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5)화 (226/237)

“놓고 얘기하거라. 인간 놈!” 

하아악. 짐승의 분노한 숨소리가 오웬을 향해 뿜어져 나온다. 제 딴에는 무섭게 보이기 위해 취한 행동이겠으나 오웬의 눈에는 실로 하찮기 그지없었다. 

“아깐 왕이라더니 도와주자마자 놈이 되었군.”

작은 발톱을 세운 앞발이 허우적거리며 오웬을 공격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짐승의 출렁이는 뱃살을 잠시 감상한 후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프리아를 데려오는 게 먼저야. 그 후에 풀어주지.”

“그게 누군데?”

심통 난 작은 얼굴이 오웬에게 물었다. 

“이상하군.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보지도 못 한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아? 소환하려면 최소한의 정보가 필요해.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은 데려올 수 없으니 참고해 둬.”

커다랗고 통통한 꼬리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며 짐승이 답했다. 

“이름은 프리아, 나이는 스물다섯, 알훼니아에서 태어났고 제국에서……사망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오웬이 뒤늦게 문장을 덧붙였다. 자신의 입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대충 위치라도 알고 있어?”

“모른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다른 사람들과 배에 타 떠나는 모습을 목격했어. 파수꾼이라는 자들이 데려갔다고 하더군.”

프리아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참담한 순간을 떠올리며 오웬이 말했다.

“그게 언젠데?”

“이곳 날짜로 한 달쯤 되었다.”

“그럼 아직 신입이네. 경계가 말도 못 하게 삼엄할걸? 그건 좀 어렵겠어.”

예상치 못한 짐승의 대답에 기가 막힌 오웬이 반문했다.

“뭐라고? 지금 불가능하다고 했나?”

“응. 못 데려와. 다른 사람을 골라. 파수꾼의 우리에서 추방된 사람이거나 너처럼 제멋대로 저승에 와서 숨어 사는 놈들로. 그리고 소환 시간은 1분. 지나면 다시 돌려보내야 해.”

어처구니없는 제약에 헛웃음이 터졌다. 프리아가 아닌 사람을 데려와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물며 이 땅에서 오웬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프리아 밖에 없으니 데려오고자 한들 짐승에게 정보를 알려줄 수도 없었다. 

“그 표정은 뭐야? 1분은 꽤 긴 시간이라고.”

오웬의 표정을 오해한 짐승이 털을 세우며 항변했다. 

“그래, 긴 시간이지. 만날 수만 있다면 말이야.”

기대가 꺾인 오웬이 짐승을 바닥으로 돌려놓았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호언장담한 것치고는 꽤 보잘것없는 능력을 갖춘 정령이었다.

“결정했으면 이름을 말해.”

다시 들어 올려질까 봐 경계하며 몸을 바싹 바닥으로 낮춘 짐승이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프리아 뿐이다.”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나처럼 작고 가련한 정령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키려는 거야?”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은 짐승이 짧은 앞다리를 휘둘렀다. 토실하니 지방이 붙은 몸은 어딜 보아도 전혀 가련해 보이지 않았다.

“작고 가련한 무능력자에게 내가 과분한 소원을 빌었군. 그 위대한 힘으로 본인 몸이나 지키도록 해.”

빈정거리는 오웬의 말에 기분이 상한 짐승이 하악질을 시작했다. 크게 벌어진 입속으로 제법 날카로운 송곳니가 들여다보였다.

“어서 소원을 말해라! 무례한 놈!”

“프리아를 살리려 한다. 함께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나?”

당황한 짐승이 하악질을 연발했다. 그게 가능하면 내가 신이지 정령이겠는가? 인간의 왕답게 욕심이 어마어마하구나.

“그것도 어렵다면 날 당장 프리아가 있는 곳으로 옮겨줄 수 있는가?”

“……길 안내는 해줄 수 있다.”

안전은 보장 못 하지만.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짐승이 오웬의 눈치를 살피며 뒷말을 덧붙였다. 

“원한다면 꿈에서 만나게 해줄 수 있어.”

“프리아를?”

오웬이 되묻자 짐승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다만 조건이 있어. 하룻밤에 소지품 하나. 꿈에서 보고자 하는 이가 생전에 지녔던 물건이 필요해.”

프리아가 생전에 지녔던 물건. 오웬은 짐승의 말을 되풀이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집히는 것이라고는 시종장의 나이프뿐이다. 프리아를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체취가 담긴 무엇이라도 가져왔어야 했다. 워낙 오랜 기간 떨어져 있었고 저승의 상황을 알지 못했기에 미리 준비한 물건이 없었다.

오웬은 낭패한 얼굴로 습관처럼 목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그가 그리울 때면 머리카락이 담긴 로켓을 만지며 외로움을 달랬다. 전장에서도, 이곳 저승에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로켓을 열어 머리칼을 쓰다듬곤 했다.

“손길이 많이 닿은 물건일수록 더욱 생생한 꿈을 꿀 수 있어. 가진 게 있어?”

손가락 끝으로 로켓 표면을 매만지던 오웬의 동작이 멈췄다. 로켓의 잠금쇠를 비틀어 연 그가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잘린 금빛 머리카락 한 묶음이 그의 손바닥 위로 놓였다. 

“이것으로도 가능할까? 프리아의 머리카락이다.”

“신체 일부라면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그 정도면 문제없겠어.”

“하룻밤에 소지품 하나라는 건 무슨 뜻이지?”

“힘을 다한 물건은 사라지게 돼. 넌 운이 좋구나. 털 한 가닥으로 하룻밤을 살 수 있잖아.” 

