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1)화 (222/237)

“청년, 당신의 이름은 뭐지?” 

“오웬. 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특별히 호명을 허락하겠다.”

“귀히 자란 황자님이라도 되는가? 영광으로 알겠소.”

“저들이 한때는 사람이었다고 했지? 어째서 뱀으로 변하게 된 것인가?”

오웬의 질문을 들은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야 당연히 그리될만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네.”

“그리될만한 짓이라니 무슨 뜻이지?”

“온전히 죽지 않은 이가 이곳에 오면 어찌 되는지 아는가?”

그는 대답 없는 오웬을 바라보며 하늘의 달을 가리켰다.

“이제 곧 달이 지네. 온갖 삿된 것이 몰려나올 것이야. 이야기는 가면서 하도록 하지.”

집이 근처에 있다 설명한 사내가 앞장서 걸었다. 오웬은 그를 따라 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요해진 강에는 검은 물결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나뿐인 달이 그 위를 비춰냈다. 만월이었다.

“귀하신 분, 이곳에는 언제 도착했나.”

“몇 시간…… 아니, 이곳의 시간 개념을 모르니 특정할 수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일곱 개의 달이 걸려있더군.”

“이곳엔 해가 없어. 고요하고 아름다운 사자의 땅이지. 뜨거운 태양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일곱 개의 달이 뜨는 저녁을 낮이라 생각하게. 달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긴긴밤이 찾아온다네.”

지상과는 달리 달의 위치가 변하지 않으며 천공을 가로지르는 일곱 개의 달이 시간 변화를 알릴 뿐이라고 사내는 설명했다.

“사람이 죽으면 이곳, 저승에 오게 되지. 천사의 인도를 받아 배를 타고 저 강물 위를 지나게 된다네.”

사내가 고갯짓으로 강 쪽을 가리켰다. 프리아를 눈앞에서 놓쳤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오웬이 얼굴을 굳혔다.

“그 배는 어디로 가지? 어떻게 탈 수 있어?”

“탈 수 없네. 자네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그걸 어찌 구별하지?”

“명부가 있네. 지상에서 숨이 끊긴 자들의 명단이 적힌. 심지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해도 파수꾼의 감시망을 피할 수 없지.”

“파수꾼? 천사들 말인가.”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온전히 숨이 끊기지 않은 채로 이곳에 오는 자는 그저 침입자일 뿐 그들의 손님이 될 수 없네. 간혹 그들의 귀한 손님을 빼돌려 지상으로 도망가려는 위험한 이들이 있으니 경계를 삼엄히 할 수밖에.”

“성공한 자가 있는가?”

사내의 말을 들은 오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곳에 온 후로 한 명도 보지 못했네. 대개는 괴수들에게 잡아먹히고 개중 살아남았던 자는 파수꾼에게 살해당했지.”

달라진 오웬의 표정을 보며 사내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괴수란 아까 물뱀 같은 것들을 말하는가?”

“물뱀뿐인가. 온갖 기괴한 형상을 한 괴수들이 오웬 자네를 쫓을 걸세.”

“나를 쫓는 이유가 무엇이지? 파수꾼의 사주인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지. 갓 죽은 자의 살과 피는 무척이나 향기롭고 신선하다고 하네. 그러니 아직 온전히 죽지 않은 자의 살점은 어떠하겠나? 수 배는 더 향기롭고 신선하지 않겠는가?”

사내의 말을 들은 오웬이 자신을 유혹하던 물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먹게 해달라 조르던.

“그렇다면 괴수들이 나뿐만 아니라 갓 죽은 자도 노리지 않겠는가?”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프리아의 신변이 위험했다.

“그러니 파수꾼이 지키는 것이지. 그들은 걱정할 것 없네. 위험한 것은 자네야.”

“몸을 지킬 무기가 필요해. 칼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지?”

오웬의 시선이 사내의 칼집으로 향했다.

“이건 내가 지상을 떠나올 때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이네. 누군가 빼돌릴 생각이었다면 무기를 가져오지 그랬나?”

오웬을 놀리는 것처럼 빙그레 웃으며 사내가 말을 이어갔다.

“나를 죽인 형제가 고맙게도 이것은 빼앗아 가지 않았더군. 거의 도착했네. 저 집일세.”

사내가 손을 들어 오두막을 가리켰다. 다른 민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작지만 짐승의 습격은 피할 수 있을 걸세. 때를 잘 맞췄군. 막 달이 졌다네.”

오두막에 들어서자 사내는 걸쇠를 들어 올려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창문 밖은 암흑처럼 어두웠다. 촛불을 켜 탁자 위로 놓으며 사내가 의자를 권했다.

“솜씨는 형편없지만 이거라도 들겠는가?”

