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30)화 (231/237)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지.

옷장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에 놀란 오웬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등이 바닥에 닿은 자세로 나뒹굴어져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넘어진 거야?”

“쿵 했어.”

프리아는 검지를 세워 자신을 아프게 한 딱딱한 옷장 문을 가리켰다.

“여기 부딪쳤다고? 설마 내가 문을 여는 바람에 부딪혀 넘어진 거야?”

“웅.”

프리아는 서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옷장 괴물이 언제 또 놀러 올까. 마냥 기다리며 앉아있다가 그 앞에서 잠들었는데 바깥으로 열리는 문에 부딪혀 나뒹굴고 만 것이다.

“아포.”

부어오르기 시작한 이마를 문지르며 프리아가 아픔을 호소했다.

“많이 아파?”

“여기도 아포.”

바닥에 쿵 하고 찧어버린 엉덩이도 아팠다.

“왜 여기 앉아있었어? 바닥도 차가운데.”

오웬은 속상한 마음에 책망부터 늘어놓았다. 이 작은 몸에 다칠 데가 어디 있다고. 벌써 빨갛게 부어오른 걸 보니 며칠은 멍을 달고 살아야 할 것 같다.

“그치만…….”

꾸지람을 들은 프리아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진 오웬이 아이를 안아올렸다.

“날 기다린 거야?”

오웬의 어깨를 눈물로 적시며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한숨을 내쉰 오웬이 남은 손으로 옷장 문을 다시 열었다. 그가 걸어 나온 통로는 이미 사라졌다. 뒤가 막힌 판자를 배경으로 보이는 것은 봉에 걸린 여벌 옷 몇 가지와 접힌 채로 바닥에 놓인 담요 몇 장이었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으면 차라리 이 안에서 기다려.”

“여기서?”

“그래, 이렇게 담요를 깔고 또 덮어서 따뜻하게 하고 있어.”

프리아를 옷장 바닥에 내려놓은 오웬이 담요를 펼쳐 작은 둥지를 만들었다. 기어서 둥지 안으로 들어간 프리아가 작은 몸을 꼬물거리며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따뜻하다”

“그렇지?”

이러면 앞으로 문에 부딪힐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시종들의 눈을 피해 옷장에 숨어 형과 둘만의 비밀 대화를 나누던 추억을 떠올린 오웬 역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안에 숨어있던 걸 뻔히 알면서도 시종장이 못 찾는 척해주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프리아를 옷장에서 꺼내 다시 안아 올린 오웬이 그를 침대로 데려갔다. 둘이 누우면 꽉 찰 만큼 작은 침대다. 프리아는 강아지처럼 오웬의 곁에 달라붙어 쉴 새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은 어떤 괴물을 무찔렀어?”

옷장 괴물인 동시에 괴수를 무찌르는 기사이기도 한 오웬이 하나뿐인 그의 청중에게 그날 치 무용담을 전달했다.

“오늘은 잠시 바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부하 녀석이 올라와 날 깨우더군. 무슨 일인가 싶어 내려왔더니 갑자기 땅이 갈라지면서 커다란 전갈 한 마리가 나타났지 뭐야.”

전갈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아이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보통 낮에는 숨어있는 괴수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지진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이곳저곳에서 땅이 갈라지며 뜨거운 용암이 솟구쳤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에 오웬은 동요 없이 안톤을 집어 들고 몸을 피했다.

“……뾰족한 가시를 세운 거대한 물고기가 우리를 쫓았어. 물 밖으로 나왔는데도 여전히 숨을 쉬더군. 그 녀석은 부하에게 맡기고 나는 악어를 상대했지. 입에서 어찌나 고약한 냄새가 나던지.”

오웬이 훅하고 입바람을 내뿜자 프리아가 양손을 펼쳐 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프리아 이 닦았어. 진짜야.”

“그래, 잠들기 전엔 꼭 양치해야 해.”

며칠간 쌓인 무용담을 들려주는 사이에 아이가 잠이 들었다. 여정은 고되었으나 달이 지면 프리아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만으로 오웬은 힘겨운 날들을 버티고 있었다.

만남이 반복되는 사이, 오웬은 프리아를 둘러싼 주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쌓았다. 아이가 잠이 들면 방을 나가 하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프리아를 돌보는 유모는 연로해 귀가 어두웠다. 바로 옆방에 있으면서도 아이 우는 소리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그녀에게 처음에는 화가 치밀었으나 지켜보는 사이에 프리아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끔찍하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대공과 그의 가족이 머무는 곳은 본성이며 이곳과는 작은 숲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다. 낯가림이 심한 어린 후처를 위해 선대공은 따로 떨어져 있던 동쪽 탑을 재정비해 그녀만의 휴식처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선대공 부부의 사망 이후, 대공위를 물려받게 된 장남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들에게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유모는 부득불 아이를 홀로 키우려 했다. 하인과 하녀들의 손이 아이에게 닿는 것조차 꺼려했다.

