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는 그녀.
참 이해하기 어려운데 자꾸 평범한 소녀처럼 이야기하니 나도 속을 지경이다.
"선배 근데 왜이렇게 귀여워요...? 그냥 지금 계획 다 취소하고 어디 별장에다 묶어다가 둘이서 살고싶다...♥
선배, 오늘만 강아지라고 불러도 돼요? 한번씩 꼬리때문에 기분 못숨기는 강아지 같아서 너무 사랑스러워요...♥"
내 귀를 조물거리던 손으로 또 머리를 쓰다듬는다. 자기 기분이 좋을 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만족감을 느끼나보다.
"응, 아름이가 좋을대로 불러줘... 꼭 뭐라부를지 말고도 아름이가 나한테 시키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최대한 해볼게."
내 말을 들은 아름이는 계속 기분이 좋아보인다. 아까보다 조금씩 더 다가오던 아름이가 내 대답을 듣고는 아예 옆에서 나를 꼭 안고있는데, 조금 놀랐지만 굳이 피하지는 않는다.
중간중간 이벤트가 파격적이어서 그렇지 사실 호감도가 이미 max인 미연시 여주랑 다름없는데 대놓고 틀린 선택지만 잘 피하면 앞으로는 좀 편하게 틈을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헉 진짜요...? 고마워요 선배, 아니 우리 강아지...♥
낮에는 으르렁대더니 밤에는 왜이렇게 말 잘들어요 저 헷갈리게..
그래도 꿈만같네요 진짜.. 우리 강아지랑 저랑 침대에서 둘이 이렇게 꽁냥거릴수 있다니..."
오른손은 계속 나를 안고있고 왼손으로 내 목을 훑는다.
"선배가 목줄차고 저한테 '주인님…'하는 것도 빨리 보고싶긴한데, 오늘 너무 많이하면 나중에 덜 짜릿하니깐, 오늘은 이만큼만 해도 만족해요.
강아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
이미 자기 좋을대로 다 해놓고 강아지라고 해도 된다는 허락에 행복해하던 아름이.
어제 나에 대해서 이미 많이 알아서 내 얘기는 그만 들어도 괜찮다던 그녀가 물어볼게 있다하니 의외다.
"응. 얼마든지."
날 안고있던 손으로 내 볼을 눌러 눈을 맞춘 아름이가 입을 연다.
"휴대폰에 수진이랑 유정이는 누구에요..? 언제 만나서 선배랑 뭐했어요?"
올라간 입꼬리랑 목소리 톤은 그대로지만 아까보다는 확실히 차가운 눈빛의 아름이. 예상치 못한 질문이기에 빠르게 머릿속 정보를 뒤진다.
'?? 갑자기 무슨 질문이지? 수진? 유정? 되게 흔한 이름이라 잘 생각이 안나는데...?'
생각이 안나 눈알을 굴리던 나를 보고 기분이 언짢아졌는지 아름이가 다시 묻는다.
"강아지, 기억이 잘 안나시나요? 아니면 모른척 하는건가..? 수진이라는 년이랑은 카페에서 보자고 여러번 갠톡했었네요?
유정 얘는 문제 물어보면 다 풀어서 답해주고 뭐 어머님한테 전해달라고도 하셨고요, 잘 아시나봐요..?
오늘 우리 강아지 때문에 기분이 많이 좋으니까 아프게도 안하고 뭐라고도 안할게요.
대신 거짓말은 한 글자도 없이. 사실대로만 말씀해주셨을 때의 이야기에요. 제가 선배를 개새끼라고 불러야 될 일이 안생겼으면 좋겠네요...♥"
어제나 오늘 점심만큼 싸늘한 반응은 아니라 다행이다. 힌트까지 친히 주셨으니 최대한 빨리 기억을 떠올려본다.
'대화 내용 보면 유정이는 작년에 과외했던 애 같은데, 수진? 아씨, 뭐지…'
수진이라는 이름이 영 떠오르지 않는다. 카페에서 여러번 봤다는데 카페를 잘 안가던 내가 왜 그랬을까 고민해봐도 뭔가 깔끔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카페, 여자, 수진, 엥간하면 우리학교 학생일텐데 카페, 카페.. 아! 교양 발표 파트너가 수진인가? 맞는 거 같은데? 아씨 팀플때문에 많아봐야 3 4번 봤을 텐데 이름까지 어떻게 외우냐고..'
