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얀데레 그녀의 공대여신-2화 (2/96)

〈 2화 〉 0부 1일차 (1) ­ 다시만나 반가우니 자기소개부터

* * *

방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의자에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그녀.

귀여운 단발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우유같이 하얀 피부와 날카로운 턱선.

까만 여성용 슈트에 셔츠 가슴부분도 블랙리본으로 코디한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잘 사는집 아가씨라고 느낄만큼 귀티가 났다.

'아름이 맞겠지...? 아름이가 왜 이런 짓을...? 그보다 여긴 뭐지 왜 이렇게 방이 새하얘...'

상상도 못한 인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방의 풍경도 그만큼 특이했다. 내가 묶인 의자를 제외하면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육면체 방.

쨍한 조명들 때문에 방의 경계가 어딘지 헷갈릴 정도다. 그 방 한가운데에 있는 블랙 화이트 코디의 아름이는 화보 촬영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최근에 그런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묶여있는 동안 지금은 안쓰는 대공분실이나 물고문용 욕조를 옆에 둔 감옥 같은 곳을 상상했는데 일단 그런 용도의 방은 아닌 것 같다. 다행이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왜 나를 잡아왔는지. 바라는 게 무엇일지 고민해본다.

한아름. 아마 2년 전 캠프 멘토를 하면서 만났던 학생이었을 것이다.

K 공대는 매년 과학고, 영재고의 1학년 성적우수자들을 대상으로 캠프를 열었다.

창의적 리더 캠프였던가 글로벌 리더 캠프였던가 대충 그런 이름이었다.

1주일동안 학과설명회도 하고 동아리들 공연도 보고 학생들끼리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재학생을 멘토로 붙여준다. 그리고 K­뽕을 받아간 성적 좋은 학생들이 나중에 입시에서 P공대나 인서울대학교보다 우리학교를 더 선호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다.

놀 돈은 부족하고 남는 게 시간이었던 갓 20세의 나는 1주일간 캠프 멘토를 하면 100만원이나 주는 꿀근로인 캠프 멘토를 당연히 지원했고 우리 조에 있던 10명의 학생 중에 한아름이 있었다.

우리 조에서 아름이 혼자 여학생이었는데 말수도 적은편이라 조에서 겉돌까봐 나름 열심히 챙겨주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지근한 반응에 결국 나 같은 아싸에게 여고생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렵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 도대체 씨발 내가 뭘 잘못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냐고.!!!'

"선배...?"

고민을 할수록 이 사태의 원인을 모르겠어서 이 세계를 떠나려 하는 내 멘탈이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아름씨라뇨. 저번에 봤을때처럼 아름아~ 하고 불러줘야죠 안그래요?"

그녀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싸늘하다.

캠프에서 학생들 대하듯이아름아 라고하면 건방져 보일까봐 씨를 붙인건데 오히려 맘에 들지 않았나보다.

"아, 아닙니다. 제, 제가 뭐라고 이름으로 그렇게 부, 부르겠어요."

차가운 아름이의 눈빛에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안나온다.

"하...... 재미없게... 아, 맞아! 좋은 대화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진행되는 건데 저는 선배를 너무 잘 알고 선배는 저에 대해 전혀 모르니 정보의 불균형이 너무 심하다 그죠? 제가 미안해요 헤헤…"

그녀는 답답해하다 자신이 뭔가를 빠뜨렸다는 듯 다시 웃는다.

'…?? 뭐라는거지? 나에 대해서 잘 알아...? 어디 흥신소 같은데에서 뒷조사라도 한건가?'

똑 똑

내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등 뒤의 철문을 똑똑 두드리며 내게 마저 이야기한다.

"그러면 우선 제 얘기를 쭉 해드릴게요~ 제 이야기가 끝나면 그때 다음 진도를 나가보자고요, 선배...♡"

끼익 턱!

두꺼운 철문이 다시 열리며 정장을 입은 선글라스의 근육질 남성 두명이 의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아름이 앞에 크고 새하얀 의자를 내려 놓은 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나간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선배가 잘 알아들으려나? 흐으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그녀는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턱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던 그녀는 고민이 끝난 듯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고 시작할게요. 선배는 제가 누군지 얼마나 아시나요...?"

'뭐지? 아름이가 아까 자기를 알아봤다는 걸 안 눈치였잖아. 왜 다시 물어보는 거지?'

그녀가 던진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아는만큼 답한다.

"어... 이름, 아니 존함은 한아름, 재, 재작년에 캠프에서 처음 뵀습니다! 제가 조기졸업이라 20살, 대학교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될 때 마찬가지로 1학년을 마치셨으니 2살 차이라 아마 올해 성인이 되셨을 거고... 하, 학교는 서울쪽 영재고셨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다시 들어도 뭐라 말하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횡설수설이다.

