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32)화 (233/237)

앞으로 자신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르를 의지하게 될 프리아를 생각하니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내가 먼저 만났는데.”

“뭐라고?”

오웬의 중얼거림을 알아듣지 못한 안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먼저 만났다고. 내가 젖은 옷도 갈아입혀 주고 몸도 닦아주고, 괴물도 없애주고 신나게 놀아주기도 했는데…….”

“했는데?”

“다 잊어버릴 거 아냐? 옷장 괴물 따위는 잊고서 그 돌팔이 놈의 품에 안겨 과자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잠도 자겠지.”

네 살짜리 아이의 앞에 나타난 새 남자 아니, 새로운 보호자를 질투하는 오웬의 넋두리에 더욱 감정이 실렸다.

‘기르가 있잖아, 파란 구름을 만들어줬다? 손으로 이렇게 막 했더니 구름이 퐁! 하고 생겨났어. 신기하지?’

신이 나 재잘대는 모습은 귀여웠으나 갑자기 등장한 낯선 이를 경계하지도 않고 내일 또 보러 가겠다고 말하는 프리아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애를 어찌나 홀려놓았는지 벌써 홀딱 빠졌어. 파란 구름을 만들어주었다고 하더군.”

“파란 구름? 마법사야?”

“연금술사 행세를 하지만 실상은 돌팔이다. 황족으로 태어났으면 영지나 다스릴 일이지 그 먼 곳까지 뭐하러 간 거야?”

안톤은 종조부를 원망하는 오웬의 모습을 한동안 즐겁게 관람했다. 거참 가관이다, 가관이야.

“그래도 그 사람이 나타난 덕분에 프리아가 외롭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 아니야?”

“그래, 그건 인정해. 인정한다고.”

앞으로 그자가 기력이 쇠한 유모 대신 프리아를 보살펴주고, 스승처럼 가르치게 될 거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뿐만인가, 성인이 된 후에도 건강을 염려해 후궁이 된 프리아를 돌보기 위해 제국으로 찾아오기까지 했다는 것 또한 이미 경험해 알고 있었다.

오웬 자신의 호오와는 상관없이 그는 프리아에게 더없이 소중한 이로 남게 될 것이다. 가끔 찾아오던 옷장 괴물 따위가 이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들이 함께한 20여 년의 세월을 어찌 능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왜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거야.”

프리아가 네 살이 된 이 시점까지도 잉태조차 되지 않은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오웬이 애꿎은 잡초를 잡아 뜯었다.

“어휴, 남은 날이 창창한데 무슨 걱정이야? 앞으로는 너와 더 오래 있을 텐데.”

성의 없는 위로였으나 그 말을 들은 오웬의 눈동자에 빛이 어렸다.

“맞아. 나는 그 인간보다 오래 프리아와 함께 있을 거니까. 고작 20년 따위 문제가 되지 않아.”

한 아이가 자라 성년이 될 때까지의 긴 시간이다.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시기였다. 그 세월을 고작 20년이라 말하는 건 지나친 폄하가 아닐까. 안톤은 생각했지만 굳이 토달지 않았다. 오늘 점심은 물고기가 먹고 싶으니 저 애송이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지.

“그래, 그러려고 이 고생을 하는 거잖아. 어서 프리아를 데리고 와서 이승으로 돌아가라고. 가서 20년이든 40년이든 원하는 만큼 행복하게 살면 되지.”

“60년……. 아니 80년으로 하겠어.”

어휴, 그래라. 세 살짜리와 어울려 다니더니 더 유치해졌다. 백 살까지 살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히는 오웬을 향해 안톤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걸로 배가 차? 쥐 잡아줄까?”

어렵지 않게 쥐사냥에 성공해 포식을 마친 안톤이 수염을 단장하며 물었다.

“사람은 쥐를 먹지 않는다. 이걸로 충분해.”

숲에서 딴 과일을 입으로 가져가며 오웬이 답했다.

“그럼 토끼는 어때?”

안톤이 저 멀리 토끼굴을 손짓해 가리켰으나 오웬은 고개를 저었다. 곧 프리아를 만나러 갈 예정이라 피 냄새를 풍기고 싶지 않았다. 하나 남은 달이 오웬의 머리 위로 떠 있었다.

“머리카락은 얼마나 남았어? 이 속도라면 열흘쯤 후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아.”

열흘 뒤면 해방이다.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애쓰며 안톤이 무심한 척 오웬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일곱 가닥이 남았다. 자라는 모습을 전부 볼 순 없겠어.”

얼마 남지 않은 금빛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오웬이 쓸쓸하게 답했다. 횟수가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만을 기다리는 어린 프리아가 사랑스럽고 애처로워 매일 밤 만나러 간 결과였다.

“종조부한테 들키지 말고 오늘 밤 프리아에게 마지막 인사나 잘하고 와. 날 잊으면 안 돼, 이딴 소리는 금물이다?”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은 전설을 믿지 않는다. 세 번의 계절을 지나는 사이, 프리아는 부쩍 자라나 네 살 반 어린이가 되었다. 상상력의 산물인 옷장 괴물은 이제 은퇴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더 만남을 이어간다면 프리아의 기억 속에 오웬의 얼굴이 남게 될지도 모른다. 프리아와 기르의 사이가 가까워짐에 따라 함께 있는 모습을 그에게 들킬 위험도 높아졌다. 그렇기에 오웬은 네 살 프리아에게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어. 잔소리가 시끄럽군.”

