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6)화 (227/237)

오래지 않아 오웬의 발끝이 딱딱한 무언가에 닿았다. 더듬은 손끝으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이 나무판이라는 것을 확인한 오웬이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눈앞에 나타난 낯선 공간을 오웬은 경계하며 내려다보았다. 촛불 하나로 밝힌 어두운 방이다. 중앙에는 의자가 딸린 탁자 하나가 놓였고 그 뒤로 보이는 벽난로에는 타다 남은 장작이 들어 있었다.

벽에 붙은 침대 위로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옷장 문을 열고 나타난 사내의 모습에 아이는 깜짝 놀라 울음조차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오웬은 발을 들어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오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아이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더욱 놀라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재회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찰랑거리는 푸른 물이 아이의 눈에 고여있다. 지금껏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오웬은 저 눈동자를 바라보며 늘 생각해 왔다. 세상에 태어나 지금껏 본 것 중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자신이 프리아를 알아보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어린 모습의 그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며 오웬이 소중한 연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프리아?”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을 들은 아이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태어나 제국어를 거의 들어보지 못한 아이는 사내의 첫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공국마다 억양의 차이는 있으나 갈라져 나온 언어의 근원은 동일했다. 고대 국가에서 파생된 언어가 지역별로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했기에 교육받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제국어를 익힐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그저 낯설게만 들릴 뿐이었다.

아이는 앙증맞은 입술을 벌려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높고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웬은 어린 프리아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침대 앞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돼! 괴물이 있어!”

침대 밑 공간을 작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며 아이가 말했다. 위험에 빠진 오웬을 구해주려는 듯 손을 뻗어 옷자락마저 잡아당기고 있다.

“이 아래 괴물이 있다고?”

웃음기를 감추려 애쓰며 오웬이 아이에게 익숙한 알훼니아 억양으로 고쳐 말했다.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렇게 큰 발톱을 갖고 있고 머리 위로 뿔이 달렸어! 왕! 하고 튀어나와서 나쁜 어린이들을 잡아간대.”

머리 위로 양 검지를 치켜올려 뿔을 만들어 보이면서 아이가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유모가.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니까 괴물이 안 잡아간대.”

“프리아는 나쁜 어린이인가?”

모른 척 묻는 오웬의 질문에 아이가 입술을 내밀었다. 커다란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하다.

“오줌 쌌어. 프리아 나쁜 어린이야.”

훌쩍거리며 울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나. 아직 어린데 잠자리에서 실례를 할 수도 있지. 훈육한답시고 어린아이에게 겁을 준 유모라는 작자는 대체 어떤 인간인가. 대공가의 부실한 인력을 탓하며 오웬이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아, 다 그러면서 크는 거니까.”

“정말?”

정말. 오웬은 다정하게 답하며 시선을 내려 침대 밑 어둠을 쏘아보았다.

“조심해! 옷장 괴물아!”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들은 오웬이 시선을 위쪽으로 옮겼다.

“나도 괴물이야? 옷장 괴물?”

오웬의 물음을 들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괴물……아니야?”

무어라 답해야 할까. 이름을 알려줄 순 없다. 신체 일부로 행하는 주술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에 꿈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결코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된다고 짐승은 경고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이므로 바꾸려 들지 말아야 할 것이며 아직 그들이 만나지 않은 시점이라면 그로 인해 미래가 뒤틀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 맞아. 나는 옷장 괴물이야. 아주 힘이 센 괴물이지. 그러니 침대 밑에 숨어있는 녀석 따위는 내 상대가 되지 못 해.”

정말? 아이가 반문하며 눈동자를 깜빡였다. 오웬은 허리에 찬 칼집으로 손을 가져가 검날을 보여 주었다.

“괴물이지만 나는 기사도 겸하고 있거든. 이걸로 다른 괴물을 없애줄게.”

우와. 반짝이는 칼날에 사로잡힌 아이가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오웬은 보란 듯 큰 동작으로 검을 휘두른 뒤 침대 밑 어둠을 향해 찔러 넣었다.

“이제 사라졌어. 확인해볼래?”

겁먹은 눈동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웬은 촛불을 가져와 아이가 아래를 확인할 수 있도록 비춰 주었다.

“없어졌어!”

숨어있는 괴물이 없다는 걸 확인한 아이가 기쁜 얼굴을 했다.

“대단하다! 정말 힘이 세구나?”

“또 어디에 괴물이 있지? 오늘 밤에 내가 다 없애줄게.”

어깨를 으쓱이며 오웬이 하는 말에 아이는 신이 나 방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아이의 지시에 따라 오웬은 덜 닫힌 창문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펄럭이고 있는 커튼 뒤와 그림자 진 탁자 밑을 향해 검을 움직였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무엇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마지막으로 벽장을 열어 남은 괴물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자 흥분한 아이가 침대를 빠져나와 오웬에게로 달려왔다.

“멋있다!”

아이는 눈을 빛내며 옷장 괴물이 쥐고 있는 검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프리아에게 이렇듯 진실한 존경의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웬은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감긴다.

