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한 울음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초의 길이가 짧아지도록 애끓는 심정을 토해내던 시종장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포기하지 못하고 숨이 멎은 황제의 육신을 조심스레 흔들어보았다.
“고정하게. 그러다 자네까지 뒤를 따르고 말겠어.”
시종장의 통곡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물러서 있던 기르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하께서는 어찌 이리도 차분하십니까? 저는 누군가 제 속으로 들어와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것만 같습니다. 못 견디겠어요.”
황제의 음독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던 기르에게 서운한 마음을 담아 시종장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차분하다니 전혀 그렇지 않네. 나 역시 원통하고 참담한 마음 감출 수 없어 누군가에게 원망을 돌리고 싶은 심정이야.”
기르의 말에 가슴이 뜨끔한 시종장이 시선을 넌지시 돌려 회피했다.
“저하를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 프리아 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크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으니까요. 혹시 일이 이렇게 되리라 짐작하고 계셨던 겁니까?”
“몸이 성치 않은 네 살 아이를 데려다 20년을 키웠네. 생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자네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저리 예쁘고 착한 아이에게 너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매번 일러주어야 했던 내 심정이 어떠했을지 자네는 알지 못하네.”
착잡한 심정으로 기르는 말을 이어 나갔다.
“크게 슬퍼하지 않겠다고 프리아와 약속했어. 20년간 이런 날이 찾아오리라 각오하며 살았어. 내가 차분해 보이는가? 아닐세. 그리 긴 세월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부족해. 표현이 다를 뿐 내 심정도 자네와 다르지 않아.”
두 노인의 시선이 각자 자신의 아이에게로 향했다. 고작 스무 해, 스물 몇 해를 산 청춘들을 앞서 보낸 이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저하께서도 약의 효능을 믿으십니까? 폐하께서 정말 프리아 님을 데리고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을까요?”
맥없는 목소리로 시종장이 기르에게 다시 물었다.
“글쎄, 지금은 그리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지. 여신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그 길을 열어준다고 하지 않던가.”
“태어나 지금 이 순간만큼 여신을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 목숨을 거두어가셔도 좋습니다. 폐하와 프리아 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기만 한다면요.”
시종장의 절박한 얼굴을 바라보며 기르가 고개를 저었다.
“초상은 사절이야. 아이들이 돌아온다면 우린 그 곁을 지켜줘야지.”
자네는 정정하니 백 살까지도 문제없이 버틸 수 있을걸세. 덧붙인 기르의 말을 들은 시종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팽팽한 얼굴로 그리 말씀하시면 정말 얄밉단 말입니다. 비법이나 좀 알려주시던지요.”
“나중으로 미루세. 긴 밤이 될 테니. 지금은 우선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내가 떠난 이후부터 말해보세. 어찌 지냈던가?”
동굴을 뒤져 초를 한곳에 모으며 기르가 말했다.
“제 이야기 말입니까? 도중에 끊지나 마십시오.”
모포를 나눠 몸에 두른 두 사람은 침상 주변에 앉아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종장이 기르에게 그가 키워낸 어린 황손의 비범함과 다정함을 들려주면, 기르 역시 시종장에게 천사처럼 무구하던 프리아의 유년기를 들려주었다.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그렇게 울고 웃으며 수십 년 세월을 하룻밤에 녹여냈다.
* * *
악몽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오웬은 막혔던 숨을 황급히 들이마셨다. 이곳은 어디인가. 안개가 자욱하다.
분명, 약을 마셨던 지하동굴은 아니었다. 시종장, 기르의 모습은 물론이고 단단히 손을 얽었던 프리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더듬는 오웬의 손에 축축한 풀이 잡혔다. 그가 잠든 곳은 동굴 속 침상 위였으니 이런 풀이 손에 잡힐 리 만무하다.
오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안개라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 한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낼 수 있을까. 그러나 멈춰있을 수는 없다. 일어선 방향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프리아!”
프리아 역시 이곳에 떨어졌을까. 목청껏 소리쳐보았으나 답을 들려오지 않았다. 오웬은 무작정 걸으며 연인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고통을 호소할 만큼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츰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걸어온 평원이 뒤에 보였다. 저토록 평탄한 땅이라면 개간해 농사를 지을 만했으나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껏 걸어오는 동안 짐승의 울음은커녕 풀벌레 소리 한 번 들려오지 않았다. 무심코 고개를 든 오웬의 눈에 더욱 기이한 풍경이 비쳤다.