아까보다 긴장이 더 심해져서 그런지 말은 빨라졌는데 더듬기는 더 더듬고 톤도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는 것이 영 덜떨어진 사람 같다.

그녀는 내 이야기가 끝나고 나를 몇초 더 바라본 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다에요?"

'뭐지 내가 까먹은게 있나... 더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극도의 긴장에 눈만 자꾸 감았다 떴다 하며 기억을 뒤지지만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다. 오히려 조금 더 몰아붙이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숨을 헉 하고 참는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아까부터 벌벌 떨고 제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길래 2년 사이에 제가 누군지 알았을거라 생각했는데... 모르는 상태로도 그렇게 놀란 거였어요? 왜요? 제가 선배를 해칠것 같아서요? 으이구, 겁도 많으셔라..."

아름이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내 볼에 오른손을 얹고 엄지 손가락으로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닦아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옛날부터 쟤 좀 사나보다 하고 저랑 친해지려는 년들이 자기 친구한테서 귓속말로 뭘 들으면 놀라서 사과를 하곤 하던데, 직접 듣지는 않았어도 아마 이런 내용이었을 거에요. '야 쟤 H그룹 부회장 딸이야...' 정도?"

현실감 없는 내 상황에 더 현실감 없는 그녀의 문장. 평소와 너무 다른 정보가 많이 들어와서 그런지 뇌가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 선배는 H그룹도 모르시려나...? "

그녀는 내 굳어버린 표정을 보며 픽 하고 웃는다.

"아, 아닙니다! 압니다!"

모를리가.

한국에서 살면서 H그룹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리가.

H전자 시가 총액만 600조. H그룹 전체 시가 총액이 1000조 가까이 되는 초 거대기업인데...

우리 같은 공돌이들의 이상적인 미래 루트가 벤쳐 사장님으로 성공하기 바로 다음이 H전자 취직일 정도로 모를 수가 없는 곳이었다.

'H그룹 회장이 한씨긴 한데 아름이가 진짜 재벌인가? 지금 부회장인 한ㅇㅇ가 재벌 3세니깐 아름이는 재벌 4세? 근데 그쪽에 딸이 있었나? 아씨...! 평소에 뉴스 좀 볼걸...'

찰칵!

아름이가 폰을 꺼내 내 얼굴이 같이 나오도록 셀카를 찍는다.

"와 방금 선배 이때까지 본 모습 중 제일 멍청해보였어요.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으니깐 한장 찍고 마저 이야기하죠. 후후... "

사진을 확인하고 자켓에 폰을 넣은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뭐 사실 그게 중요한건 아니에요. 선배가 지금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을 뿐더러 제가 재벌이던 조폭 딸내미던 선배가 여기 묶여있고 제가 선배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게 중요한거지. 그쵸?"

"예..."

벌써 기운이 빠져 겨우 대답한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갖고싶은건 다 가지려는 욕심쟁이었어요. 근데 그게 너무 쉽더라고요. 뭐랄까... 게임을 켰는데 이미 다 깨져있고 골드는 만땅.

근데 그게 또 온라인 게임이라서 남들은 다 그 골드 캐는 걸 컨텐츠로 하루종일 시간을 쓰는데 나는 그걸 할 필요가 없으니 재미가 없는거죠."

'뭐라는거지 돈자랑인가... 일단 무사하려면 잘 맞춰줘야겠지...?'

"그것 참 고생이 많으셨겠... 흡!"

힘겹게 대답하던 내 입을 그녀의 손이 막았다가 떼고 다시 검지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갖다댄다.

"쉿..."

손을 다시 내 귀로 옮겨 귀를 조물거리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름이

"이제부터는 '듣는' 시간이에요. 선배. 나중에 하고싶은 말 잔~뜩 시켜드릴테니 지금은 말하지 않기에요...?"

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했다는 듯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마저 이야기한다.

"그 왜 게임 다 깬 고인물들 보면 다시 할 때 이상한 행동들 하잖아요?틀린 선택지만 엄청 고른다거나 장비를 일부러 벗고 던전으로 가본다거나.저도 비슷해요.남들이랑 같은 방법으로는 짜릿한 걸 못 느끼니깐 여러가지를 해보는거죠.근데 그것도 전부 실패했어요."

신나게 설명하던 아름이의 톤이 짜증스럽게 변했다.

"중학교때 같은 반 애가 복도에서 실수로 제 발을 밟았었어요.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너무 따분해서 걔라도 갖고 놀려고 종례시간에 '너 내 발 밟았지? 내일부터 두고봐'한마디 하고 집에 갔죠.그날 밤 내내 잠도 제대로 안자고 어떻게 괴롭힐지 걔가 억울해하면 어떻게 밟아줄지를 기대하면서 다음날 학교에 갔는데 제가 등교하니 벌써 다 끝나있었어요."

