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9)화 (230/237)

“과거에 일어난 일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군.” 

씁쓸히 내뱉은 오웬의 말에 짐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히 죽음을 막으려는 시도는 금물이야.”

프리아에게 닥칠 비극을 알면서도 경고해 줄 수 없다니. 낯선 땅에서 홀로 죽어간 프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자 오웬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어.”

“주의 사항이 늘어가는군.”

왜 진작 프리아를 만나기 전에 이야기해주지 않았지? 오웬에게서 책망의 눈빛을 받은 짐승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는 하룻밤으로 끝난데다 결국 귀환에 실패했으니 부작용이라고 할만한 게 달리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넌 꼭 살려서 돌아가고 싶다며? 네 얘길 듣고서 나도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이라고.”

“그래, 고맙군. 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또 무엇이지?”

비아냥이 섞인 오웬의 질문에 짐승은 잠시 언짢은 심기를 내보였으나 곧 체념하고 설명 이어갔다.

“꿈속에서 너를 이미 알고 있는 이와 마주쳐서는 안 돼.”

“그게 무슨 뜻이지? 프리아의 나이, 이제 고작 세 살이다. 그 시기에 난 잉태조차 되지 않았어.”

지금까지 나이 차를 실감해본 적이 없어 굳이 따져보지 않았으나 프리아는 오웬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지금의 너를 잘 알고 있는 사람 말이야. 20년의 간극을 뚫고 너를 한눈에 알아볼 만한 사람.”

“프리아를 제외하고 말인가?”

오웬의 반문에 짐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프리아도 나이가 어려 너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 괜찮다는 거지. 세 살 때 만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럼 몇 살 때까지 만날 수 있지?”

“대여섯 살쯤부턴 위험할 것 같은데? 그때부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짐승의 말을 들은 오웬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훼니아의 대공가에 그럴만한 사람이 있던가. 오웬은 자신의 대관식에 요아힘 대공을 초대하지 않았다. 프리아를 제외하면 그가 만난 대공가의 인물이라고는…….

“공국의 재무관과 그의 비서를 만났지.”

공국의 사절 자격으로 제국을 방문했던 프리아의 형제와 조카를 그는 노골적으로 냉대하며 반나절 가까이 방치해두었다. 돌이켜보니 미움 살 일 투성이었다.

“친했어?”

“아니. 딱 한 번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다.”

황제를 알현하는 사절단의 의례적인 인사와 그에 대한 자신의 짧은 답례. 냉랭하던 분위기 속에서 당황하며 고개를 조아리던 그들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래도 가능한 그들과 마주치지 마.”

다른 후궁들처럼 본가에서 시녀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으니 프리아 외에는 오웬을 알아볼 만한 이가 없었다.

“……한 명 있었군.”

뒤늦게 거슬리기 짝이 없는 인물 하나를 떠올린 오웬이 표정을 구겼다.

“친하지는 않지만 알아볼 법한 인사지.”

기르. 나이 들지 않은 얼굴로 감히 오웬의 종조부라 주장하는 자. 프리아를 어릴 때부터 맡아 길렀다던 그가 이번에도 장애물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우두머리 네가 20년 후에서 왔다는 사실을 훗날에도 그가 알아챌 수 없도록 말이야.”

그자야말로 시간의 흐름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가 프리아에게 소중한 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죽이면 안 되겠지?”

“큰일 날 소리 한다! 그럴 거면 이제 만나러 가지 마!”

분노한 짐승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 방정맞은 모습을 보며 오웬은 프리아의 머리카락을 집어 촛불로 가져갔다. 화륵, 순식간에 타오른 금빛이 그를 먼 과거로 데려간다.

옷장 문이 열리며 나타난 사내를 프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

꿈인가? 졸린 눈을 비비며 프리아는 눈을 다시 감았다 떴다. 옷장 괴물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날 잊어버렸어?”

“아아니. 프리아 안 잊어버렸어.”

웃음기 섞인 사내의 질문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침대 곁으로 걸어온 사내가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우리가 얼마 만에 다시 만났지?”

“으음……. 그러니까아.”

작은 손가락을 활짝 펴 다시 접으며 날짜를 센다.

“열 밤? 열다섯 밤?”

손가락이 모자라 그 이상은 헤아릴 수 없다. 프리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몇십 밤?”

“그렇게 오래되었나? 늦게 와서 미안해.”

숫자에 약한 어린아이의 셈이니 정확하진 않겠으나 오웬은 덕분에 꿈이 전날 밤의 다음 날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시 날 기다렸어?”

“응!”

프리아는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옷장 괴물이 다른 괴물을 없애주어 더는 밤이 무섭지 않았지만 프리아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잠깐만 기다려!”

작은 발을 바닥으로 내린 프리아가 달려가 방 중앙에 놓인 의자 앞에 섰다. 탁자와 의자 모두 세 살 아이에게는 맞지 않아 아무리 손을 뻗어도 위에 있는 물건을 집을 수 없다. 끙끙거리며 의자 위로 올라간 프리아가 두 발로 서서 탁자로 손을 뻗었다.

“이거 열어줘?”

오웬의 손이 먼저 탁자에 놓인 금속 볼에 닿았다. 우묵한 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거꾸로 놓인 볼을 들추자 접시에 담긴 파이 조각 하나가 나타났다.

“이게 먹고 싶었어?”