벽난로의 불을 지피며 사내가 반쯤 남은 스튜 냄비를 들어 보였다. 음식 냄새를 맡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사내의 말과는 달리 스튜는 꽤 맛이 좋았다. 허기가 식욕을 돋워주었다는 사실도 오웬은 깨닫지 못했다. 태어나 이토록 오래 끼니를 걸러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기가 가시자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책 한 권 찾아볼 수 없었으나 오웬은 그가 상당한 교육을 받은 황족일 것이라는 추측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사냥꾼이나 다름없는 차림새에 말투가 퉁명스러워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으나 대화가 길어지며 깨닫게 된 것이다. 그의 말속에 몇백 년 전 제국에서 쓰였다고 하는 황실 고어가 녹아들어 있음을.

“형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지? 그의 이름은 기억하는가?”

“그 또한 잊었네. 형제가 준 잔을 들었을 뿐인데 눈을 뜨고 나니 이곳에 있었지.”

사내는 회한에 잠긴 눈으로 타들어 가는 촛불 빛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독히 긴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지. 내 아내, 내 자식이 죽어 배를 타는 광경을 지켜보았어. 망각의 강을 건너고 나면 기억을 모두 잃게 된다네.”

레테. 망각의 강. 사내는 쓸쓸히 웃으며 강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나는 물에 빠졌어도 기억을 잃지 않았어. 군나르 그대 역시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감정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프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던 오웬이 부인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우린 초대받지 않았으니까. 강조차 우릴 거부한다네.”

“기억을 되살릴 방법이 전혀 없는가?”

오웬의 절박한 물음을 들은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파수꾼의 우리에서 누군가를 빼돌릴 생각이면 단단히 각오하는 것이 좋을걸세. 생전의 관계가 어떠했든 이번엔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니.”

“그들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어찌 갈 수 있지?”

먼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불이 들끓고 땅이 요동치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하네. 이곳은 버림받은 땅. 한때 지상에 살았던 이들이 겪었던 고난과 시련이 재현된 곳이야. 계절은 뒤엉켜 있고 날씨마저 혹독하지. 슬픔과 공포, 과오와 회한이 자네와 함께할 걸세. 그래도 떠나겠는가?”

프리아에게 다시 생을 안겨줄 수 있다면 어떤 고난을 겪는다 해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오직 프리아와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먼 곳까지 왔다.

오웬의 표정에서 의지를 확인한 사내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길은 하나뿐이네. 강줄기를 따라가는 것. 빙 둘러 가겠지만 끝없이 전진하면 언젠가 그리던 이를 만날 수 있을걸세.”

“프리아를 만난 후에는…….”

과연 이자가 지상으로 돌아가는 방법까지 알고 있을까? 애타는 오웬의 속마음을 짐작하면서도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결정은 자네가 내리는 것이 아니야. 상대가 진심으로 자네와 함께 하고자 할 때 신의 가호가 찾아올 것이네.”

무슨 뜻일까. 프리아가 원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로 들렸다.

불안이 깃든 오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웬 자네는 내 후손이겠지. 내가 이곳에 온 이래 성공한 이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네. 파수꾼을 피해 멀리 도망가야 해. 자네의 혼이 이곳에서 죽는다면 영원히 소멸할 것이야. 둘 중 누구도 돌아갈 수 없어.”

생의 법칙을 거스르고자 저승문을 연 이들은 대부분 괴수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일부 또한 파수꾼의 손에 살해당했다. 자신의 운명을 짐작하지 못하고 연인을 만날 꿈에 부풀어있는 까마득한 후손을 사내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단 여기 누워 눈을 붙이게. 사양할 것 없어. 앞으로 맨땅에 몸을 눕힐 일이 많을 걸세. 그러니 오늘 밤은 내가 양보하도록 하지. 고된 하루를 보내지 않았나.”

사내가 내어준 침상 위로 오웬은 지친 몸을 눕혔다. 황궁의 침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조악한 가구였으나 오웬은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달조차 없는 밤은 천천히 흘러간다. 침상 앞에 선 사내가 허리에 찬 칼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새겨진 글자를 매만지는 그의 손에서 손톱이 길게 자라나 듣기 싫은 소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군나르. 증오스러운 이름이여.

형제들을 죽이고 황권을 공고히 해 천하에 이름을 떨친 그가 노인이 되어 이곳에 떨어졌을 때 사내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저승으로 함께 떨어졌던 형제들은 괴수의 밥이 되어 혼조차 소멸당했다. 긴 세월 몸을 단련하며 한때는 사랑했던 동생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살육을 살육으로 대갚음할 힘을 기르기 위해 그는 무수한 영혼을 집어삼켰다. 초라한 노인이 되어 그의 앞에 떨어진 동생은 괴수가 된 형을 몰라보고 공포에 벌벌 떨었다.

군나르.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그 피 맛을 잊지 못해.

입안에 차오르는 군침을 삼키기 위해 그가 연신 미소를 지었다는 걸 잠든 후손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몸속에 흐르는 피는 내 형제의 것.

맛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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