사냥대회가 있던 날, 오웬은 행운의 증표를 핑계로 프리아의 머리카락을 잘라 로켓에 넣어두었다. 이렇게 쓰이게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욕심을 부렸어도 좋을 뻔했다. 

꿈에서 만나게 될 프리아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여러 밤 찾아가 기억을 새겨줄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때까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대하듯 감정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프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오웬이 쓸쓸히 로켓의 뚜껑을 닫았다.

“깨어난 후에는 어떻게 되지? 프리아에게도 꿈의 기억이 남는 건가?”

“그건 불가능해. 너는 이 땅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니까.”

짐승은 단호한 어투로 말하며 앞발에 침을 묻혀 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프리아를 만나게 해주겠다 하지 않았나? 무엇이 다르지?”

“네가 만나는 건 소지품에 담긴 기억이야. 물건에 남은 생전의 기억을 읽고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그렇다면…….”

프리아에게 아무리 자신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려고 해도 소용없을 터였다. 실망한 오웬의 얼굴을 본 짐승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내키지 않으면 다른 소원을 말해.”

“아니야. 하겠어. 첫 번째 소원을 그것으로 하겠다.”

그저 프리아의 지난 기억 속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게든 살아 숨 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럼 두 번째 소원은 길 안내지? 이제 하나 남았다. 신중하게 결정해.”

순식간에 소원 두 개를 해치운 짐승이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선심 쓰듯 말했다.

“프리아는 언제 만날 수 있지?”

“밤까지 기다려. 달이 모두 저물 때까지 기다려야 해.”

저승을 지배하는 달의 힘이 가장 약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비록 꿈이라고는 하나 이미 죽은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일을 신이 반가워할 리 없었다. 

“배고프지 않아? 나 쥐 잘 잡는데. 아니면 그 낡은 옷 대신 털이 부숭부숭한 새 옷을 입혀줄 수도 있어.”

남은 소원 하나를 어서 소진할 작정으로 짐승이 무심한 어투를 가장해 물었다.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했지? 남은 하나는 필요할 때 말하도록 하지.”

짐승의 제의를 거절한 오웬이 던져두었던 포획물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목이 잘린 사체를 목격한 짐승이 본능적으로 털을 세우며 뒷걸음쳐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지방이 너무 많은 고기는 좋아하지 않아. 안심하도록.”

피 냄새를 맡은 괴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 숲을 빠져나가야 한다. 앞서 걷는 오웬의 등 뒤에서 연신 하악질 소리가 들려왔다. 

“시작부터 난항이군. 길 안내를 맡겠다 했지?”

잠시 후, 체념한 짐승이 짧고 통통한 다리를 움직이며 그를 따랐다.

어둡게 일렁이는 수면 위로 달이 떠 있다. 이지러진 달의 형태가 물결에 찢겨 흐르고 있다. 모닥불 속으로 장작을 던져넣으며 오웬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왕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불 가까이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짐승이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머리 위에 번쩍거리는 이상한 걸 달고 다니잖아. 그딴 거 쓰기 좋아하는 놈들은 다 왕이지.”

황관을 말하는가. 공식행사를 제외하면 수장고를 지킬 뿐인 그 무거운 관이 여태 자신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줄도 몰랐다.

“나에겐 안 보이던데?”

오웬이 수면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짐승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영혼을 꿰뚫는 혜안을 지닌 나 같은 정령은 되야 볼 수 있는 거야.”

“혜안을 지니신 고귀한 분께서 식물에 갇히신 이유는 뭘까.”

크르릉. 이를 드러내며 짐승이 오웬을 노려보았다. 오늘 하루 같이 다니며 가슴 깊이 새기게 된 것이 있다. 인간 그중에서도 우두머리는 상종할 바가 못 된다는 것. 저 어린 녀석은 정말이지 성격이 좋지 못했다. 

짐승이 식충식물에 갇히게 된 이유는 망할 호기심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면 건드려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슬픈 천성이 야생동물인 그에게도 존재했다.

“이제 곧 달이 진다. 프리아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크게 부푼 꼬리를 연신 바닥으로 내리치며 구시렁거리던 짐승이 고개를 들었다. 밤이 충분히 무르익었다. 

강과 인접한 동굴이 있는 이곳은 짐승이 발견한 곳이었다. 꿈에 빠진 인간은 여간해서는 깨어나는 법이 없어 안전한 곳에서 잠들어야 했다. 

“털 한 가닥을 꺼내 불 속에 던져. 그리고 잠이 들면 원하던 이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짐승의 말을 들은 오웬이 로켓을 다시 열었다. 머리카락을 묶은 가는 리본이 풀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 가닥을 빼내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태워.”

차마 머리카락을 불에 던지지 못하고 망설이는 오웬을 향해 짐승이 재촉했다. 하룻밤 꿈을 사는 대가라지만 머리카락 한 올조차 아쉬웠다. 이미 잘려 나간 머리칼이지만 프리아를 해치는 것 같아 쉬이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이러다 달 뜨겠네.”

답답함을 느낀 짐승이 다가와 토실한 앞발을 휘둘렀다. 짐승의 발톱이 걸린 머리칼이 오웬의 손을 빠져나와 불로 향했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암전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피워놓은 모닥불은 사라지고 귓전을 맴돌며 흘러가던 강물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짐승의 장난질일까. 오웬이 손을 들어 주변을 더듬어 보았다. 만져지는 것이 없다.

“프리아?”

오웬이 입술을 열어 그리운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때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먼 곳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을 향해 걸으며 오웬은 귀를 곤두세웠다. 미약하게 들리던 소리는 점점 더 커져 식별 가능한 음성이 되었다. 훌쩍이는 아이 울음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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