프리아의 작은 세계는 유모와 오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모가 잠이 들면 프리아는 옷장에 몸을 숨기고 그의 하나뿐인 친구, 괴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오웬의 발을 잡아끌었다. 오웬은 모르는 척 놀란 시늉을 해 보이며 잡힌 발을 천천히 흔들었다.

“이건 누구지? 또 무슨 괴물이지?”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오웬은 몸을 숙여 아이를 한 팔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단순한 놀이에도 프리아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했다.

옷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오웬이 팔에 매달린 아이의 무게를 가늠하며 물었다.

“조금 무거워진 것 같은데?”

“나 많이 먹었어. 키 많이 컸어. 진짜야.”

오웬이 바닥에 내려주자 아이는 쪼르르 달려가 벽에 등을 맞대었다. 벽에 그어진 금 위로 훌쩍 한 뼘이 솟아올랐다.

“누가 발뒤꿈치 들어도 된다고 했지?”

지난 방문 이래 시간은 꽤 흘렀겠으나 그사이 키가 한 뼘이나 자랄 리는 없었다. 오웬이 지적하자 프리아가 소리 내어 웃으며 뒤꿈치를 다시 바닥에 붙였다.

“조금 자라긴 했어.”

오웬은 나이프를 꺼내 벽에 금을 새겼다. 아이의 키는 여전히 오웬의 허벅지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오늘은 밖으로 나갈까?”

“좋아.”

달이 훤히 내비치는 창문을 가리키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경비는 삼엄하지 않다. 하인들이 드나드는 뒷문을 이용하면 들키지 않고 쉽사리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숲은 고요하다. 먼 곳에서 이따금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오웬은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여긴 시원하구나. 내가 있는 곳은 오늘 여름이었어.”

머리 위로 부는 산들바람을 맞으며 오웬이 입을 열었다. 저승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모기를 쫓으며 잠이 들었다가도 다음 날이면 눈보라를 맞으며 눈을 뜨기 일쑤였다.

“안아줘.”

자연스럽게 팔을 벌리며 프리아가 하는 말에 오웬이 미소를 지었다. 오웬이 몸을 낮추며 아이가 달려와 그의 품에 안긴다.

“난 네가 커서도 이렇게 솔직하게 내게 표현해줬으면 한다. 물론 내가 처음에는 좀 차갑게 대할 테니 그리하기 어렵겠지. 그런데 사실은 널 무척 신경 쓰고 있었거든?”

“사과!”

오웬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주변을 둘러보던 프리아가 나무로 손을 뻗었다. 시야는 높아졌으나 아직 팔이 짧아 획득은 무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웬이 사과 하나를 따서 품 안의 아이에게 쥐여주었다.

“같이 먹어.”

받자마자 자신에게 다시 돌려주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오웬이 웃었다.

“네가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 성품으로는 대공가의 재산을 유지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네 형들도 성격이 무른 탓에 고생하고 있더군.”

황후 역할 역시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프리아.”

“응?”

“네가 먼저 나에게 같이 살자고 했거든?”

“응.”

“그러니 넌 황후가 될 수밖에 없어. 나중에 무르자고 하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황후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의 입에서 천진한 답이 흘러나왔으나 오웬은 만족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몇 개 더 따갈까?”

“응.”

우듬지 쪽에 달린 사과가 더 붉었다. 오웬은 프리아를 땅에 앉힌 후, 훌쩍 뛰어올라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반동을 이용해 더 높은 곳으로 오르자 순식간에 정상이었다.

“우와!”

아래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오웬은 사과 알 몇 개를 따 옷 안에 넣고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왔다. 괴수를 피해 나무 위에서 잠드는 날이 많아 오르내리는 것쯤은 손쉽게 할 수 있다.

“나도 하고 싶어!”

프리아의 관심은 이미 사과 알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프리아의 눈동자에 어린 존경심에 도취된 오웬이 진지하게 나무 타는 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우와아! 높다!”

오웬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오른 프리아가 한층 높아진 시야에 감탄을 표했다.

“이 가지를 먼저 잡고 몸을 흔들어서 반동을 줘야 해. 아직 어려서 지금은 무리니 설명이라도 들어. 어차피 나중에 잘하게 될 거거든. 그렇지 않아도 여름 궁전으로 행궁을 떠났을 때 네가 위험하게 나무……”

거기까지 말하던 오웬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 잘하게 돼?”

이럴 수가.

‘저승이 이승에 영향을 미치고 이승이 저승에 영향을 미치게 돼.’

짐승의 경고를 떠올린 오웬이 낭패감에 이마를 짚었다. 행궁에서 그리 화를 내놓고 프리아에게 나무타기를 가르치다니. 몸이 약한 대공가의 자제에게 누가 그런 위험한 기술을 가르쳤을까 궁금했었다.

남을 비난할 것도 없다. 범인은 바로 오웬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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