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0)화 (221/237)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안간힘을 써 수면 위로 솟아오를 때마다 프리아를 태운 배가 멀어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프…… 리아!”

소리치기 위해 벌린 입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짠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힘껏 팔을 뻗어보지만 강물은 유유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계라도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무언가 오웬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같은 자리만을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웬을 옥죄였던 기이한 힘은 배가 온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야 그를 풀어주었다.

“프리아!”

어느새 물결마저 잦아들어 고요해진 강가에 오웬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이토록 무력할 수가. 멀어지는 프리아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 오웬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과 눈이 마주쳤던 짧은 순간. 프리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이곳까지 따라왔냐며 자신을 원망하지는 않았을지.

“프리아…….”

그 이름밖에 말할 수 없는 주술에 걸린 것처럼 오웬은 연인의 이름을 되뇌었다.

너를 만나면. 너를 만난다면. 네 두 눈을 바라보면서 네 입술로 나를 가져가 입 맞추고, 서로 닿지 않은 곳이 없도록 꼭 끌어안아 속삭이고 싶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우리 함께 돌아가자.

이토록 짧은 재회로 끝나리라 생각지 못했다.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프리아를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머리 위를 선회하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다. 긴 자책과 깊은 그리움에 잠겨 오웬은 오래도록 강가를 떠나지 못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떠 있는 달의 개수는 다섯, 사방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 남은 달마저 어둠에 잠기고 나면 암흑 같은 밤이 찾아올 것이다.

오웬은 바위 그늘에서 걸어 나와 나뭇가지 위로 손을 뻗었다. 널어놓은 옷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으나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완연한 밤이 찾아오기 전에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한다. 비바람을 피할 벽과 지붕이 있고 몸을 뉠 침상이 있으며 따뜻한 음식이 제공되는 곳. 최소한의 조건을 떠올리던 오웬이 자조적인 한숨을 흘렸다.

이곳은 황궁이 아니다. 전쟁터까지 따라와 시중을 들던 시종장도 곁에 없었다. 척박한 땅에 구축된 진지에서도 오웬의 천막은 넓고 튼튼했으며 밤을 새워 그를 지키는 호위병이 있었다.

밤낮으로 말을 몰았던 환궁 길에서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황제는 혼자일 수 없다.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오웬은 그를 따라온 기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시종들처럼 세심한 시중은 들지 못했으나 그들은 제 목숨을 내걸고 오웬을 수호했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평생 다른 이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왔다. 수족처럼 부리던 궁인들도, 방패이자 검이 되어 주던 수호 기사도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익숙해 공기처럼 여겨졌던 이들이었다.

지금껏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 자신했으나 오만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철저히 혼자가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불쾌하게 들러붙은 축축한 옷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강바닥을 휘젓고 다닌 옷을 빨지 않고 대충 나무에 걸어 말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프리아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이 막막한 상황 속에서 겨우 젖은 옷에서 끼쳐오는 냄새를 어쩌지 못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저 자신이 오웬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민가를 찾을 수 없다면 동굴이라도 찾아 몸을 숨겨야 한다. 지금껏 걸어온 길은 평원이었으나 산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산으로 향한다면 동굴을 발견할 수도 있겠으나 짐승에게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모든 문명은 강을 끼고 발달한다.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걸어야 목적하는 곳에 닿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산과 강을 사이에 둔 평원 끄트머리에서 오웬은 고민에 휩싸였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 하룻밤의 평안뿐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줄 이의 출현이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프리아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면 어떠한 대가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누구라도 만나야 한다. 마을을 발견하지 못해도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언젠가 돌아오는 배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심한 오웬이 기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달의 개수는 더욱 줄어 둘이 되었다.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오웬은 묵묵히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고 있었다. 여전히 마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되돌아가 배를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오웬은 지친 얼굴로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짐승조차 보이지 않는 땅이 펼쳐져 있다. 지상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다. 혼백뿐인 몸이어도 굶주림은 찾아왔다. 긴 시간 아무것도 섭취하지 못한 몸이 지독한 허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깨끗하지 않은 물이라도 마셔야 한다. 오웬은 물가로 가 손바닥을 구부려 떠낸 강물을 입술로 가져갔다. 희미하게 비린내가 느껴졌으나 꾹 참고 몇 차례 들이마셨다.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돌아섰을 때 그의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불유쾌한 금속성의 웃음소리. 그와 동시에 여러 명이 속삭이는 것처럼 뒤섞인 말소리가 오웬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마셨구나?’


