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에 기록된 군나르 대제의 업적은 찬란하다. 비록 그 시작이 형제들의 피로 쌓아 올린 즉위식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후세의 평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뭐지? 돌아가면 추모비를 세워주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먼 과거를 더듬던 사내의 눈이 다시 오웬에게로 향했다. 사내는 후손의 얼굴에서 형제의 흔적을 찾아냈으나 자신의 이름만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건 부황에게 하사받은 보검이 아니더냐? 이 귀한 것을 어찌 나에게?’
‘제게는 과분한 물건입니다. 실력이 미숙하여 검이 제 역량을 펼치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지요. 형님께서 저 대신 아껴주셨으면 합니다.’
갈수록 일취월장하던 실력을 갖추고도 동생은 재주를 함부로 뽐내지 않았다. 내심 그의 검이 탐났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사내는 거듭된 동생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애를 명목으로 서로의 검을 맞바꾼 후, 그는 사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 되었다.
늘 자신의 한 수 아래에 있다고 여겼던 그가 실은 몇 수 위를 내다보고 있었다는 걸 사내는 저승에 떨어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군나르……. 네 검을 가져가거라.”
분수에 맞지 않은 것을 탐한 죄. 그 대가는 죽음이다. 이 죽음 뒤에 무엇이 존재할까. 부디 영원한 무(無)이기를 사내는 바라고 있었다.
“네 것을 돌려주마. ……이제 날 쉬게 해줘.”
바르작거리던 수십 개의 다리가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오웬은 대답 없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꿀렁꿀렁 쏟아져 나오는 끈적한 체액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잠시 후, 툭 소리를 내며 거대한 지네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통은 머리를 잃었음에도 여전히 버둥거리며 오웬에게서 빠져나가려 들었다. 오웬은 칼을 들어 다시 지네의 몸으로 찔러 넣었다.
남아있는 몸통 역시 두 조각으로 분리해낸 오웬이 등을 바닥에 대고 쓰러졌다. 사각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분리된 몸통이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흩어졌다.
숨이 터져 나올 때마다 오웬의 흉부가 빠른 속도로 오르내렸다. 오두막 안이라 생각했던 곳이 실은 축축한 흙바닥이었음을 오웬은 알게 되었다. 사내의 환술이 풀리자 침상은 평평한 돌로, 탁자는 썩은 나무 조각으로 바뀌었다. 사내가 내주었던 여벌 옷이 놓여있던 자리에는 더러운 나뭇잎이 몇 장 놓여있을 뿐이다.
오웬은 그대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새벽처럼 짙은 밤하늘에 쌍둥이 달이 떠 있다. 달의 힘이 약해질수록 괴수가 출몰한다는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몸을 움직이기엔 위험한 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몸을 일으킨 오웬의 눈으로 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쥐 떼의 모습이 보였다.
사방에서 몰려온 작은 쥐들은 오웬을 지나쳐 세 갈래의 무리를 형성했다. 한 무리는 지네의 머리로, 나머지는 반으로 나뉜 몸통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한때는 인간이었던 사내의 몸은 순식간에 해체되어 동물의 양분이 되었다. 배를 채운 쥐 떼들은 오웬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승산 가능성이 있는가, 가늠해보듯 저들끼리 찍찍거리는 소리를 냈다.
개중 몸집이 큰 쥐 한 마리가 먼저 등을 돌렸다. 일제히 방향을 바꾼 쥐들은 빠르게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긴장이 풀린 오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잊고 있던 허기가 다시 몰려왔다. 사내에게서 스튜를 대접받았다고 생각했으나 환각일 뿐, 그가 삼킨 것은 썩은 물 몇 모금에 불과했다.
나무 열매라도 찾기 위해 오웬이 몸을 움직였다. 몇 발자국이나 갔을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몸이 중심을 잡기 위해 휘청거렸다. 하나 더 떠오른 달이 바닥을 훤히 비췄다. 오웬의 발에 밟혀 짓이겨진 낙엽 사이로 무언가 비죽 솟아 나온 물건이 있었다.
