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몸체가 두꺼운 나무를 골라야 해. 사방으로 두툼하게 가지가 뻗어 있어야 잡고 매달릴 때 휘어지거나 부러지지 않아. 내려올 때는 아래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야 한다. 한눈팔면 큰 사고가 벌어질 수 있어.”
사과나무의 몸체를 두드리며 설명하던 오웬이 프리아를 근처의 적송 앞으로 데려갔다.
“크다!”
오웬은 프리아를 어깨에서 내려 땅바닥에 서게 했다. 까마득히 높은 가지 위를 올려다보며 프리아가 탄성을 터트렸다.
“만져봐.”
오웬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손을 뻗어 우둘투둘한 표면을 만져보았다.
“이렇게 오므려서 붙잡아봐.”
프리아는 괴물이 시키는 대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적갈색 껍질이 파이처럼 부스러지며 후두둑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미끄럽지?”
“나무가 아야해.”
껍질이 벗겨진 적송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몸체가 아무리 두껍다 해도 이렇게 껍질이 후두둑 벗겨지는 적송은 피해야 해. 이 숲에서 고른다면 저기 있는 백송이나 삼나무로 선택하도록 해.”
“알았어.”
“죽은 나무에 올라가는 건 금물이다. 겉으로는 튼튼해 보여도 속은 건조해서 부러지기 십상이야.”
지난여름 벼락을 맞아 반파된 떡갈나무를 가리키며 오웬이 말했다.
“죽었어?”
깜짝 놀란 얼굴로 프리아가 반문했다.
“프리아, 죽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어?”
어쩐지 슬퍼 보이는 괴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 만날 수 없어. 나무 친구들이 슬퍼해.”
아이는 훌쩍 뛰쳐나가 쓰러진 떡갈나무 주변의 다른 나무를 쓰다듬었다.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지?”
“유모가 얘기해줬어. 프리아 엄마 아빠는 하늘나라에 있대. 그렇지만 나중에 프리아를 데리러 올 거라고 했어.”
“나중에?”
되묻는 오웬의 목소리가 떨렸다.
“응. 프리아가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어서 머리랑 수염이 막 하얗게 변하면 데리러 온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렇지?”
유모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리아는 먼 땅에서 청년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야 해. 프리아.”
“응? 천천히?”
“나도 네가 할아버지가 된 후에야 부모님을 만나러 가면 좋겠어.”
“왜? 빨리 보고 싶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린 연인을 끌어안으며 오웬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참아냈다. 이렇게 행복한 시간에도 암시처럼, 죽음의 기억이 엄습해왔다. 시간은 흐르고 프리아는 자라나 결국, 마지막 순간을 맞기 위해 제국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를 두고 전장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좀 더 빨리 찾았더라면.
만약, 만약에…….
오웬은 고개를 저어 그를 괴롭히는 자책과 가정을 물리쳤다.
“프리아.”
“응?”
괴물의 느닷없는 포옹에 어느새 익숙해진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오웬의 귓가로 아이의 따뜻한 숨결이 쏟아진다.
“미안해.”
“응?”
“그래도 난 너를 만나고 싶어.”
비록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한 길이어도.
제국에서의 날들이 그에게 외롭고 슬픈 기억으로 남았다 해도.
“만나고 있는데?”
눈동자를 깜박이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네가 와주었으면 좋겠어.”
내게로.
오직 나에게로 이어진 그 길로.
“좋아, 갈게.”
프리아가 갈게. 꼭 갈게.
프리아는 손을 들어 외로움 타는 괴물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친구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다음엔 또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기회가 있을 때 제대로 가르쳐주어야 한다. 조바심이 든 오웬으로 인해 나무타기 강의는 새벽 별이 뜰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바닥이 가깝다 해도 무턱대고 뛰어내리면 안 돼. 발목을 크게 다칠 수 있어.”
물론 다치면 업고 다닐 생각이지만 그건 자신을 만난 뒤의 일이었다. 그 전에 다치게 된다면 저 여린 몸으로 얼마나 고생이 심하겠는가.
“알았어. 근데 괴물아, 아까는 그럼 왜 뛰어내렸어?”
제국의 황제가 벌이는 나무타기 쇼를 매번 박수치며 관람해주던 프리아가 순수한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건 무의식중에……. 나는 키가 커서 할 수 있었던 거야. 너는 안 돼.”
몸에 익은 동작대로 무심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던 오웬이 자신의 실수를 얼버무렸다. 덕분에 ‘그럼 키가 크면 뛰어내려도 되는구나!’ 프리아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말았다는 걸 지금의 그는 알 수 없었다.