“그래, 좋아. 앞으로도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애심을 품고 날 대하도록 해. 어른인 너에게 부족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어.”

오웬의 말을 이해할 리 없는 아이가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만져도 돼?”

만지게 해주라. 열망 가득한 눈동자가 오웬을 향해 호소한다. 검을 다시 집어넣은 오웬이 칼집째로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작은 손바닥이 아래로 쳐진다. 황급히 아이의 손을 겹쳐 잡으며 오웬이 질문했다.

“올해 몇 살이 되었지?”

“세 살.”

연인의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충격을 받은 오웬이 아이의 몸을 다시 살폈다. 아이의 키는 오웬의 허벅지에도 닿지 못할 만큼 작았다. 팔다리는 물론 머리를 받치고 있는 목조차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가늘었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 움직이고 조막만 한 머리를 굴려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아이를 양육한 경험이 없는 오웬의 눈에도 프리아의 체구는 지나치게 작아 보였다.

이걸 어떻게 살찌워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짐승의 경고 따윈 무시하고 프리아를 건강체로 키워낼 야심에 빠진 그의 귓가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옷 갈아입혀 줘. 축축해. 기분 안 좋아.”

뭐라고? 예상치 못한 요청을 들은 오웬의 시선이 아이의 잠옷으로 향했다. 오줌을 쌌다는 말을 증명하듯 잠옷 아래가 온통 젖어 있었다.

어서 벗겨달라는 것처럼 아이가 양팔을 펼쳐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길로 아이의 시중을 들며 오웬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시중을 받으면 받았지 남 뒤치다꺼리는 해본 적이 없어. 영광으로 알도록 해.”

“영광이 뭐야?”

알몸이 되어 서늘해지자 양팔로 제 몸을 감싸며 아이가 천진하게 물었다. 벽장에서 꺼낸 수건에 물을 적셔 아이의 몸을 닦아주며 오웬이 답했다.

“네가 큰 영예를 입었다는 뜻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자부심이 뭐야?”

세 살에게는 너무 어려운 단어였던가. 풀어서 설명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 오웬에게로 아이의 질문이 쏟아졌다.

“영예는 뭐야?”

“자부심이란 자신을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영예는…… 네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는 뜻이야.”

“아, 그래서 내 이름을 알았구나.”

옷장 괴물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된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인과 관계가 반대잖아. 오웬은 지적하고 싶었지만 인과 관계를 설명할 자신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젖은 침대 시트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대로 놓아둔 채 오웬은 벽난로의 불을 지폈다. 오웬이 움직이는 대로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 눈꼬리 가득 졸음이 매달려 있었다.

오웬은 흔들의자를 차지하고 있던 뜨개질감을 탁자로 옮기고 의자를 끌어다 불 앞에 놓았다. 그리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그 위로 몸을 내려놓았다. 보송보송한 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이의 몸에서는 태양에 말린 빨래 냄새가 났다.

“프리아, 넌 무얼 좋아하지?”

“나? 나는……유모가 좋아.”

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아이가 답했다.

“유모는 어디 있지? 너같이 작은 아이를 두고 어딜 간 거야?”

“유모는…… 유모방에 있지. 코 자고 있어.”

코오. 아이는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숨을 내쉬었다. 품에 안은 아이의 숨결이 단단히 끌어안은 오웬의 팔등으로 쏟아진다.

“내가 아는 너는 책을 좋아했어. 기사 영웅담을 즐겨 읽었지.”

작은 정수리에 입 맞추며 오웬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달콤한 과자 냄새가 난다. 낮에 먹은 설탕 과자 가루가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든 까닭이다.

“내가아? 근데 기사가 뭐야?”

물어볼 줄 알았다. 오웬은 입술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이다. 보통 영주와 계약을 맺고 일하지. 실력이 뛰어나다면 기사단을 차려 황제 직속으로 일할 수도 있어.”

“그렇구나아. 근데 있잖아. 아까부터 물어보려고 했는데…….”

“뭐가 또 궁금하지? 네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어. 이렇게 호기심이 많을 줄은 몰랐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오웬이 답했다. 프리아는 괴물의 가슴에 뺨을 기대며 늘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내 이름을 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 엄마도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오웬을 향해 아이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엄마는 왜 날 데리러 오지 않지?”

아서, 어머니는 왜 우릴 만나주지 않으실까?

먼 기억 속 어린 오웬이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서 있다.

‘태자비 전하께서 오수에 드셨습니다. 황자궁에 돌아가 계시면 전하께서 저하를 찾으실 겁니다.’

오늘도 거짓말이다. 태자비는 황자궁을 찾지 않았다.

“프리아.”

입술을 깨문 소년이 그의 운명에게 말했다.

“내가 찾아올게. 내가 널 만나러 올게.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외로운 네가 먼 길을 걸어 외로운 나를 찾아왔다.

넌 나를 만나게 될 거야.

우린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지독히 상처입혀도 날 포기하지 마.

나의 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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