‘마셨어!’


‘알려줄까?’


‘맛있는 냄새가 나.’

놀란 오웬이 뒤돌아섰다. 이번엔 반대쪽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먹고 싶어.’


‘먹게 해줄래?’

눈앞에 보이는 존재는 없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건 오웬 혼자뿐이었다. 환청인가. 갈증을 이기지 못해 마신 강물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찢어질 듯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멍청하긴.’


‘우리를 보고 싶어?’


‘보고 싶구나.’


‘보이게 해줄게.’


‘네 피를 줘.’


‘신선하고 향긋해.’


‘아직 죽지 않았어.’

인간이 아니다. 지상이었다면 유령이라 불렸을 존재들이 오웬을 홀리기 위해 제멋대로 지껄여대고 있었다.

‘네 피를 주렴.’


‘길을 알고 싶지 않아?’


‘알려줄게.’

머릿속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들은 오웬이 원하는 것을 간파해냈다.

‘네 정인을 만나게 해줄게.’


‘프리아를.’


‘프리아가 기다리고 있어.’

잔꾀임을 알면서도 오웬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뭐라고?”

그들은 더는 속삭이지 않았다. 또렷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흘러나와 오웬을 향해 쏟아졌다.

“우리가 데려다줄게.”


“네 피를 줘.”


“만나게 해줄게.”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천사의 형상을 한 아름다운 여인들이 오웬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중 한 여인이 지닌 금빛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긴 오웬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에 닿을 듯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뒤에서 나타난 팔이 오웬을 끌어당겼다.

“정신 차리시오!”

강한 힘에 의해 뒷걸음질 치며 오웬은 그제야 자신이 허리까지 물에 잠겨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보란 말이오!”

천사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물뱀. 장정의 허리만큼이나 두꺼운 몸통을 지닌 물뱀 여러 마리가 강물 위에 떠서 오웬을 향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오웬이 넋을 잃은 사이에 사내가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사내가 휘두른 칼에 뱀의 머리가 떨어지자 시커먼 피가 뿜어나와 수면을 검게 물들였다.

지독한 비린내가 끼친다. 강물에서 느껴지던 비린내의 원인을 깨달은 오웬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뭘 하고 있는 게요? 얼른 올라가지 않고!”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오웬을 재촉했다. 물뱀의 무리는 성난 기세를 보이면서도 다가오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기슭에 주저앉은 오웬에게로 걸어온 사내가 허리춤에 달았던 나무통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드시구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는 이것만 한 것이 없지.”

뚜껑을 열자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몇 모금 마시는 시늉만을 하고 돌려주자 사내는 크게 웃은 후,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의심이 많군. 오래 살겠소.”

“저것들은 다 무엇이지?”

오웬이 강으로 손을 뻗어 물뱀을 가리켰다.

“물뱀 아닌가? 보고도 모르시오?”

“여기서는 뱀도 말을 하는가?”

“한때는 사람이었으니 어렵지 않지. 그리 묻는 걸 보니 온 지 얼마 안 되었나 보군.”

사내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오웬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대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나? 도움에 감사를 표하고자 하네.”

“세월이 오래 흘러 그런 것은 잊어버렸소. 굳이 칭하고 싶다면 군나르라 부르시오.”

불경하게도 전설적인 황제의 이름을 입에 담은 사내가 술통의 뚜껑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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