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을 나온 기르가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약재상에 주문을 넣어두었던 약초가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오후 내내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늦은 시간에 식사를 올려달라 청하기 미안해 직접 식당으로 내려갔다가 기뻐하는 주방 사람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기르는 허리춤에 달린 고리에서 열쇠를 빼내 자물쇠 구멍에 끼워 넣었다. 달칵 소리를 내며 열쇠가 돌아가자 문이 열렸다. 들고 온 등불을 탁자 위로 내려놓자 주변이 밝아졌다.
6년간 머무른 곳이다. 어디에 어떤 물건이 놓여있는지 눈 감아도 훤히 떠올릴 수 있었다.
‘다녀갔군.’
어렵지 않게 프리아의 흔적을 발견한 기르의 얼굴에 난감한 미소가 떠올랐다. 연구실에는 위험한 약품이 많아 기르는 길게 외출할 때면 항상 문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두곤 했다.
약을 보관하는 서랍장의 문이 살짝 튀어나와 있다. 창문도 제대로 닫지 않아 반쯤 열린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창밖을 확인하던 기르의 시선이 아름드리 자라난 느티나무에 멈췄다.
누가 하는 걸 보고 배웠는지 틈만 나면 나무타기를 시도하던 소년이 어느새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어난 것이다. 이제 자물쇠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이의 성장에 내심 흐뭇해하며 기르는 서랍장의 문을 열었다.
소독약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고 서랍 바닥에는 황갈색 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단지 중 방향이 틀어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르는 단지의 뚜껑을 열어 안을 살펴보았다. 잎을 말리고 빻아 가루로 만든 마편초가 가득 들어 있었다.
프리아 본인이 다쳤다면 자신에게 감출 이유가 없었다. 사용인 중 누군가 부상을 당했다면 귀가하자마자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정식으로 의학을 공부하진 않았으나 오랜 세월 배우고 익힌 것이 많아 기르는 어지간한 의원에 준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디서 또 다친 동물을 주워왔군.’
어울려 놀 또래 친구가 없는 탓일까. 프리아는 유독 작고 약한 동물에 마음을 뺏기곤 했다. 가끔 프리아를 데리고 기사 놀이를 하던 대공가의 넷째도 머리가 굵어지게 된 후로는 아이와 놀아주지 않게 되었다.
근방의 마을에는 또래가 있었으나 신분 차가 명확해 어울릴 수 없었다. 귀하신 도련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화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부모에게 단단히 주의받은 아이들이었다.
기르는 등불을 집어 들고 다시 복도로 나갔다. 프리아가 주워온 것이 무엇인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프리아 님, 주무십니까?”
노크 소리에 반응이 없다.
“저 기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기르는 등불을 복도에 놓아둔 채 방문을 열었다. 촛불이 꺼진 방은 어두웠으나 멀리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고 있어 사물은 식별할 수 있었다. 벽에 붙은 침대로 걸어간 기르가 그 위를 살폈다.
“프리아 님, 주무십니까?”
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노크 소리를 듣고 급하게 불을 끈 것처럼, 촛대에 꽂힌 초에서는 흰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르르. 어디선가 경계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감긴 속눈썹이 흔들리며 불안을 드러냈다.
어디에 숨겼을까. 이불 안?
이불은 딱 프리아의 몸집만큼만 솟아올라 있었다. 그 안에는 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프리아 님?”
기르가 아이에게로 고개를 숙이자 으르렁대는 짐승의 소리가 더욱 커졌다.
‘침대 밑이군.’
이 상황에서 굳이 아래를 확인해 짐승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민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경계하는 거라면 일단 프리아를 해칠 생각은 없다는 뜻일 테니.
다 자란 개체라면 경계심이 강해 아이를 따라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개월 된 아기 여우 혹은 살쾡이를 데려왔으리라 짐작한 기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병균을 옮길 수 있는 짐승을 침대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할까.
“내일은 오랜만에 벼룩을 잡아야겠군요.”
혼잣말처럼 흘린 기르의 말을 들은 아이의 어깨가 움찔 움직였다. 야산에서 뒹굴다 이를 옮아 고생했던 예전의 일이 떠오른 것일까. 그때는 약용제의 냄새가 싫다고 그리 난리를 쳤으면서도 아이는 기르의 말을 듣지 못한 척 감은 눈을 뜨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하룻밤만 봐주기로 할까. 기르는 발밑에서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를 무시한 채 아이의 방을 빠져나왔다.
“들키는 줄 알았어!”
긴장돼 숨까지 멈추고 있던 프리아가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이미 들켜버렸다는 걸 짐작도 하지 못하고 신이 난 모습이다.
“강아지야, 이제 괜찮아. 다시 올라와도 돼.”
침대 밑으로 고개를 내민 프리아가 오웬에게 말을 건넸다.
