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8)화 (229/237)

“아니, 부르지 않았네.” 

그게 무슨 소리냔 표정으로 시종장을 바라보며 기르가 답했다.

“제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는데……. 저하가 아니라고 하시니 아마도 꿈에서 들었나 봅니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있어 쑤시기 시작한 허리를 두드리며 시종장이 말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어. 처소로 돌아가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오게.”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시온데 어찌 제가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피로가 역력히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서 고집을 꺾지 않는 시종장을 보며 기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고생이 저 녀석의 귀환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잠시 눈이라도 뗀 사이에 폐하께 변고가 닥치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행여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저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눈물을 찍어내던 시종장이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침상에 누워있는 오웬에게서 이상을 발견한 것이다.

“저, 저하! 폐하께서……. 폐하께서 또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상처를 크게 입으셨어요! 제발 어떻게든 해 주십시오.”

하룻밤 사이, 오웬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났다. 짐승의 발톱에 할퀸 듯한 생채기에서부터 붉고 푸른 갖가지 멍, 급기야는 날카로운 이빨에 물린 것처럼 뼈가 드러나는 큰 상처가 생겨나 시종장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찰과상이군. 곧 아물걸세. 너무 걱정하지 말게.”

살갗이 쓸려 피가 배어 나오는 오웬의 손등에 마른 천을 가져가며 기르가 말했다. 피를 흡수한 천이 붉게 물들었다. 천을 떼어내자 상처는 흔적 없이 사라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젊은 몸의 회복은 놀랍다. 그 사이 저승에서는 상처가 아물 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저하, 저는 겁이 납니다. 폐하께서 어떤 고초를 겪고 있으시기에 이런 상처를 달고 계시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워져 눈물만 나옵니다.”

상흔조차 남지 않은 황제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시종장이 몸을 떨었다. 저승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시간의 흐름이 이곳과 다르게 흐르고 있는 것뿐이네. 마음을 굳게 먹겠다 하지 않았나? 이러다간 녀석이 돌아오기도 전에 자네가 먼저 마중을 가겠어.”

“제가 따라가야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저하의 곁에서 시중을 들 수 있다면 이 늙은 목숨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기르의 말을 들은 시종장이 통곡하는 소리를 냈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르가 착잡한 심정으로 손을 들어 시종장의 어깨를 두드려 위로했다.

“뒤를 따라 봤자 짐이 될 뿐이네. 수시로 상처를 입을 정도로 험난한 길인데 자네가 어찌 도움이 되겠나?”

당장 죽어 뒤를 따른다 해도 귀환이 문제였다. 약을 한 병 더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황족이 아닌 시종장에게 적용이 될지 미지수였으며, 적용이 된다 해도 그를 데리러 갈 수 있는 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리아 님은 만나셨을까요? 죽은 이를 어찌 데려올 수 있다는 것인지 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괜히…….”

오웬과 다르게 상처 하나 없이 평온한 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종장이 말끝을 흐렸다. 괜히 헛수고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근심은 깊었으나 차마 기르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녀석이 선택한 길이야. 지지해줘야 하지 않겠나.”

담담한 말투와는 다르게 기르의 심정도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저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서글펐다.

프리아, 돌아와다오.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짐승의 말처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헤맨 끝에 오웬과 짐승은 간신히 낡은 오두막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안에 누구 있는가? 잠시 비를 피했으면 한다.”

두드리는 소리에 반응이 없자 오웬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이게 뭔 냄새야? 뭐 썩었나 봐.”

해묵은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 후각이 예민한 짐승이 얼굴을 찡그리며 앞발을 휘저었다.

“잘됐군. 침대가 있어.”

퀴퀴한 악취를 따라 발을 옮기던 오웬이 침대 위에 놓인 해골을 발견했다. 뼈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니 잠든 채로 죽음을 맞은 모양이다.

“저기 눕겠다고?”

짐승이 질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쌓인 먼지 때문에 벌써 발바닥이 더러워지고 말았다.

“벌레 가득한 풀밭이나 흙먼지 휘날리는 땅바닥에 비하면 호화로운 성이나 다름없지. 싫다면 안톤 너는 나가서 자도 좋아.”

시트를 잡아당겨 뼈를 한곳으로 모으며 오웬이 말했다.

이렇게 낡은 오두막을 성에 비유하다니. 저 녀석은 분명 가난한 왕이었을 거야. 비가 쏟아지는 바깥과 먼지 날리는 실내를 번갈아 바라보던 짐승이 수염을 씰룩이며 돌아앉았다. 몸이 젖는 것보단 더러운 실내가 낮다고 판단 내린 모양이다.

“다행히 빗자루가 있군.”

구석에서 빗자루를 찾아낸 오웬이 창문과 현관을 활짝 열어놓고 청소를 시작했다. 빗자루가 일으키는 먼지를 피해 탁자로 올라간 짐승이 썩어 비틀어진 음식물을 발견하고 하악질을 시작했다.

“신기하군. 사람은 썩어 해골이 되었는데 음식물이 남아있다니.”

“송장벌레가 다녀간 거야. 떼로 몰려왔겠지. 아무리 커다란 사체가 누워있어도 걔들 지나간 자리엔 살점 하나 남아있지 않아.”

