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3)화 (224/237)

황급히 뒤를 돌아본 오웬의 눈에 신음하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보았던 광경은 무엇이지?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오웬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다시 칼날 위로 향했다. 제 손가락을 움켜쥐고 쩔쩔매는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등에가 붙어있었군. 피를 빨아먹고 사는 벌레인데 물리면 꽤 아프다오.”

“등에라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반문하자 사내가 손가락을 문지르며 답했다.

“쇠파리라고도 하지. 들어본 적 없나 보군. 심통 난 일도 없는데 말꼬리가 흔들리고 있으면 십중팔구 이 녀석이 근처에 있단 뜻이지.”

그런 곤충이 있었던가. 말을 아끼기는 했으나 관리하는 이는 따로 있었기에 제 손으로 먹이 한 번 준 일이 없었다.

“금방 부어오를 텐데 긁지 마시오. 더 간지러워질 테니.”

“벌레는 잡았는가?”

“날아가 버렸소. 잡아서 보여줄 걸 그랬군.”

사내는 껄껄 웃으면서도 통증이 극심한지 얼굴을 찡그렸다.

“혹시 그 벌레에게 물리면 헛것을 보기도 하는가?”

칼날에 비춰 보였던 지네의 검은 몸통을 떠올리며 오웬이 다시 물었다.

“헛것이라니. 뭔가 이상한 광경이라도 본 것인가? 어서 말해보게.”

사내는 조바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을 갈무리하며 오웬에게 다시 다가갔다. 신력이 담긴 물건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지금쯤 어지간히 독이 퍼져 있을 것이라 여겨 방심했다가 크게 데이고 말았다.

“이상한 것을 보았소. 사람만큼이나…… 큰.”

벌레의 독 때문일까. 오웬은 맑았던 정신이 점차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어깻죽지에서 시작된 아픔이 전신으로 둔중하게 퍼져간다. 오웬은 무거워진 손을 들어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혹시……, 해독을…….”

할 방법이 없겠는가. 그리 물으려 했건만 생각대로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분명 뭔가 이상하다 느꼈는데 무엇이었지?

“호되게 물린 것 같소. 이곳 환경에 맞게 진화한 놈들이지. 중독되면 환각을 볼 뿐 아니라 환청까지 듣게 된다네. 이보게, 내 말 들리시오?”

지척까지 다가온 사내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자상한 말투로 물었다. 오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안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나이프의 날을 빼냈다.

“상태가 꽤 좋지 않아 보이오. 어지럽지는 않소? 침대로 다시 가 좀 더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네만.”

“물건은……, 저 물건들은……어디서……얻었지?”

오웬이 왼손을 들어 오두막을 채운 가재도구를 가리켰다. 검이나 주머니칼 따위면 모를까. 가구와 냄비, 여벌의 옷가지를 지상에서부터 가져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을에 가본 적도 없다는 사내가 이 물건들을 다 어디서 얻었을까.

자급자족은 한계가 있다. 사내의 손재주가 아무리 빼어나다 해도 이 물건들을 다 혼자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 걸 궁금해하지? 지금껏 살아오며 물건의 출처 따위 알고자 한 일이 없었을 텐데? 원하기도 전에 주어지지 않았던가? 그게 바로 황궁의 삶이지.”

사내는 입술을 끌어올리며 여인을 꾀듯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쇠붙이는……, 어디서…….”

스튜가 담겼던 냄비와 사내가 짚을 뭉쳐 닦아내던 그릇들, 숟가락은 모두 새것이었다. 오두막 어디를 살펴보아도 풀무질을 해 쇠를 연마할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갈아입으라 내주었던 사내의 여벌 옷만이 유독 낡아 있었다. 깨끗이 빨아 말렸다던 옷에서 어찌 이런 악취가 풍길 수 있을까. 오웬이 집어 든 사내의 옷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생각하지 말게. 몸이 힘들어진다네. 편히 쉬고 싶지 않나? 자네를 위해 새 침대를 준비했어.”

사내가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낸다. 낡은 탁자와 침상이 사라진 자리에 호화로운 침대가 나타났다. 주인의 잠자리를 살피기 위해 모인 시종들이 오웬을 알아보고 공손히 예를 표했다.

“뭐가 또 필요할까? 절세미인? 이 여인은 어떠한가?”

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침의를 입은 여인이 나타나 오웬에게로 걸어왔다. 여인은 관능적인 미소를 선보이며 그를 침실로 이끌었다.

“한 명으론 부족하지? 자네는 젊으니까 말이야.”

