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오 만날 수 이써?”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아이의 입에서 불명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오웬은 몸을 움직여, 품에 안긴 프리아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만날 수 있다.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우리는 반드시 만나 오랜 시간을 함께할 거야.”
“조아. 기다리…….”
기다리고 있을게. 말을 끝맺지 못한 채로 아이는 잠이 들었다. 작은 배가 오르내리며 따뜻한 숨결을 밖으로 내뿜는다. 그 숨이 닿을 때마다 누군가 심장 안쪽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웅…….”
잠꼬대를 흘리며 아이가 품 안에서 꼬물거린다. 세 살배기 아이의 서툰 몸짓에 이토록 큰 설렘과 애틋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벅찬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오웬은 프리아를 안은 팔에 가득 힘을 실었다. 겨우 손에 넣은 이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봐, 정신이 들어?”
무엄하게도 누군가 오웬의 뺨을 두드려 잠을 깨우고 있었다. 얼굴에 와닿는 부드러운 털 뭉치의 감촉에 미간을 찌푸리며 오웬이 눈꺼풀을 힘들게 들어 올렸다.
“벌써 날이 밝았나?”
몸을 일으킨 오웬이 짐승에게 물었다. 동굴 입구로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 아직 달은 두 개밖에 안 떴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단 말이야.”
앞서 동굴 입구로 향한 짐승이 오웬을 향해 앞발을 흔들어 보였다.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오웬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눈 뜨기 전까지는 천국에 있었는데 말이지.”
“뭐라고? 할 말 있으면 나가서 말해. 저 안쪽에서 자꾸 수상한 소리가 들려온다니까?”
깊숙이 뚫린 동굴 안쪽을 가리키며 짐승이 말했다. 오웬은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하나씩 늘어나 일곱 개가 된 달은 다시 줄어들어 결국 사라지고 만다. 괴수들은 한밤 내내 활개 치며 돌아다니다가 달이 중천에 뜨면 잠이 들었다. 그러니 비교적 안전한 낮을 이용해 먹이를 조달해야 했다.
“이렇게 일찍 움직이는 놈도 있나?”
“있지. 취향 별난 녀석들.”
작은 발로 뛰쳐 나가 입구와 거리를 벌린 짐승이 어두운 동굴 안쪽을 쏘아보았다. 오웬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수상한 소리라고 했지? 묘사해봐.”
오웬의 말을 들은 짐승이 앞발을 들어 땅 위로 긴 자국을 남겼다.
“이렇게 말이야. 뭔가 질질 끄는 듯한…….”
어린아이 낙서처럼 어설프기만 한 자국을 보며 오웬이 실소를 흘렸을 때, 입구에서 시커먼 구렁이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크게 벌린 아가리 안에서 갈라진 붉은 혀가 남실거린다. 드러난 등 쪽은 어두웠으나 땅에 닿은 배는 유독 흰 빛을 띠고 있었다.
“저 녀석이 오는 소리였군.”
오웬과 짐승을 번갈아 노려보며 쉭쉭거리던 구렁이는 오웬이 검을 빼 들자 슬그머니 후퇴해 동굴로 되돌아갔다. 아직 성장 중인 어린 뱀이라 저보다 큰 인간과 붙어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이쿠! 애 떨어질 뻔했네.”
출렁이는 뱃살을 만지며 하는 말에 오웬이 설마 하는 눈빛으로 짐승을 바라보았다.
“그 모욕적인 시선은 뭐야? 그냥 해본 말이잖아. 난 수컷이라고!”
부푼 꼬리를 연신 바닥으로 내리치며 짐승이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런가. 실례했군. 그렇다면 거기 든 것은 전부 지방이겠군.”
바닥에 닿을 듯한 짐승의 배를 보며 오웬이 조소의 눈빛을 보냈다.
“털이 길어서 그래! 난 엄청나게 높고 추운 고원에서 살았단 말이야. 너처럼 약한 인간 따위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굶어 죽을걸?”
“그래? 그렇다면 이건 필요 없겠군.”
작살에 꽂혀 퍼덕이고 있는 물고기를 들어 보이며 오웬이 말했다. 하악거리며 항의하던 짐승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털이 물에 닿는 것이 싫어 땅 위의 동물을 주로 사냥해왔지만 그의 입맛은 물고기를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강을 거슬러 올라와 산란을 마친 연어 떼와 운 좋게 조우하는 날이면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포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일 년 중에 얼마 되지 않았다.
공중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보며 침을 흘리고 있던 짐승의 발 앞에 작살에 꿰인 민물고기 두 마리가 떨어졌다.