감히 이 몸에게 벼룩이라고? 오웬은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기르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뒷다리가 닿지 않는 등허리 쪽이 간지럽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벼룩이 있을 것 같으면 당장 프리아와 분리해야지 그대로 나가버리는 건 또 뭔가. 기르가 자신을 눈감아주었다는 사실조차 불쾌하게 느낀 오웬이 얼굴을 찡그렸다.
“다시 올라와도 돼. 괜찮아.”
짐승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프리아가 바닥으로 내려와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전히 침대 아래 버티고 있는 오웬을 끌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강아지야?”
들개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프리아가 침대 밑으로 몸을 반이나 들이밀었다.
“아직도 무서워? 괜찮아. 기르는 나쁜 사람 아니야.”
들개의 머리로 손을 얹은 프리아가 그 위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그래도 오웬이 꿈쩍하지 않자 표정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나랑 같이 자는 거 싫어?”
싫을 리가. 매일 밤 네 곁에 있고 싶은 마음뿐인데. 그리하기 위해 저승까지 따라왔는데 싫을 리가 있겠는가.
끄으응. 소리를 내며 오웬은 고민에 빠졌다. 벼룩이 있는 게 맞을까? 오늘 벌써 몇 번이나 프리아에게 끌어안기고 아까는 함께 이불속에 들어가 있기까지 했는데 이미 옮기고도 남았겠지?
오웬은 못이기는 척 프리아를 따라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 몸집 있는 짐승이라지만 본래의 몸보단 작아 한결 눕기가 편했다. 차가운 바닥보다는 역시 푹신한 침대 위가 좋았다.
‘이봐, 너 혹시 간지럽지 않아? 어디 물린 데 없어?’
확인을 위해 오웬이 주둥이를 몸에 갖다 대자 강아지가 애교를 부린다 여긴 프리아의 기분이 풀렸다. 활짝 웃는 아이의 뺨 위로 들개의 축축한 혀가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막 핥으면 어떡해. 간지럽단 말이야.”
서너 살 무렵처럼 까르르 웃지는 않았어도 여전히 듣기 좋았다.
‘웃으니까 보기 좋아. 늘 그렇게 웃어.’
한참을 배를 잡고 굴러다니던 프리아가 베개의 위치를 고쳐 오웬이 머리를 내려놓을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오웬이 그 위로 머리를 내려놓자 자연스럽게 프리아의 손이 따라왔다.
“너는 참 똑똑한 거 같아. 말도 잘 듣고.”
나랑 같이 여기서 쭉 살았으면 좋겠어.
오웬을 품에 안고 조곤조곤 속삭이던 프리아의 말이 끊겼다.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오웬 역시 눈을 감았다.
“더럽지 않아. 내가 깨끗하게 목욕시켜주면 되잖아!”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들개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 오웬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몸을 낮춘 들개의 옆에 울먹이는 프리아의 모습이 있었다.
“그렇게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야생에서 나고 자란 들짐승이라 어떤 병균을 갖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엄격한 표정을 한 사내, 기르가 아이의 항변을 잘라냈다. 개가 되어 평소보다 시선이 낮아진 탓일까.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르의 시선이 오웬의 심기를 거슬렀다.
으르르. 이를 드러내는 들개를 껴안은 프리아가 울며 소리쳤다.
“나도, 나도 병이 있어. 얘도 똑같잖아. 왜 쫓아내야 하는 건데?”
“병과 병균은 다릅니다. 병균은 원인, 병은 그 결과지요. 프리아 님의 병은 선천적으로 발생했지만 병균이 옮는다면 더욱 건강이 나빠질 수 있습니다.”
“기르가 치료해주면 되잖아. 그렇게 해줄 거잖아. 응?”
전에 없이 고집을 부리며 떼쓰는 아이의 행동에 난감해진 기르가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새끼를 데려와 길들이면 모를까. 다 자란 들개를 성에 풀어놓다가 사고라도 일으키면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착한 강아지란 말이야.”
눈물을 훌쩍이며 프리아가 항변을 이어갔다. 착하고 내 말도 잘 듣고 다른 사람 해치지도 않아.
“어딜 봐서 강아지입니까? 어미에게서 독립한 지 오래된 녀석입니다. 성견에 가까워요. 이빨을 보니 한 살쯤 되었겠군요.”
기르가 들개의 입을 벌려 안을 살폈다. 감히 함부로 내 입을 벌려? 마소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은 오웬이 으르렁거리며 기르를 노려보았다.
“한 살이면 아기잖아!”
프리아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 안긴 들개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렇지? 아기야?
프리아는 오웬에게 동의를 구해왔으나 충격에 빠진 오웬은 응답하지 못했다. 강아지도 모자라 아기라고?
“사람과 동물은 성장 속도가 다릅니다. 저 개는 프리아 님보다 훨씬 어른이에요. 이미 성체가 된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건 숙련된 조련사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성공해 프리아 님은 따르게 되었더라도 다른 사람을 물 수 있습니다.”
“얘는 안 물어. 그렇지? 물지 않을 거지?”
아니 나는 지금 물고 싶은데. 심통이 난 오웬이 기르를 향해 다시 한번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