썩은 고기를 질색하는 짐승이 발톱을 세워 탁자를 긁어댔다. 피어오른 먼지가 가는 수염으로 달라붙는다. 애꿎은 먼지를 공격하며 짐승이 탁자 위에서 날뛰었다.

“비가 그치면 묻어주지. 숙박료 대신이다.”

집안에서 찾아낸 상자에 갈무리한 뼈를 담으며 오웬이 망자에게 말했다. 죽어 도착한 곳에서 다시 죽음을 맞다니 지독한 모순이었다.

“불 좀 피워. 쌀쌀하니 춥다.”

벽장에서 꺼낸 새 이불 위로 어느새 자리 잡은 짐승이 흠칫 몸을 떨었다. 오웬은 구석에 쌓인 장작을 집어 중앙으로 가져왔다. 벽난로는 따로 없었으나 바닥 중간이 패여 있어 불을 피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이프에 달린 부시를 꺼내 부싯돌과 부딪치자 금세 불이 붙었다. 그러자 짐승이 침대에서 내려와 불 가까이 앉았다.

“고원을 지배하는 자, 그러다 수염 타겠어. 추위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미 살짝 그슬리기 시작한 짐승의 수염을 오웬이 지적했다. 발끈 성이 난 짐승이 부푼 꼬리로 바닥을 내리치며 답한다.

“인간 따위가 뭘 알겠어. 내가 살던 곳은 말이야. 한낮에는 무지막지하게 덥고 밤이 되면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워진다고. 난 추위도 더위도 버틸 수 있어. 버틸 수 있다는 거지, 좋아한다고는 말 안 했다?”

모닥불의 열기에 흐물흐물 녹아든 짐승이 목 안쪽에서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런 점은 궁중 여인들이 즐겨 기르던 고양이와 다를 바 없었다.

“너처럼 못생긴 고양이는 처음 본다.”

이 자식이 진짜. 나른하니 풀려있던 짐승의 눈매가 금세 샐쭉해졌다. 싸우자! 아르르르르. 털을 세워 위협하는 소리마저 보잘것없다. 화를 내니 한층 시종장과 닮아 보여 오웬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샜다. 이런 녀석에게 이름을 준 걸 알면 안톤이 화내겠어.

빗줄기는 가늘어졌으나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괴수의 습격을 대비해 오웬은 현관과 창문을 단단히 닫아걸었다.

“오늘도 만나러 갈 거야?”

적당히 몸이 데워지자 침대로 돌아간 짐승이 오웬에게 물었다. 불붙은 초를 침대 옆 협탁에 놓으며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어. 달이 보이지 않으니 떠나도 되겠지?”

오웬이 침대에 몸을 싣자 더해지는 무게에 꿍얼꿍얼 불평하던 짐승이 발치로 몸을 옮겼다.

“가는 건 좋은데 내 얘기 마저 듣고 가.”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 했다. 소지품에 담긴 기억일 뿐이니 프리아에게 기억이 남지 않을 거라 했지?”

“사실 그건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는 이야기였어.”

엄숙한 표정을 한 짐승이 말을 이었다.

“소지품에 담긴 기억은 단편적이라 지금까지 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거든. 죽은 이가 생전에 그 물건과 접촉할 때 옮겨간 상념 같은 것들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기억을 바꾸려는 시도를 해왔어. 익사한 이에게 물을 조심하라 소리치고, 전장에서 죽은 이에게는 출정하지 말라 애원하는 거지.”

그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흥미를 보이는 오웬에게 짐승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어차피 그들은 모두 실패했거든. 죽은 자를 살려내긴커녕 본인들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으니까.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어. 그런데 말이야.”

잠시 말을 멈췄던 짐승이 혀를 내밀어 앞발을 핥았다. 주목도를 높이려는 수작을 눈치챈 오웬이 짐승을 노려보았다. 짐승은 오웬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길 원했다.

“계속해. 듣고 있으니까.”

“물을 조심해라, 전장에 나가지 말아라. 이 말들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는 할 수 없어. 어쩌면 그 경고로 인해 그들이 그런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도 몰라. ‘물’, ‘전장’ 이런 단어가 뇌리에 남아 그들을 그런 운명으로 이끌었을지도. 그래서 내가 과거를 바꾸려 하지 말라고 한 거야.”

이 무슨 궤변인가. 눈살을 찌푸린 오웬이 짐승의 오류를 지적했다.

“이미 그들은 이승에서 죽은 후가 아닌가? 죽은 후에 들은 말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지?”

“끝없는 도돌이표와 같은 거야. 저승이 이승에 영향을 미치고 이승이 저승에 영향을 미치게 돼. 저승에서의 프리아는 널 기억할 수 없어. 그러나 이승의 프리아는 다르지. 네가 프리아를 만난 건 이승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야. 한낱 소지품에 담긴 상념 따위와 비교할 수 없지. 육신의 일부를 태워 성사시킨 주술이야. 그 영향력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오웬에게는 현재, 프리아에게는 과거. 시간은 비틀린 채로 연결되어 무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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