“응.”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어린아이의 얼굴 위로 그날의 프리아의 표정이 겹쳐진다. 갑자기 당한 봉변에 놀라 눈동자만 깜빡이고 있었다.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모욕감을 견디기 위해 입술을 깨물던 모습을 떠올리자 오웬은 스스로를 향한 모멸감이 몰려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 마음의 행방조차 알지 못해 화풀이하듯 행한 폭력이었다. 어린 그에게 나무 타는 법을 알려준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생각하니 죄책감에 프리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오웬에게로 프리아가 다가왔다.
“아파? 나무에 쿵 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자 조바심이 난 아이가 오웬의 다리를 잡고 흔들었다.
“내가 호 해줄게. 호오 하면 아프지 않아.”
아이는 작은 입술을 오므려 바람 부는 시늉을 해 보였다. 오웬은 다리를 굽혀 시선을 맞춘 후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책감에 휩싸여 프리아를 불안하게 만들다니 이래서는 여기까지 찾아온 의미가 없었다.
“다치지 않았어. 걱정하지 마.”
오웬이 바닥에 주저앉아 허벅지를 두드려 보이자 아이가 자연스럽게 올라와 그 위로 자리를 잡았다.
“프리아,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야.”
“중요한 이야기?”
미래의 자신을 위해서라도 프리아에게 꼭 일러두어야 할 말이었다.
“살다 보면 부당한 일을 당하게 될 수 있어.”
“부당이 뭐야?”
“부당하다는 건 옳지 않다는 뜻이야. 그런 일을 당하면 억울하게 느껴지고 화가 나게 돼.”
서러워 울음을 터트리거나 칭얼거린 적은 있어도 크게 화를 내본 일이 없는 어린 프리아에게는 아직 어려운 말이었다.
“언젠가 고집 세고 오만해서 자기 잘난 줄만 아는 그런 놈을 만나게 될 수 있거든.”
차마 그놈이 본인이라고는 털어놓을 수 없어 오웬이 말을 빙빙 돌렸다.
“프리아, 참으면 안 돼. 누가 널 함부로 대하면 항의해야 하는 거야.”
“과자 주면 안 돼?”
과자를 주다니? 아이의 예상 밖의 답에 놀란 오웬이 반문했다.
“과자를 준다고?”
“과자 같이 먹고 친구 할래.”
그놈이 과연 과자에 넘어갈까. 열아홉이 아닌 세 살에 만났다 해도 과자에 넘어갈 성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한 번은 그놈을 용서해줬으면 좋겠어. 자기감정도 모르는 멍청이니까.”
“멍청이?”
오웬의 입에서 나온 유치한 단어에 프리아가 까르르 소리 내며 웃었다.
“말로 해서 듣지 않을 것 같으면 한 대 때리도록 해. 그러면 정신을 차릴 거야. 아니, 두 대. 두 대까지도 괜찮을 것 같아.”
미래 자신을 향한 손찌검을 청탁하며 오웬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렇게 주먹을 쥐어봐.”
“이렇게?”
시범을 보이는 오웬을 따라하며 프리아가 주먹을 쥐었다. 솜방망이다.
“안 되겠다. 이러다 네가 다치겠어. 그냥 손을 쫙 펼쳐봐.”
활짝 편 손이 여린 잎사귀 같다. 오웬은 웃음을 터트리며 수업을 이어나갔다. 먼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계절이 흘러 아이는 네 번째 생일을 맞았다. 지난밤도 어린 연인을 만나기 위해 꿈에 다녀온 오웬이 불퉁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싸웠어?”
앞발에 침을 묻혀 열심히 털을 고르고 있던 안톤이 말을 걸었다. 오웬은 불편한 심기를 온몸으로 드러내며 몸을 일으켜 바위에 앉았다.
“내가 어린애와 싸울 사람으로 보여?”
“응.”
짐승과 싸우나, 애와 싸우나 뭐가 다를까.
자신을 향한 안톤의 뚱한 시선을 무시하며 오웬은 간밤의 일을 꺼내놓았다.
“그 인간이 나타났어.”
“뭐? 누구?”
“기르. 자칭 내 종조부라 주장하는 인물이지.”
종조부의 이름을 입에 담는 오웬의 표정이 떫은 과일을 삼키듯 일그러졌다.
“그럼 이제 위험한 거 아냐? 그 모습으로는 안 되겠네?”
아닌 척하면서도 꿈속의 일에 관심이 많은 안톤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불쾌해. 어제는 프리아가 종일 그 녀석 이야기만 하더군.”
“좋게 생각해. 어차피 프리아는 자라서 널 만나게 될 거잖아. 앞으로 너 대신 잘 키워줄 테니까 고맙게 생각하라고.”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