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33)화 (234/237)

이러다 아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질투하고 말겠군.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오웬의 머리 위로 작은 손이 와 닿았다. 괴물이 늘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프리아가 오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괴물아, 졸려? 졸리면 프리아랑 같이 코오해.”

여린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가 너무 소중하고 따뜻해서 오웬은 이 순간을 박제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대로 매일 밤 함께 잠이 들고, 뜨는 해를 바라보며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팔을 감싼 소매가 한층 짧아졌다. 아이는 비 맞은 풀잎처럼,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도 성큼 자라 있었다. 오늘을 제외하면 고작 여섯 번의 밤이 남았다. 한 해에 한 번씩 엿보러 온다 해도 10년의 세월은 놓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자라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싶어.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 남은 밤이 부족하니 어쩔 수가 없군.”

괴물은 가끔 프리아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내놓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프리아는 괴물의 이마를 열심히 쓰다듬었다.

“지금처럼 그자가 부럽게 느껴진 적이 없어.”

부와 영예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제국의 황족이 변방의 공국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던 이유를 오웬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두고 어찌 발길을 옮길 수 있을까.

“그자의 기억 속에는 모두 기록되어 있겠지?”

다섯 살의 너와 여섯 살이 된 너. 열두 살을 넘기고 열다섯을 지나 성년이 될 때까지의 모든 순간을 그자가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부러워 배가 아플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래서 아이를 낳는 걸까?”

오웬은 손을 들어 복숭앗빛 통통한 뺨을 쓰다듬었다. 아이의 푸른 눈 속에 담긴 신뢰가 그를 기쁘게, 또 슬프게 만들었다.

“이렇게 예쁜 눈을 하고 그자를 졸졸 따라다니겠지?”

“누구? 누구를 따라다녀?”

천진난만한 반문을 들은 오웬이 장난스럽게 프리아의 볼을 잡아당겼다.

“너는 잊어버릴 테지만 난 기억하고 있을 거야.”

“응? 프리아 안 까먹을 거야.”

살짝 토라진 입술이 아기 새의 부리처럼 움직인다. 이제 이렇게 만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속상한 마음에 오웬의 입술도 앞으로 나왔다.

“뽀뽀?”

유모에게 하듯 자연스럽게 오웬의 얼굴로 향한 입술이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네 살 아이에게 입술을 빼앗긴 오웬이 당황스러워 말을 더듬었다.

“지, 지금 무슨…….”

“뽀뽀 아니야?”

불만스러워 입술을 내민 오웬의 행동을 아이는 뽀뽀를 요구하는 것이라 오해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니,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 아무리 어린애라도 그렇지. 이렇게 함부로 낯선 사람에게. 아니 내가 낯선 사람은 아니지. 그래도 이건…….

온갖 상념들이 뒤엉켜 말을 잇지 못하던 오웬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은, 입술은 좀 아니라고 봐.”

“왜?”

괴물은 뽀뽀를 싫어하는 걸까? 복잡한 오웬의 심경을 알 리 없는 프리아가 스스럼없이 의문을 표했다.

“친애의 인사로 하는 키스는 뺨에, 그것도 시늉만 하는 거야. 입술은 정말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남겨두어야 해.”

이 나이쯤이면 귀족 교육을 시작할 때가 되었건만. 이렇게 아무것도 몰라서야. 오웬은 대공가를 다시 한번 원망하며 예절 교육을 시작했다.

“……귀부인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대는 거야. 이렇게.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날 때는 그가 끼고 있는 반지에 입 맞추기도 하지.”

“간지러워!”

프리아는 괴물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진 손등을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안타깝지만 오웬이 해줄 수 있는 교육은 오늘 밤이 끝이었다. 오웬은 눈높이를 낮춰 가장 중요한 사항을 일러주기로 했다.

“아무튼 이제부터 입술은 안 돼. 너는 이미 임자가 있어.”

괴물의 말을 통 이해할 수 없었으나 프리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았어.”

특히, 기르는 안 된다. 그 에반이라는 이복형도 안 된다. 아니, 나 이외엔 절대 안 돼. 차마 이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어 오웬은 애타는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하나 더. 내가 전에 알려줬었지? 참으면 안 된다고. 누가 널 함부로 대하면 항의해야 한다고.”

“응.”

“그런데 왜 에반이라는 놈, 아니 형이 밀었을 때 가만히 있었어?”

“함부로 대하지 않았어. 프리아랑 놀아줬어.”

재미있었다. 종자와 기사 놀이. 기사가 장난감 화살을 쏘면 주워오고 예쁜 망아지에게 풀을 먹여주는 놀이였다.