"칠판에는 걔한테 걸레년이니 쓰레기니 하는게 써있고 책상은 이미 학교 뒤 쓰레기장에,걔 사물함은 다 찌그러져서 닫기지도 않는데 그걸 했다는 애들은 간식 기다리는 개새끼마냥 저를'나 잘했지?'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그 상실감이란 하아..."

아름이의 예쁜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가 이내 크게 숨을 내쉬더니 진정이 된 듯 또 이어나간다.

"걔가 엉엉 울면서 조퇴하고 다음날 걔네 부모랑 걔랑 저랑 교무실에 불려갔는데 거기서 어떻게 됐게요?형식적으로 혼나기라도 하려나 했는데 제가 보는 앞에서 걔 엄마가 걔 뺨을 치더라고요.너가 친구를 먼저 괴롭혀놓고 무슨 학교 폭력이니 따돌림이니 하며 피해자 행세를 하냐고.

걔 엄마는 저한테 무릎꿇고 사과하고 있고 교감은 거기에 대고'아름학생이 문제 삼으려면 당장 강제전학도 될만한 건인데 부모님만 사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하니깐 걔도 무릎꿇고 울먹이면서 '아름아 미안해...' 하는데 재미 좀 보려다 그렇게 좆같았던 적은 처음이었어요."

티없이 맑고 순수한 아가씨 같은 비주얼의 아름이 입에서 찐하게 짜증나는 톤으로 좆같다는 표현이 나오니 그 괴리감이 상당하다.

'진짜 저런게 가능해?본인은 가만히 있었는데?재벌은 재벌인가...하긴 비싼 차같은거 긁으면 쌍방과실이라도 아쉬운 쪽이 숙이고 들어가는데 진짜배기를 건드렸으니 충분히 저리 될만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이제부터는 더하다는 듯 머리를 뒤로 넘기며 다음 부분을 말해주었다.

"그거 이후로는 또 뭐해봤게요?선배가 상상할만한건 거의 다 해봤을텐데 하나도 제 따분함을 못풀어줬어요.중간고사에서 옆에 애 틀린 답을 토씨 하나 안틀리고 적어서 내니깐 걔가 불려가던데요?꼴에 사귄다고 티내는 년놈들한테 가서 쟤랑 깨질래 나랑 척질래 물으면 백이면 백 울면서'사실 너같은 애 정말 싫었어'하고 이별을 말하고.

청순 여대생이라던 스트리머한테도 계좌로 돈좀 쏴주고 내일부터 벗어라고 하니깐 다음날부터19금 플랫폼에서 위아래 다까고 춤추더라고요.너무 웃기지 않아요?"

또 그거다.말과 입은 웃고 있지만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은 눈빛.

'자기가 치트급으로 부자라서 다들 설설 긴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왜 내가 여기 있냐고요 쓰벌...나 캠프에서 아름이 때린 적 있나...?그럴리가 없는데...

멘토 교육할 때 우리는 학교의 얼굴이라고 학생 생활처에서 귀에 때려박듯이 교육해서 절대 건드렸을 리가 없다...진짜 뭐지...?'

"아,좀 재밌는게 하나 있긴 했다.디즈패친가?그 연예인들,정치인 기업인들 파파라치 하고 찌라시 돌리는 데 있잖아요?거기서 제가 하도 언론에 노출된 사진이 없으니깐 제 정체를 알아보겠다고 며칠씩 기다리다가 학교 마치고 나오는 제 사진을 멀리서 찍었던 일이 있었어요.

우리 법무팀에서 곱게 내려달라고 이야기하니깐 언론의 자유 운운하면서 버티길래 이거 좀 길게 가겠다 싶었는데 둘째 오라버니가 저 관련된 일이면 워낙 극성이셔서...

한 일주일 있다가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라고 식사자리에서 말씀하셨는데 사이트는 폐쇄.대표랑 기업 중진들 워크숍에서 실종 기사 나오는 거 보고'아 토막나서 태평양 밑바닥에 있거나 어디 힘줄 잘린 채로 새우잡이 배에서 구르고 있겠구나'했어요.오라버니도 너무하시지.여동생 몫도 남겨주셔야 저도 연습이란걸 좀 해볼텐데 말이에요. "

1부 끝이라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주인을 잘 기다린 강아지를 칭찬하듯 내 턱을 가볍게 만져준다.

하지만 길어지는 그녀의 이야기에 반쯤 멍때리던 나는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디즈패치가 진짜 그런거 때문에 없어진 거였어?하도 찌라시 선두주자 같던 곳이라 거물정치인 잘못 건드렸다가 소리소문없이 누가 담근거라고 농담처럼 그랬었는데 얘 사진 하나 찍었다가 그 사단이 난거라고...?'

간담이 서늘해진다.그녀는 정말로 지루하던 차에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기는 했다는 투로 말했지만 내겐 그 내용이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오히려 내게 다가올 미래처럼 느껴져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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