"아, 아름아..?"
"네, 선배. 말씀하셔요."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거짓말을 짜낸다고 의심하고 있는건지 아까보다 기분이 나빠진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제 강아지니 하는 애칭놀이도 그만두고 딱딱하게 답하는 아름이를 보니 게임오버 직전인 것 같다.
"그.. 유정이 걔가 성이 이씨맞니? 이유정?"
"네, 맞아요. 친하신거 맞나보네요? 제 앞에서도 유정이라 그러는거 보면?"
'헉 씨발 병신같은 짓을…'
"아, 아니야 그 이유정 걔는 너도 알다시피 내가 작년에 장학금을 짤렸는데 외삼촌께서 못내주신다고 하셔서..
그래서 그 교내 근로도 몇개 하고 학교 근처에서 과외도 했었는데 그때 과외받던 학생이야. 그, 너, 너가 어떤걸 생각하는지 내가 100퍼센트는 모르겠지만, 진짜 딱 과외수업하러 오는 대학생이랑 그 과외받는 고등학생, 어 딱 그거였어.
그, 수, 수진이라는 사람은 확실하지는 않은데, 그 교양 수업중에 팀플 발표 시키는 과목이 하나 있어서 그거 파트너였던거 같아.
근데 나는 개씹아싸라 한번도 '편한 사람이랑 조 만들어서 오세요' 할 때 같이 할 사람이 있었던 적이 없거든? 그사람도 아,아마 비슷한 상황이라서 랜덤으로 서로 걸려서 만났을 거야. 응. 거, 거의 확실해..
카페에서 만났어도 조사자료 보면서 발표 준비한 거 때문에 카페에서 몇번 보기는 했는데 진짜 딱 과제준비만 하고 헤어졌을거야.
아름아, 미, 믿어주겠니...?"
눈썹을 살짝 씰룩인 아름이. 바로 뭔갈 할 것 같은 눈치는 아닌데 기분이 다 풀린 건 아닌 것 같다.
"흐음~. 수진 이사람은 마지막에 고생하셨습니다 이후로 연락이 한번도 없었으니 맞는 거 같네요. 패스.
근데 이유정 이년이랑은 과외만 한 거에요? 제가 알기로 선배 과외앱 기준으로 과외한게 3개월 밖에 안되는데... 이년이랑 처음 톡한 날부터 제일 최근 카톡까지는 5개월쯤 되네요...?
이 비는 2달은 뭐에요...? 처음엔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했는데 보다보니 눈이 맞아서 2달은 연애하신건가요?"
한 문장 한 문장 넘어갈때마다 공기가 얼어붙을 것 같이 차갑고 무거워지는 분위기.
"밖에선 거의 항상 혼자 다니시길래 여전히 모쏠아다신줄 알았는데... 저만 혼자 착각이었나봐요?
우리 개새끼. 위로는 거짓말이나 뱉고 아래로는 좆대가리 잘못 놀리면 결국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드려야 하나.. 하.. 하하..."
'?? 2개월? 아 한달은 중개앱에 수수료 안떼이려고 학부모님이랑 합의하고 따로 계좌로 받았는데, 과외 끝나고도 질문 몇번 받아주고 입시 상담한거 때문에 저렇게 화난건가?
갑자기 욕하는거 보면 진짜 빡친거 같은데 개좆됐네 진짜...'
"아, 아름아..! 그 한달은 앱에는 중단했다 해놓고 과외 계속 한거야 그 10퍼센트씩 중개수수료로 떼이는게 아까워서 5프로만큼만 저한테 주실 수 있냐고 말씀드려서.. 내가
그게, 그쪽 부모님 주변에 내가 끝나고도 잘 봐주더라 하는 소문이 돌면 혹시 나중에 또 과외 구할 때 유리할까 싶어서 상담 좀 해주고 문제 물어보면 도와주고 그랬는데 진짜 모쏠아다 맞아.