하늘 위로 일곱 개의 달이 떠 있다. 손톱달에서 만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지닌 달이 천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얼어붙은 사이, 오웬의 등 뒤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이 있었다. 무언가 풀숲을 헤치는 소리에 오웬이 고개를 들자 그의 눈앞으로 사냥개만 한 크기의 들쥐 무리가 나타났다.
지금껏 나를 따라왔던가. 덤벼든다면 방어할 물건이 없다. 뒷걸음치는 오웬의 발에 돌이 밟혔다. 오웬은 경계하며 천천히 무릎을 구부려 돌을 주웠다. 모여든 쥐들이 오웬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딘가 몸을 피할 곳이 없을까. 두리번거린 그의 눈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쥐들이 따라 올라올 수는 있으나 지금보다는 유리한 고지에 놓일 것이다. 그리 판단한 오웬이 뛰기를 결심했을 때 무리 중 커다란 들쥐 한 마리가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쥐의 이빨이 오웬의 몸에 박히기 직전이었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바닥까지 낙하한 거대 박쥐 무리가 그들을 습격했다. 그들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들쥐의 몸을 움켜잡고 다시 허공을 향해 날았다. 살아남은 들쥐 몇 마리가 풀숲을 향해 뛰었다.
쥐들을 낚아챈 박쥐의 크기는 오웬과 비등했다. 덤벼든다면 큰 상처를 입거나 급기야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모골이 송연해진 오웬이 본능적으로 뛰어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바위 아래 몸을 웅크리고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도 저런 동물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무기가 필요했다.
저승은 죽은 자들의 낙원이 아니었던가. 신관의 말을 귀담아듣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 신의 보살핌 속에서 풍요와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 말했다.
프리아는 어떻게 되었지? 자신과 다르게 몸을 단련하지 못한 그가 이곳에 떨어졌다면 짐승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숨어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프리아를 찾아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지상으로 돌아갈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어떻게든 해내리라 각오했던 그의 결심이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귓전을 길게 울리며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전장에서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소리건만 지금 이 순간은 구원자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짐승이 악기를 연주할 리 없으니 분명 가까운 곳에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오웬은 바위 아래에서 나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출렁이는 물소리도 들려왔다.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강이 가까이 있었다.
숨이 벅찰 정도로 달려간 오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강이었다.
‘이것은 설마 바다인가?’
기슭으로 물결이 밀려와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다. 오웬이 도착하기 전 막 기슭을 떠난 배가 느린 속도로 이동중이었다. 뿔피리 소리가 멀어진다.
배를 놓쳤으니 다음 배를 기다려야 할까. 텅 빈 기슭에 남아있는 이라고는 오웬 자신뿐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떠난 배를 응시하는 오웬의 눈에 뱃전에 서 있는 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대로 된 항구시설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배의 규모는 꽤 큰 편이었다. 무역선이라면 이곳에도 하나 이상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뱃전의 승객들을 올려다보며 한 명씩 짚어가던 오웬의 눈이 한곳에 멈췄다.
하늘거리며 흔들리는 금빛 머리칼.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
오웬이 떠나보낸 연인 프리아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은 꿈일까.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깜빡거리는 푸른 눈동자.
“프리아!”
오웬은 프리아를 부르며 물속에 뛰어들었다. 수위는 빠르게 깊어져 금세 허리까지 차올랐다.
“프리아!”
물 위를 내려다보는 프리아의 눈동자가 혼란에 휩싸였다. 오웬 당신이 왜 이곳에. 네가 왜.
“오웬…….”
난간에 가로막힌 프리아의 손이 절박하게 아래를 향해 뻗었다. 위험하다. 자칫하면 강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오웬!”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위험하니까 그대로 있어. 내가 갈게.
물은 어느새 어깨까지 차올랐다. 이제 걷는 것은 무리였다.
“오웬!”
애타는 목소리를 들으며 오웬의 고개가 위로 향했을 때. 프리아의 얼굴에서 차츰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황하던 눈동자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고 연인을 부르던 입술은 제자리로 돌아가 굳게 다물렸다.
처음 보는 이를 보는 것처럼.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를 바라보듯. 감정 없는 시선은 오웬을 벗어나 창공을 나는 새들에게로 향했다.
“프리아!”
배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머리끝까지 물에 잠긴 오웬은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알 수 없는 힘에 붙들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