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2)화 (223/237)

무엇인가 달그락거리는 소음에 눈을 떴다. 자신이 잠든 곳이 어디였는지 바로 알아채지 못한 오웬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을 깨웠군. 날이 아직 어둡다네. 더 쉬어도 좋소.”

짚을 뭉쳐 그릇을 닦던 사내가 손을 들어 더 자라는 시늉을 했다. 오웬은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휴식을 취한 덕분에 몸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침상이 하나뿐이라 쉬지 못하는 건 아닌가?”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하나뿐인 침상을 양보해준 사내의 호의가 고마웠다. 돌봄을 받는 데 익숙해 거절하지 않았지만 자신 때문에 사내가 쉬지 못했다면 미안한 일이다.

“나는 원래 낮에 잠들고 밤에 활동한다네. 신경 쓸 것 없소. 잠자리도 편하지 않았을 텐데.”

오웬의 물음을 들은 사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손을 내저어 보였다.

“어째서지? 그편이 생존에 더 유리한가?”

궁금증이 생긴 오웬이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은 둘, 하늘은 여전히 남색 빛이었다.

“그렇진 않아. 다른 이들은 낮을 좋아하지. 덜 위험하기도 하고. 알아두게, 달의 힘이 약해질수록 괴수가 출몰한다네.”

“그대 말대로 나는 아는 것이 없어. 이곳에 대해 더 이야기해줄 수 있겠는가?”

가능한 사내에게서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내야 한다. 졸음기가 사라져 또렷해진 오웬의 눈을 본 사내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좋은 자세일세. 가르칠 맛이 나는군. 나도 이곳에 떨어졌을 때 도움 주는 이를 먼저 만났다면 그토록 고생하지 않았을 거야.”

사내가 윗옷 자락을 들어 올려 몸 곳곳에 남아있는 흉터를 보여주었다.

“이건 승냥이에게 습격당했을 때 남은 것이고 이 자국은 솔개의 발톱에 찢긴 것이네. 뱀에게 물린 일은 이루 말할 수 없고 한번은 세이렌에게 홀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 일도 있지. 이야기하자면 삼 일 밤낮을 넘길 터인데 다 듣고 싶지는 않겠지?”

사내는 껄껄 소리 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처음 떨어졌던 곳이 저승의 입구라네. 정상적인 죽음이었다면 파수꾼이 곧 자네를 맞으러 나타났겠지. 그 자리에 있지 않고 헤매다 괴수를 맞닥뜨리는 이들도 있어. 그 또한 운명이겠지.”

“자살 역시 정상적인 죽음으로 보는가?”

자살자들도 파수꾼의 감시망을 피할 수 없다 했던 사내의 말을 떠올리며 오웬이 물었다.

“온전한 죽음을 맞았으니까. 회생의 여지가 없으니 명부에 이름이 올라갈걸세.”

“이곳에서의 일이 실패해 지상의 육신이 죽는다면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는가?”

“아니.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되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네. 지상으로 다시 돌아가 정상적인 죽음을 맞은 후에야 축복받은 땅으로 갈 수 있어.”

프리아를 구해내지 못한 채 육신이 부패한다면 오웬의 혼은 이 척박한 땅을 영영 떠돌게 될 것이다. 생사의 법칙을 깨뜨려 혼란을 초래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형벌이었다.

“그대처럼 타인에 의해 죽음을 맞은 이들에게까지 규칙이 적용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오웬의 말을 들은 사내의 눈이 기묘하게 반짝였다.

“그렇지. 온당하지 못하네. 애당초 그 약은 제 혈육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네. 악용한 자들에겐 심판이 내려지지. 생전에 악행을 쌓은 자들은 파수꾼의 수호를 받지 못해.”

오랜 기다림 끝에 원수의 피를 마셨다. 주름져 늘어진 살점에 독니를 박고 살점을 뜯어내 집어삼켰다. 노인이 된 형제는 변변찮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사내의 식량이 되어 저승의 생을 마감했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달콤한 피 냄새가 입안을 맴돈다. 당장 집어삼키고 싶지만 참아야 했다. 주입한 독이 퍼지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최근 부상으로 여러 쌍의 다리를 잃었다.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덤벼들다간 외려 자신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기다릴 생각이다. 독이 온몸 구석구석 돌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까지.

“이곳에 군나르, 그대와 같은 이들이 얼마나 있는가? 마을은…….”

질문을 도중에 멈춘 오웬이 얼굴을 찌푸리며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왜 그러는가? 벌레에라도 물렸나?”

“여기 벌레가 있는가?”

빈손을 확인하는 오웬의 모습을 본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벌레야 많지. 자네가 자고 일어난 침상에도 벼룩이 몇 마리 살고 있을걸세. 가까운 곳에 늪지가 있네. 온갖 것들을 키우는 산실이지.”

