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다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라온다. 회갈색 털로 뒤덮인 뒷다리를 붙잡고 있는 건 올무 형태의 덫이었다. 벗어나려 안간힘을 쓸수록 고리가 더욱 조여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하필이면. 덫에 걸린 짐승의 몸을 빌리다니. 이대로 덫을 놓은 사냥꾼에게 발각된다면 프리아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빼앗겨 그대로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손을 쓸 수 있다면 이까짓 밧줄 따위는 금세 풀어버릴 수 있으련만 뭉툭한 앞발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웬은 주둥이를 아래로 내려 밧줄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는 충분히 날카로웠으나 밧줄을 끊기엔 역부족이었다. 보푸라기만 잔뜩 일어난 올무가 오웬의 다리를 더욱 조여왔다. 자신도 모르게 서러운 울음이 주둥이 밖으로 울려 퍼졌다. 본능적인 행동이라 제어할 수 없었다.
“강아지야?”
탈진한 오웬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웬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사내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쳤어? 덫에 걸렸구나.”
며칠 새 또 훌쩍 자라버리고 말았다. 열 살쯤 되었을까? 제법 길어진 팔다리가 낯설면서도 대견하게 느껴진다. 소년은 소녀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웠으나 오웬은 그가 프리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많이 아프지? 잠깐만 기다려.”
몸을 숙인 소년이 주머니에서 접는 칼을 꺼내 들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파고든 밧줄을 잘려내려는 것 같다.
“걱정하지 마. 해치는 거 아니야. 풀어주려고 그래.”
프리아. 정말 많이 자랐구나. 반가워하는 오웬의 속마음과는 달리 주둥이 밖으로 위협하듯 으르렁거리는 울음이 새어 나왔다.
“거의 다 되었어. 조금만 참아줘. 착하지?”
프리아는 경계심을 보이는 들개를 달래며 조심스럽게 올무를 제거해나갔다. 얼마나 아팠을까. 털도 거칠고 수척해 보인다. 며칠간 제대로 된 사냥도 하지 못한 것 같아 프리아는 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잠깐만. 도망가지 말아줘. 나 나쁜 사람 아니야.”
프리아는 주머니에서 종이로 감싼 빵을 꺼냈다. 고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빵과 치즈뿐이었다. 경계하던 들개는 프리아가 거리를 벌려주자 잠시 냄새를 맡은 후 입을 벌려 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강아지야, 왜 여기 혼자 있었니? 친구들은 없어?”
강아지라 부르기에는 몸집이 좀 큰가? 프리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친근한 호칭을 고수하기로 했다. 저렇게 보여도 아직 새끼일 수도 있잖아?
요리사가 바뀌었나. 빵 맛이 달라졌군. 음식 맛을 음미하던 오웬이 예상 밖의 호칭에 고개를 들었다. 강아지라고?
“강아지야. 너희 집은 어디니?”
프리아는 입으로 쭈쭈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이게 아닌가? 마을 사람들이 키우던 강아지는 이렇게 하면 달려오던데.
오웬은 혀로 주둥이를 핥으며 바닥을 딛고 있는 튼실한 네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올무에 걸렸던 다리에서는 여전히 통증이 느껴졌지만 뼈가 상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몸을 의탁한 짐승은 회갈색 털에 건장한 몸체를 지니고 있었다. 늑대인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심지어 성견도 아니라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어딘가 물이 있다면 모습을 비춰볼 수 있으련만.
“아직 일어나면 안 돼. 피가 나잖아.”
다친 다리로 일어선 들개를 제지하며 프리아가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자칫 물리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심하게 다친 강아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 정도 상처쯤은 아무렇지 않다. 일어설 수 있었으니 짐승도 어렵지 않게 회복할 것이다. 오웬은 괜찮다는 듯 프리아에게 주둥이를 주억거려 보였다.
“그치? 많이 아프지?”
갑자기 닥친 일이라 붕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프리아는 잠시 생각한 후 나이프를 집어 셔츠 밑단을 잘라냈다. 붕대 대신이다. 소독약이 있으면 좋을 텐데. 풀밭을 두리번거리던 프리아가 보랏빛 꽃을 피운 식물 하나를 찾아냈다. 마편초다. 보통은 가루로 말려 지혈제로 사용하지만 사정이 급하니 어쩔 수 없다.
프리아는 줄기를 뜯어 돌로 찧은 후, 흐물흐물해진 마편초를 짐승의 다리로 가져갔다.
“이걸 붙이고 있으면 금방 피가 멎을 거야. 걱정하지 마.”
으르르. 경계하는 짐승의 울음이 다시 들려왔다. 프리아는 알아듣지 못할 짐승에게 끊임없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마편초를 올린 환부를 찢어낸 천으로 감싸주었다.
‘이봐, 배꼽이 보인다고. 알고 있어?’