돌은 아니다. 오웬은 고개를 숙여 그를 잡아끈 물건의 정체를 확인했다. 온갖 때로 더럽혀졌지만 한때는 반짝였을 금속 손잡이. 칼집에 꽂힌 검이 자신을 데려가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었다.
오웬은 나이프를 들어 조심스럽게 땅을 팠다. 습기 많은 땅이라 어렵지 않게 뽑아낼 수 있었다. 검을 살피는 오웬의 눈에 검은 흙이 박혀 짙어진 각인이 보였다. 칼집에 새겨진 글자를 오웬이 소리 내어 읽어 내렸다.
“군나르.”
네 검을 가져가거라. 이제 날 쉬게 해줘.
사내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 오웬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약속을 지켰군.
* * *
시위를 떠난 활이 풀숲으로 날아갔다. 곧 무성한 덤불 뒤에서 캥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오웬은 그가 겨냥한 곳을 향해 걸음을 신중히 움직였다. 덤불을 헤치자 작은 짐승 한 마리가 화살에 꿰어 축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안심은 이르다. 오웬이 칼집에서 검을 빼내는 사이, 틈을 노린 짐승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남은 왼손으로 던진 나이프가 짐승의 심장에 꽂혔다. 뒤이어 검을 휘두르자 분리된 머리에서 녹색 피가 흘러나왔다.
몇 번을 보아도 식욕을 떨구는 색이다. 생김새는 기괴해도 제법 육질이 좋다는 걸 알고 있는 오웬이 남은 몸통을 집어 올렸다.
화살이 어느새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가는 나뭇가지의 끝을 날카롭게 다듬고 새의 깃털을 달아 만든 화살은 보기엔 어설퍼도 사냥에 있어서는 제 몫을 톡톡히 했다.
‘미리 채워둬야겠군.’
쓸만한 나뭇가지를 골라 꺾으면서도 오웬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승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승 기준으로 오웬은 벌써 수십 일의 밤을 보냈다.
강을 따라가라는 사내의 조언을 그는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사내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달리 행동할 방법이 없다. 작은 짐승을 잡아 배를 채우고 더러워지면 강으로 가 몸을 씻었다.
달조차 사라지는 깊은 밤이면 나무에 올라 괴수의 습격을 피했다. 피곤이 극에 달하면 나뭇가지에 몸을 걸친 불편한 자세로도 숙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되도록 잎이 무성한 가지를 찾아야 한다. 몸을 가리지 못한다면 괴조에게 먹잇감이 여기 있다고 손을 휘둘러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척에 예민해졌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밤낮으로 경계하며 이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달한 감각이었다. 잡은 짐승을 손에 들고 걸음을 옮기던 오웬의 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거 놓지 못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이 더러운 놈들이!”
오웬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불량한 무리에게 희롱당한 귀족 아가씨가 뱉을 법한 전형적인 발언을 저승의 숲에서 듣게 될 줄이야.
사실 이승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황궁에서 나고 자란 오웬이 그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릴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리아가 즐겨 읽던 낭만 소설에서 자주 나오던 상황이었기에 기억하게 되었을 뿐.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어?’
놀리듯 말하면 불만스럽게 삐죽이던 입술을 기억한다.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는 오웬의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좋은 말로 할 때 놓으라고! 나를 놔주란 말이야!”
카랑카랑한 소년의 목소리였다. 엉뚱한 상황에 흥미를 느끼며 오웬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주라!”
소설이었다면 마땅히 신분이 높은 누군가와 얽혀야 할 목소리의 주인공은 작은 동물이었다. 이걸 무어라 말해야 할까. 너구리? 고양이? 두 종에서 각자 못난 점을 따와 섞으면 이리되지 않을까.