또 다른 여인이 나타나 오웬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이곳에서 머물러요.’ 속삭이던 여인은 잠시 후,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오웬의 목에 걸린 로켓을 지적해 보였다.

“그 물건은 잠시 치워두게. 부인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겠나.”

사내의 말을 들은 오웬이 목걸이를 벗었다. 여인들은 기뻐하며 양쪽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우리와 함께 있어요.’


‘영원히.’

거의 다 되었다. 젊든 늙든, 사내라면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내는 여인들로 분한 두 쌍의 다리에 힘을 실었다. 만족을 모르던 어떤 이는 그것들이 진짜 여인이라 믿은 채 수십 쌍의 다리에 감겨 황홀한 죽음을 맞이했다.

“더는 힘든 길을 갈 필요가 없어. 네가 찾는 이는 이미 널 잊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괜찮아. 내가 기억하니까.”

또렷한 목소리로 답하며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총기가 돌아온 눈동자가 여인 너머 사내의 본모습을 꿰뚫어 보았다.

“어떻게…….”

의문을 품던 사내의 눈이 곧 크게 뜨였다.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여인들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녀들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뒤이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사내가 이미 잘려 나간 두 쌍의 다리를 발견했다.

“그대가 말했지. 난 의심이 많아 오래 살 거라고.”

로켓 줄을 감은 왼손으로 지네의 몸통을 단단히 붙잡은 오웬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지네의 몸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들었다.

괴성을 내지르며 사내는 오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쳐댔다. 둥근 로켓이 닿은 몸통 부위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마디와 마디를 잇는 연약한 틈을 노리고 박힌 작은 칼날은 사내의 속살을 헤집으며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다.

커다란 머리 양쪽으로 비쭉 솟아난 더듬이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였다. 저 애송이가 어떻게 독의 마비에서 풀려났을까. 달조차 사라진 밤, 오웬이 잠들자마자 사내는 날카로운 독니를 그의 목덜미에 박아 넣었다.

두꺼운 검은 몸통 좌우로 빼곡하게 달린 수십 개의 붉은 다리, 겉모습은 혐오스러웠으나 사실 지네는 전투력이 높은 생물이 아니었다.

피를 응고시켜 순식간에 먹잇감의 숨통을 끊어놓는 뱀독에 비하면 지네의 살상력은 놀라우리만큼 낮았다. 그렇기에 그는 먹잇감의 살결에 이를 박아 넣은 채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상대의 몸을 완전히 마비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 사내는 그들이 원하는 환상을 제공했다. 낯선 땅에 떨어져 공포에 떨고 있던 인간들은 아무 의심 없이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자신들이 몸을 눕힌 곳이 축축한 흙바닥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들은 달콤한 꿈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환각에서 깨어난 이는 없었다. 단 한 명 눈앞의 청년을 제외하고는.

찢긴 사내의 상처에서 질척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칼날을 타고 흐른 오웬의 피가 그 위로 떨어져 붉은 얼룩을 남겼다. 피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

칼날을 고쳐 잡으며 오웬이 말했다. 스스로 그은 손바닥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온다. 목덜미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와 섞인 까닭에 사내는 오웬의 자해를 눈치채지 못했다.

“분하구나.”

치켜든 두 쌍의 턱다리에서 마치 눈물처럼 독액이 흘러나왔다. 사람을, 형제를 잡아먹으며 버텨온 삶이다. 배신으로 끝난 이승의 삶과 배신하며 살아온 저승의 삶 중에 어느 쪽이 더 후회로 남을지 사내는 알 수 없었다.

이제 곧 그의 삶이 끝난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제 육신을 찢어내고 있는 후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사내를 마주보았다.

“군나르…….”

너였느냐. 긴 저주에서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 다시 찾아왔던가.

‘형님…….’

귓가에 속삭이던 그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하고 쫓기듯이 황량한 곳으로 왔다. 그래, 네가 날 버릴 리 없다. 내 동생이 그리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었을 리 없어.

이미 그의 몸속에 흘러들어 양분이 된 동생을 부정하며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복속시킨 땅으로 제국은 한층 부강해졌다. 궁금할 리 없겠지만 해줄 만한 다른 이야기가 없군.”

뽑아든 칼을 지네의 머리밑으로 가져가며 오웬이 입을 열었다. 반항을 멈춘 사내가 무력하게 칼날을 받아들였다.

“백성들은 그를 사랑했나?”

사랑받기 위해 지배하는 군주가 있던가. 황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두려움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형제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오웬은 자조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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