삐뚜름하니 엉성하게 잘린 셔츠 밑으로 소년의 흰 피부가 드러났다. 막일하는 농노라면 모를까, 어찌 귀족이 만천하에 배꼽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해. 너는 이미 임자가 있단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배를 활짝 드러내고 있으면 배탈이 날지도 모른다니까?
함부로 살갗을 드러낸 프리아에게 오웬은 훈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프리아의 귓가엔 그저 으르렁거리는 들개의 울음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래. 많이 아팠지? 앞으로는 주위를 잘 살피면서 다녀야 해.”
여전히 경계심을 드러내는 들개를 달래며 프리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마을에서 봤던 강아지가 요란하게 짖자 주인이 달래기 위해 취했던 행동을 떠올린 것이다.
‘듣고 있어? 지금 어디서 딴청을 부리고…….’
오웬의 머리 위까지 다가온 프리아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프리아는 서툰 동작으로 열심히 들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들개가 털을 곤두세웠다. 짐승의 본능이 튀어나와 프리아를 물게 될까 봐 오웬은 긴장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래, 착하지? 착한 강아지야,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프게 해서 미안해.”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프리아의 손길을 받으며 오웬이 눈을 깜빡거렸다. 곤두섰던 털이 가라앉았다. 어느새 꼬리도 기분 좋게 흔들리며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에 데려가고 싶다. 유순해진 들개를 쓰다듬으며 정이 든 프리아가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다친 녀석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려줄래? 내가 돌아가서 치료 약이랑 너 먹을 고기를 좀 가져다줄게.”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들개를 향해 프리아가 입을 열었다. 들개의 꼬리가 프리아를 향해 천천히 흔들렸다. 알아듣지 못하겠지? 동물에게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한숨을 내쉰 프리아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기르의 연구실로 가서 약을 몰래 가져온 후, 주방에 들러 고기를 좀 달라 요청할 생각이다. 돌아왔을 때 들개가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몇 걸음 걷던 프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분 탓인가. 그다지 거리가 멀어진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있어야 해. 금방 올게.”
프리아는 꼬리를 흔드는 들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걷던 프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냥꾼이 덫을 살피러 올 텐데. 마주치면 어떻게 하지? 숨어있으라고 일러둘 걸 그랬다.
“강아지야, 너 나 따라왔어?”
돌아선 프리아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한참 걸어 내려왔는데 어찌 녀석과의 거리가 그대로일 수 있지?
프리아의 눈에 어린 의문을 읽은 오웬이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아쉬워서, 너무 아쉬워서. 뒷모습이나마 프리아를 좀 더 눈에 담고 싶은 마음에 따라와 버리고 말았다.
“어쩌지.”
난감해하는 프리아의 목소리를 들은 들개의 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매어준 천 위로 붉게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 데려가면 분명히 기르에게 야단맞을 것이다. 전에도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를 데려와 숨겨놓고 키우다 들켜 엄하게 주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제 돌봐줄 이가 없는 어린 생명을 함부로 데려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셨겠지요?’
아기 새는 너무 어려 어미 없이 살지 못했다. 그때 만든 작은 무덤을 생각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강아지야, 너 몇 살이야? 엄마는 어디에 계셔?”
뜬금없는 프리아의 물음을 들은 오웬이 소년은 알아듣지 못할 하울링으로 대답했다.
‘나이는 스물, 모친은 필요하지 않아.’
들개의 외양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프리아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만 보살펴주면 되겠지. 지난번에 들킨 까닭은 새 먹일 벌레를 잡느라 종일 마당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강아지는 고기와 빵을 먹을 수 있으니 식사를 나눠주면 될 것이다.
“에잇, 모르겠다. 안 들키면 되지 뭐.”
뒤로 물러서던 오웬 앞으로 프리아가 다가왔다. 소년은 오웬을 향해 대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격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같이 가자.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줄게.”
정말 따라가도 돼? 들개의 눈빛이 그렇게 묻는 것 같다. 되고말고. 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개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프리아 님께서 식사를 남기지 않으셨다고요?”
식기를 반납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왔던 기르가 여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아주 깔끔하게, 남김없이 드셨답니다. 평소보다 고기를 많이 드렸는데도 말이죠.”
요리를 도맡고 있는 여인이 기쁨을 내보였다. 귀하신 도련님의 입이 지나치게 짧아 식사량이 적은 것이 그녀의 근심거리였다. 프리아와 사용인들의 접근을 막던 유모가 세상을 떠난 후, 탑의 고용인들은 힘을 모아 혼자가 된 막내 공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감기도 다 나아서 이제 입맛이 좀 도시나 봐요. 제가 조리법을 바꿨거든요. 고기 누린내가 한결 줄어들었죠?”
마냥 기뻐하는 여인에게 기르는 칭찬으로 식사 답례를 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멧돼지 양념구이와 콜리플라워, 매쉬 포테이드였다. 프리아가 좋아하지 않는 멧돼지 고기에 향신료까지 듬뿍 들어 있었는데 남김없이 먹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