“벼룩이 있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오웬이 반문했다. 상황이 열악한 전장에서도 벼룩에게 몸을 뜯긴 일은 없었다. 시종장의 뼈를 깎는 노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오웬이 손을 들어 옷을 털어냈다.

“진정 귀하게 자라신 황자님이로군. 내가 살던 시대만 해도 벼룩 따위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네. 어릴 적엔 수도에 쥐가 들끓어 전염병이 크게 번지기도 했지. 수많은 이가 죽어 나갔네.”

사내의 말을 통해 오웬은 그가 살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었다. 오웬과 사내 사이에는 수백 년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세월의 깊이만큼 쌓였을 경험을 듣기 위해 오웬은 잠자코 귀를 열었다.

“나와 같은 이들이 얼마나 있느냐 물었지? 흩어져 뿔뿔이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네. 어딘가 꽤 번성한 마을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보지 못했어. 누가 사람으로 둔갑한 괴수인지 알 수 없으니 상대를 경계할 수밖에.”

“알아보는 방법은 따로 없는가?”

“신력이 깃든 물건과 접촉하면 고통을 느낀다지. 일순간 둔갑이 풀릴 수도 있다더군.”

그런 물건을 어찌 구할까. 산 넘어 산이었다. 가장 절실한 것은 무기였으나 하나뿐인 군나르의 칼을 내어달라 할 수는 없었다. 오웬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칼집에 머무는 것을 본 사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소중한 물건이라 내어줄 수 없어 미안하네. 날이 밝으면 함께 산으로 가서 몽둥이로 쓸 나무라도 베어오지 않겠나?”

괴수를 어찌 몽둥이 하나로 당해낼까. 오웬은 자조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면 내 옷으로 갈아입겠나? 낡았지만 깨끗이 빨아 말려둔 것이니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단 나을 걸세.”

서랍에서 여벌 옷을 꺼내 온 사내가 오웬에게 환복을 권했다. 물뱀의 피가 묻어 더러워진 옷 꼴이 적잖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오웬은 사내의 말을 받아들였다. 셔츠 위로 가볍게 걸쳤던 상의를 벗어 탁자에 내려놓으려는데 무언가 둔탁한 물건이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옷을 집어 들어 살피는 오웬의 눈에 불룩 튀어나온 주머니가 보였다.

손을 넣어 들어있던 것을 꺼내자 숨어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잊고 있던 물건의 정체를 떠올린 오웬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것이 왜…….”

시종장의 나이프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칼날을 접어 수납할 수 있도록 시종장이 고심해 제작한 물건이었다. 어렸던 오웬이 막무가내로 울음을 터트렸던 날, 황손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종장은 눈앞에서 묘기를 보이듯 칼날을 여러 번 접었다 펼쳐 보였다.

약병을 열기 위해 빌렸다가 시종장의 애원이 시작되는 바람에 무심코 주머니에 넣은 채로 잊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작은 칼로 무엇을 할까. 오웬은 쓴웃음을 지으며 탁자 위로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가 풍겨온다. 옷에서 나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어디선가 이와 같은 냄새를 맡은 기억이 있다. 오웬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며 목덜미로 다시 손을 가져갔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많이 불편한가? 내가 좀 봐도 되겠소?”

더듬거리며 만진 손끝에 피가 묻어났다. 벼룩 따위가 물어서 낼 상처가 아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는 오웬에게로 사내가 다가왔다.

냄새가 짙어졌다. 사내에게서 나는 냄새였던가. 늪이 가까워서일까. 갑자기 공기마저 축축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 냄새는 분명……. 오웬은 흐릿해지는 시야로 오두막에 놓인 가재도구를 바라보았다. 새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도 눈에 띄었다. 마을에 가본 적이 없다면 사내는 어디서 이것들을 손에 넣었을까.

그 순간 오웬의 목덜미로 손을 뻗었던 사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짐승도 사람도 아닌 여타의 다른 존재에게서 흘러나올 법한 금속성의 괴음.

“아서의…….”

묻어둔 약병을 찾기 위해 아서의 묘비를 들어 올리고 젖은 땅을 파냈을 때 콧속으로 스며오던 축축한 흙냄새. 바로 그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오고 있다는 걸 오웬은 깨달았다. 삽날에 엉겨 붙어 꿈틀거리던 벌레를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셔츠에 가려졌던 로켓 줄이 빠져나와 흔들리고 있다. 시키지도 않았건만 신전에 가 축성을 받아왔다며 호들갑을 떨던 시종장의 말도 떠올랐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나이프의 날 위로 꿈틀거리는 무언가의 모습이 비쳤다.

거대한 검은 몸통에서 뻗어 나와 움직이고 있는 수십 개의 붉은 다리. 지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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