“널 차마 두고 떠날 수 없게 만드는구나.”

놀이의 실체를 들은 오웬이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짚었다. 자기 몸 하나 지킬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울 줄은 몰랐다.

“주먹심이 약하고 악력도 미미하니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프리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오웬이 진지하게 말했다.

“물어.”

“물어?”

“깨물어.”

오웬이 팔을 들어 이빨로 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의 시범을 따라 하며 프리아가 작은 이가 가득한 입을 벌렸다. 조금 전까지 귀족 정신을 강조했던 현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 도망가야 해. 알았지?”

“응.”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오웬은 프리아를 품에 안고 동그란 이마에 입 맞추었다.

“……해.”

“응?”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듣지 못했다. 오웬이 반문하자 프리아의 입술이 달싹이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놓았다.

“소중해.”

입술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남겨두라는 오웬의 말에 대한 답이었다. 귀여운 망아지를 만질 수 있게 해준 에반도, 파란 구름을 만들어 준 기르도 좋았지만 프리아에게는 유모와 괴물이 가장 소중했다.

“나도.”

많은 것이 생략된 프리아의 말을 알아들은 오웬이 아이와 이마를 맞댔다.

“소중해. 프리아.”

너는 나의 아이, 나의 연인, 내 모든 것.

부디 나를 잊고 행복하게 자라나길 원한다.

오웬은 아이의 작은 입술 위로 담백한 맹세를 남겼다. 다시 만나자, 내 작은 연인.

프리아, 사랑하는 널 만나기 위해 지금은 헤어져야 할 시간이야.

“으이구. 그렇게 걱정되면 만나러 가던가.”

요 며칠 통 생기를 잃은 오웬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안톤이 입을 열었다.

“아까워.”

오웬은 힘없이 대답하며 그에게 덤벼드는 거대 도마뱀의 목을 베었다. 모래 위로 떨어진 도마뱀의 목에서 찐득한 녹색 피가 흘러나왔다.

“며칠 건너뛰었으니 지금쯤 꽤 자랐을 거야. 보고 싶지 않아?”

웬만한 장정의 몸통만 한 도마뱀의 꼬리를 들어 올리며 오웬이 한숨을 쉬었다.

“보고 싶지.”

며칠 전 오웬은 프리아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불에 넣었다. 알아볼 우려가 있으니 본 모습으로는 만날 수 없어 새의 몸을 빌렸다. 일곱 살이 된 프리아가 탑 주변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돌아왔다.

‘종다새!’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참견하던 아이는 오웬을 발견하고 쪼르르 나무 앞으로 달려왔다. 앞니가 빠져 발음이 다 새고 있었으나 활짝 웃는 얼굴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종다새야, 아녕?’

높은 가지 위를 올려다보던 프리아가 오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제자리에서 뛰어 나무에 오르려 들었다. 2년이 흘렀으나 아직 또래에 비하면 작은 몸이라 나무타기는 쉽지 않았다. 시도하는 족족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프리아의 모습을 오웬은 위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종달새는 아니지 않아?”

어엿한 어린이가 된 프리아의 모습을 회상하던 오웬이 안톤을 향해 불평을 터트렸다.

“그 표정은 뭐야? 뭐가 불만인데?”

시험 삼아 도마뱀의 살점을 입에 넣었다가 도로 뱉은 안톤이 고개를 높이 들었다.

“너무 작아서 할 수 있는 게 없더군.”

“그렇다고 독수리로 변할 수는 없잖아? 애가 무서워서 울었을 거라고.”

“꼭 새여야 하는 건 아니지. 다른 동물도 있었을 텐데.”

“자칫하면 사냥감이야. 식탁에 오르면 뭐 더 가까이 볼 수는 있었겠지. 뱃속 구경도 하고 아주 좋았겠네.”

빈정거림을 들은 오웬이 건방진 고양이의 목을 잡아 흔들었다.

“오늘 밤엔 대상을 숙고해서 선택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욧.”

두고 보라고. 아주 딱 맞는 개체로 골라주지. 오웬의 손에서 풀려난 안톤이 뒷걸음치며 이를 드러냈다. 저거 그냥 확 깨물어버려?

무슨 영문일까.

꿈의 세계에서 눈을 뜬 오웬에게 엄청난 통증이 닥쳐왔다. 지금 그가 누워있는 곳은 숲이었다. 시선보다 높게 자란 덤불이 오웬이 쓰러진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그가 소환되는 곳 근처에는 늘 프리아의 모습이 있었다. 분명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니 어서 찾아야 했다. 오웬은 통증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보았다. 양팔, 아니 앞다리는 자유로웠으나 뒷다리 하나가 무언가에 잡혀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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