눌린 빵처럼 생긴 퉁퉁한 얼굴, 눈동자는 노란색이었으며 코는 붉고 낮았다. 옹졸하게 생긴 입술 위로는 여러 쌍의 흰색 수염이 펄럭이고 있다. 전신을 덮은 은회색 털은 빽빽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인다. 털에 묻힌 작은 귀는 팔랑거리며 움직였다. 이마 위로 듬성듬성하게 찍힌 검은 점들이 짐승을 한층 우스꽝스러워 보이게 했다.
“너! 날 도우라고! 인간의 왕!”
아가리를 반쯤 닫은 식충식물의 이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며 못난이가 말했다.
“그걸 네가 어찌 알고 있지?”
멀찌감치 떨어져 간격을 유지하며 오웬이 물었다.
“난 모르는 게 없다. 그러니 어서 날 구해!”
가시처럼 솟은 식물의 이 사이로 오웬을 쏘아보며 짐승은 거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먼저 내 질문에 답하면 구해주도록 하지.”
“인간은 믿을 수가 없어. 그리고 넌 그 우두머리잖아?”
“그렇다면 나도 널 믿지 않도록 하지. 보통은 아리따운 여인으로 가장하던데 신선한 둔갑이야.”
“뭐라고? 날 환술이나 부리는 저급한 것들에 비교하지 마. 역시 우두머리라 그런지 한층 멍청하군.”
심술궂은 노인처럼 생긴 작은 얼굴이 으르렁거리며 분노를 표했다. 도움을 구하는 처지에 비난을 멈추지 않는 짐승을 향해 오웬은 느긋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첫 번째 질문이다. 괴수가 아니라면 네 정체는 무엇이지?”
“난 정령이다. 신성한 존재라고!”
뿌듯함을 내보이며 짐승이 답했다.
“그 신선한 존재께서 왜 한낱 식충에게 걸리셨는가? 널 구하면 내가 얻게 될 이득을 말해봐.”
“왜 하필 너 같은 멍청이가 굴러들어 온 거야? 정령을 구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그렇다.”
이 또한 자신을 홀리려는 괴수의 수작이 아닐까. 오웬은 반신반의하며 다시 물었다.
“그 어떤 소원이라도 말인가?”
“그런 게 어딨어? 내가 받은 도움의 크기만큼만 돌려줄 수 있다. 우두머리, 과욕은 금물이야.”
“그렇다면 네 목숨값은 얼마나 되지?”
“소원 세 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이상은 안 돼.”
세 가지 소원이라. 전형적이군. 어릴 적 읽은 동화를 떠올린 오웬이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좋다. 정령, 약속을 지키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 같은 줄 알아? 정령은 소원을 다 이루어주고 난 후에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어. 그런 것도 몰라?”
애초에 저 못난이를 찾아 이곳까지 들어온 건 대화 상대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지켜본 후 괴수의 둔갑이라면 바로 제거할 생각이다.
“그 칼은 장식이야? 내 예쁜 털에 자꾸 이 끔찍한 수액이 묻고 있잖아!”
식충식물은 입 안으로 먹이를 유인해 천천히 녹여 먹는다. 만 이틀 이상 소화액에 푹 담긴 후에야 녹기 시작하기에 아직은 닿은 피부가 따끔거리기만 할 것이었다.
거리를 유지하며 팔을 뻗은 오웬이 검을 들어 식물의 줄기를 잘라냈다. 바닥에 늘어진 아가리로 다가가 가시를 잘라주자마자 기다렸단 듯 짐승이 튀어나왔다.
통통한 몸을 흔들어대 수액을 떨쳐낸 짐승이 고얀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퉁퉁한 앞발을 들어 식물을 공격했다. 갑작스럽게 줄기 하나를 잃은 식물은 남은 아가리를 다물어 자신의 몸을 방어했다.
웃기지도 않은 싸움을 오래 지켜볼 마음은 없다. 오웬은 버둥거리는 짐승의 목덜미를 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첫 번째 소원이다. 프리아를 이곳으로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