살면서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준 여자도 처음이고 , 그, 그.. 그, 내가 사랑한 여자도 너가 처음이야. 진짜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너무너무 미안하다. 진짜 한번만 믿어주면 안되겠니..?"
아름이가 또 눈을 살짝 찌푸린다. 그래도 바로 마저 욕하는게 아닌걸 보면 조금은 믿어주는 것 같은데... 앞머리를 뒤쪽으로 넘기며 말을 꺼내진 않는 아름이는 아직 고민중인듯 하다.
한참을 그러다 이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
"믿어드릴게요. 저도 너무 갑자기 화내고 욕하면서 다그친것도 있고. 선배가 말하는게 완전 신빙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고...
평소에는 다들 너무 딱딱하고 계산적이라 그러는데, 선배 생각만 하면 가슴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뜨거워져서 감정적이게 되네요...
연애는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손해본다는데 제가 너~무 사랑해서 항상 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아름이가 고민해봐도 딱히 모난 곳 없는,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였는지 다시 살짝 웃는다. 애초에 전부 진실이기도 하고.
"선배, 돈이 그렇게 좋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돈 싫어하는 새끼가 어디있겠냐마는 괜히 묻는게 아닐텐데...'
"응..? 갑자기 왜..? 내가 없이 살긴 하지만 꼭 그런건 아닌데 왜..?"
"선배가 그 수진이라는 년이랑 유정이라는 년이랑 사랑한건 아니란건 믿어주겠는데, 그래도 결국 이유정 얘랑 다정하게 카톡하고 세심하게 신경써준건 맞잖아요.
선배말대로 감정이 있어서 그랬던게 아니라면, 돈 때문에 이렇게 대한거에요?"
뭔가 싸하긴 한데 일단 되는대로 말한다.
"어… 응, 그사람이랑 아무것도 없었으니깐 응. 다음학기 등록금 때문에 돈벌어야 해서 영업용 멘트?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대한거지...?"
"그럼 저도 돈드릴게요 더 귀엽게 굴어줘요. 선배가 먼저 하는 뽀뽀 한번에 1000만원, 키스는 1억. 어때요?
저는 선배랑 너무 하고싶은데 선배는 저를 별로 안 원하시는 거 같아서... 돈드리면 해주실 수 있어요? 하룻밤 찐하게 사랑해주시면 10억 드릴게요."
'???????'
갑작스러운 아름이의 말에 혼란스럽다.
'어떻게 해야하지? 해준다 그러면 나도 결국 돈밝히는 놈이라고 죽이나? 아니면 안된다고 했을 때 오히려 자기 차별한다고 화내나? 뭘 골라도 아름이가 화내려면 화낼 수 있는거긴 한데… 액수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더 미치겠네. 살 길이 뭐야. 일해봐라 대가리야…'
쪽.
고민하고 있는 내 볼에 아름이가 갑자기 입술을 맞췄다. 또 멍하게 아름이를 바라보니 오른손으로 내 볼을 살짝 꼬집는다.
"이것봐요. 오늘도 입으로는 너무 사랑한다. 예쁘다. 좋다 그래놓고.
선배는 사랑하는 여자가 뽀뽀해줬는데 반응이 그정도밖에 안되시나요? 결국은 선배가 저를 원하게 되겠지만 그걸 기다리는게 너무 힘들어서 돈으로 미리 사랑해주는 척이라도 해달라는건데, 그게 어려워요?"
아 나름 멘트는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너무 딱딱했던 게 티났나보다. 아까 감정을 못숨기는 강아지라고 한 것도 아름이한테는 다 읽히는데 잘 속인줄 알고있는 내 모습을 보고 너무 티나서 한 말이겠지.
"왜? 돈이 너무 적어요? 하룻밤에 1억만 해도 자기가 하겠다는 새끼들 천지일텐데, 하룻밤에 강남에 건물 하나씩 해드릴까요?
아니면 남창같아서 부끄러우신가...? 돈 때문에 그년한테는 살살 꼬리쳐놓고… 저는 싫으세요? 너무하네요 진짜."
가불기에 걸려버린 나.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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