걱정해줘도 난리다. 저놈의 성격. 안톤은 꼬리를 땅에 내리치며 오웬을 흘겨보았다.

“다녀오지. 혹, 괴수가 접근하거든 깨우도록 해.”

내린 비로 무너진 토굴 안을 모닥불이 비추고 있다. 일부는 무너져내렸지만 공간이 여유 있어 몸을 숨기기 제격이었다.

“이상한 소리 말고. 자연스럽게. 훗날 기억이 떠올라도 꿈을 꿨었나 여길 수 있도록. 알았지?”

잔소리가 심한 것마저 시종장을 빼닮았다. 토굴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이 더욱 짙어졌다. 잠시 후, 금빛 머리칼이 한 가닥 불 속으로 날아들었다. 오웬은 무거운 마음으로 아이로부터 잊히기 위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니.

오웬은 웃으며 옷장에서 잠들어 있던 프리아를 안아 밖으로 꺼내놓았다.

“프리아?”

“우웅…….”

잠에 취한 얼굴이 오웬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눈꺼풀이 감기었다. 오웬은 프리아를 침대로 옮긴 후 곁에 함께 누웠다. 활동량이 부쩍 늘어난 탓일까. 아이는 오웬을 만나도 맑은 정신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프리아, 안 일어날 거야?”

오늘이 이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밤인데 자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할까. 오웬은 아쉬운 마음에 손을 올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이 지나면 얼마나 기다려야 우리가 만날 수 있는지 알아? 자그마치 20년이다.”

넌 날 까맣게 잊어버리겠지. 내가 널 먼저 만났어.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만 말이야.

“기억하지 않아도 좋아. 틀림없이 내게로 오기만 하면 된다.”

귓가에 속삭이는 오웬의 말에 간지럼을 느낀 아이가 잠투정하며 돌아누웠다. 드러난 반대편 이마를 쓸어올려 주던 오웬의 손이 멈췄다.

“이게 뭐지?”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이마에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어쩌다 다친 걸까. 놀란 마음에 잠든 아이의 몸 이곳저곳을 확인하는 오웬의 눈에 무릎에 생긴 생채기가 들어왔다. 까맣게 피딱지가 진 흉터를 보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프리아, 일어나. 일어나 봐.”

아이는 한참을 흔들어 깨우고야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와써? 기다리고……이써는데.”

잠에 취해 불명확한 발음이 작은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프리아, 정신이 들어?”

“어. 나 옷장에 있었는데?”

어디서 잠들었는지 명확히 기억할 만큼 아이는 자라나 있었다. 성장이 반가운 동시에 섭섭하기도 해서 오웬은 한숨을 내어 쉬며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옷장에 있었는데 내가 침대로 옮겼어. 프리아, 여기 무릎 왜 이렇게 되었어? 넘어졌어?”

“아……, 이거.”

오웬이 가리킨 흉터를 알아본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서. 토할 거 같았어. 그래서 유모를 부르러 가려고 했는데…….”

“했는데?”

프리아가 한참 말을 잇지 못하자 오웬이 뒷말을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이 안 나. 일어나 보니까 침대에 있었어.”

“유모는? 유모는 곁에 없었어?”

“있었어. 유모가 막 울었어. 나는 괜찮은데.”

이 작은 아이가 다치도록 내버려 두고 고작 눈물 바람을 보이는 것이 유모의 일인가. 몸이 불편하면 젊은 하녀라도 부릴 것이지. 유모의 태만에 화가 치밀었다.

“여기 이마는 왜 또 그랬어? 이것도 넘어진 거야?”

이마의 푸른 멍을 가리키며 오웬이 묻는 말에 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거는 접때 큰형님이 사는 곳에 갔었거든. 유모가 안 된다고 했는데 프리아가 따라가고 싶다고 울었어.”

“대공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거기 형아가 있어서 같이 놀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못해서 형아가 화가 났어.”

“그놈이, 아니 그 형이 때렸어?”

“아니. 형아가 밀어서 프리아가 넘어졌어. 넘어지면서 머리 쿵 했어. 근데 많이 안 아팠어.”

푸른 멍을 달고서 헤헤 웃는 모습을 보자 오웬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떤 놈이야? 이름이 뭐야?”

“에반. 이름 멋있지? 나쁜 형아 아니야. 미안하다고 사탕 줬어.”

멋있기는 뭐가 멋있는가. 오웬은 지금만큼 절실하게 프리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은 순간이 없었다. 에반. 누구인지 짐작이 간다. 선 대공의 늦둥이로 태어난 넷째 아들. 성인인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프리아와 나이 차가 크지 않았다.

“형아는 아홉 살이야. 멋지지?”

“나는 스무 살이다.”

“우와! 굉장해!”

프리아의 박수를 받으며 오웬은 자괴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노인인 종조부도 모자라 아직 어린애인 프리아의 이복형제까지 질투하다니. 아유, 대단하십니다. 어디선가 야유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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