“좋은 꿈을 꾸게 해준 답례다.”
깨어나자마자 소란을 겪는 통에 여운은 날아가 버렸지만 기억은 생생히 남아있다. 오웬은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단 냄새를 풍기던 작은 프리아를 떠올려보았다. 품에 안았던 아이의 감촉이 지금도 두 팔에 느껴지는 듯 하다.
“잘 만났나 봐? 어쩐지 자면서 실실거리고 웃더라고.”
냠냠 소리까지 내가며 물고기의 살점을 뜯어먹던 짐승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식사에 집중했던지 수염까지 앞을 향해 몰려있었다.
“예상과는 달랐지만 좋은 만남이었다.”
오웬의 얼굴에 감도는 미소를 본 짐승이 수염에 붙은 생선 찌꺼기를 털어내며 다시 물었다.
“이상한 짓 안 했지? 안 했을 거라 믿을게.”
“어떤 이상한 짓 말이지?”
“새삼스럽게 뭘 물어? 내가 경고했잖아. 과거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고.”
“너무 작아. 그러니 병치레가 잦을 수밖에. 건강하게 만들고 싶어.”
짐승의 말을 흘려들으며 오웬이 새로 품게 된 작은 야망을 털어놓았다.
“미쳤구나? 아무것도 하지 마. 과거와 다르게 행동했다간 크게 후회하게 될 거야.”
하여간 욕심 덩어리. 인간들이란 어쩜 이리 미련이 많을까. 혀를 쯧쯧 차며 짐승이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뭘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불을 지펴 제 몫의 생선을 구우며 오웬은 짐승에게 지난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 물고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짐승은 두 귀를 팔랑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세 살이면 뭐, 걱정할 건 없네. 크면 다 까먹을 거야.”
익은 생선을 반으로 나눠 짐승에게 건네며 오웬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잊어버린다니 섭섭하군.”
오웬이 기억하는 최초의 과거, 그 속엔 형 아서와 시종장의 모습이 있다. 부모의 애정은 바랄 수 없었으나 황실의 고귀한 황손으로서 오웬은 언제나 관심의 한가운데 놓여있었다. 배속된 시종과 시녀, 형제의 교육을 맡은 학자들이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켰으나 오웬은 그들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면서도 오웬은 늘 고독을 느꼈다. 그 시절 스쳐 지나간 이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꿈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르지? 오늘 밤 잠들면 어제의 뒤를 이을 수 있나?”
오웬의 물음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짐승이 답했다.
“모르겠는데? 하룻밤 이상 꿈꾼 자들이 없었어.”
사망 시 손에 쥐고 있던 연인의 손수건,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 앞에서 시신을 붙잡고 오열했던 부모, 친척에게 물려받은 보석. 제각기 가치는 달랐어도 어차피 불에 타 사라질 물건이었다. 쓰임이 끝난 물건은 소멸할 뿐이다.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겠군.”
“다 먹었으면 떠나자. 어쩐지 다리가 쑤시는 걸 보니 며칠 내로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아.”
신경통을 호소하는 노인 같은 얼굴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느껴지던 기시감의 이유를 알게 된 오웬이 짐승의 이름을 명명했다.
“안톤.”뭐라고? 앞서 걷던 짐승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털북숭이라 부를 수는 없으니까.”
“털북숭이? 지금까지 날 그렇게 불러왔어?”
크르릉 소리를 내며 짐승이 털을 곤두세웠다. 붙였던 별명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제부터 안톤이라 부르겠다. 딱히 더 어울리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군.”
“그건 또 무슨 호랑말코 같은 이름이야!”
“대대로 이어온 요직을 맡은 자의 이름이다. 지체 높은 가문 출신에 풍요로운 재산까지 보유했지. 그 영광을 네게도 나눠주겠어.”
우두머리 오른팔쯤 되는 이름인가. 인간들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단 말이야. 짐승이 싫은 티를 내며 땅에 떨어진 나무 조각을 긁어댔다.
“나는 이미 멋진 이름을 갖고 있다. 고원을 지배하는 자, 생쥐들이 벌벌 떠는 그 이름도 찬란한 바이카르 막시무스 카이저소제…….”
“길어.”
가자, 안톤.
짐승의 말을 끊은 오웬이 화살통을 둘러멨다. 무슨 이름이 그 따위냐고! 더욱 격렬하게 나무 조각을 긁어대며 안톤이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저걸 그냥 사냥해버려?
“혹시 절 부르셨습니까?”
번뜩, 정신을 차린 시종장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촛농이 흘러내린 침상 주변에는 여전히 그와 기르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