졸인 사과 조각이 탐스럽게 올려진 파이 조각을 가리키며 괴물이 하는 말에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가로로 방향을 바꾸었다.

“너 먹어.”

황제인 자신을 향한 엄청난 호칭에 당황하던 오웬은 곧 파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프리아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라니.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이 시기의 너밖에 없을 거다. 나중에도 존칭을 떼고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

“먹어.”

참아야 해. 옷장 괴물을 만나면 주려고 아껴 둔 거니까. 프리아는 한 번 더 괴물에게 먹기를 권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목구멍 밖까지 들렸다는 걸 아이는 모르고 있었다. 오웬은 웃음을 참으려 애쓰며 나이프를 꺼내 파이 위로 가져갔다.

“같이 먹자.”

파삭 소리를 내며 파이가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입이 작으니 조금 더 자르는 게 좋지 않을까. 오웬이 다시 칼을 움직였다. 부스러진 단면이 지저분하게 떨어졌으나 아이는 신이 나 양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나는 누굴 이렇게 먹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린 프리아에게 파이를 먹여주며 오웬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맛있어?”

“웅.”

입안 가득 파이를 담은 채로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탕에 졸인 사과 조각이 아이의 입술에 붙어있는 걸 본 오웬이 떼어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하다.

“이런다고 날 시종처럼 생각하면 곤란해.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 관계는 뭐랄까. 좀 더 높은 차원의 끈끈한 무언가로 맺어져 있다고 볼 수 있지.”

“차워니 모야?”

입속에 든 파이로 인해 발음이 부정확해진 프리아가 물었다.

“내가 알려줘도 좋겠지만 새로운 걱정이 든다. 이 넘치는 호기심을 어쩌지 못하고 학자로 커버리면 어쩌지?”

하짜가 머야.

이어지는 질문에 오웬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마터면 후궁전이 아니라 연구실에서 프리아를 만나게 될 뻔했다.

“배불러.”

“벌써?”

작게 자른 조각 몇 개를 먹었을 뿐인데 프리아가 포만감을 호소해왔다. 아이란 원래 이렇게 조금밖에 먹지 못하는 것인지? 의문에 빠진 오웬이 손을 들어 프리아의 배를 두드려보았다.

“배가 홀쭉하군. 여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어야 크게 자랄 수 있어.”

“그러면, 그러며언. 빵! 하고 터지지 않아?”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세 살짜리 아이다운 발상에 할 말을 잃은 오웬이 남은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터지지 않으니 많이 먹어도 괜찮아.”

“그치만 배부른데?”

“그럼 배가 고파지면 그때 먹어.”

알았어! 야무지게 대답한 프리아가 탁자에 턱을 대고 오웬이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단 음식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수십 일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다 보니 한번 입을 대자 막힘없이 들어간다.

“솜씨가 좋군. 황궁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야.”

정작 당사자는 듣지 못할 극찬을 내린 오웬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너네 집에?”

황궁의 뜻도 모르면서 어림짐작해 추측한 프리아가 오웬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응. 내가 사는 곳이야.”

“나도! 나도 가보고 싶어!”

옷장 괴물의 집이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아빠 옷장 괴물, 엄마 옷장 괴물, 아기 옷장 괴물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눈을 빛냈다.

언젠가 네가 살게 될 곳이다.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으나 짐승의 경고를 무시할 순 없었다. 오웬은 대신 닫힌 창문을 열고 손가락을 뻗어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 아주 먼 곳이야.”

“나도 가고 싶다.”

키가 작아 깨금발을 딛고 선 프리아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오웬은 프리아를 안아 올려 달빛이 내린 밤 풍경을 보여주었다.

저 멀리 번을 서는 경비병이 피워놓은 모닥불 빛이 보인다. 언젠가 프리아와 함께 지붕에서 내려다보았던 황궁의 밤 풍경을 떠올리며 오웬이 손을 올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에는 일곱 개의 달이 떠 있어.”

“진짜? 좋겠다.”

“대신에 해가 없어서 낮도 이른 저녁처럼 어둡지. 달이 하나씩 지고 짙은 밤이 몰려오면 괴수들의 세상이 시작돼. 날 잡아먹으려고 다가오지.”

“잡아먹히면 안 돼! 옷장 괴물아!”

어느새 오웬의 이야기에 빠져든 프리아가 놀라 소리쳤다. 겁먹어 더욱 동그랗게 변한 푸른 눈을 보며 오웬이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잡아먹히지 않을 거야. 나는 힘이 세니까.”

여기 칼도 갖고 있잖아? 오웬이 칼집을 두드려 보였으나 프리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엄마랑 아빠랑 아가 데리고 와. 여기서 함께 살자.”

“여기서? 사람들이 날 무서워할 텐데?”

“무섭지 않아. 너는 착한 괴물이잖아.”

오웬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한 프리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 황제를 칭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도 없다.

“세상 모두가 날 두려워하지.”

“아니야. 나랑 같이 살아. 집에 가지 마.”

오웬이 답이 없자 프리아는 소리 높여 칭얼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나는 곧 돌아가야 하는데.”

“안 돼. 프리아랑 같이 살아.”

흐어엉. 서러움에 눈물이 터진 프리아가 오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숨 가쁘게 헐떡이는 작은 몸이 애처로우면서도 그는 입가에 피어나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언제봐도 놀라운 정도로 적극적이란 말이야. 좋아, 그 저돌적인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기억해둬. 먼저 같이 살자고 한 게 누구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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