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18)화 (219/237)

“정보가 필요해. 약을 마신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책에 저술되어 있지 않더군.” 

“서고의 책을 훼손한 이가 폐하셨군요.”

오웬의 말을 들은 기르가 일부가 찢겨있던 책장을 떠올렸다.

“가치 없는 내용이라 여겼다.”

열에 들떠 기괴하게 반짝이던 조부의 눈동자. 돌연 활기를 되찾은 듯 쉴 새 없이 열리던 입술이 말했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느냐? 지금 당장 나와 함께 서고로 가자꾸나. 짐이 평생에 걸쳐 모은 자료가 그곳에 있다. 나 역시 구술로 전해 듣기만 했을 때는 믿지 아니하였어. 제국을 건국하신 선조께서 여신과 맺은 계약이다. 정당한 전리품이자 권리요, 이 핏속에 새겨진 신성한 약속이란 말이다.’

즉위 초의 혼란을 수습하고 찾아간 서고에서 오웬은 선황이 보물처럼 여겼던 허섭스레기와 마주했다. 치솟아 오르는 경멸로 책을 훼손하던 것도 잠시, 곧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 이후, 조금씩 수소문해 모은 서적들에서 유사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암리타로 연인을, 자식을, 형제를 살려냈다는 선조의 기록은 있으나 수백 년 전의 일이었으니 전설에 불과하다 치부했었다.

진정 피를 타고 흐르는 광증이라도 있는가. 분명 허황되다 비웃었거늘 숨이 끊긴 프리아의 모습을 목격한 순간부터 머릿속에는 그 저주받은 약의 이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죽음을 가장해 저승으로 가 먼저 간 이를 데려오겠다니. 시종장의 말대로 누군가를 살리기보다는 죽이기 위한 약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오웬은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따로 기억나는 것은 없는가? 무엇이라도 좋다.”

“아주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뿐입니다. 그간의 일은 무엇 하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남기며 기르가 대답했다. 자신에게도 공평히 주어지는 기회임을 알았다면 그리 헛되이 써버리지 않았을 것을.

기르의 시선이 다시 그의 소중한 아이에게로 향했다.

‘황제가 너의 뒤를 따르려 한다는구나, 프리아. 지금쯤 어디를 가고 있느냐. 서두르지 말아다오. 넘어져도 이 늙은이는 상처를 닦아줄 수 없어.’

오웬과 기르의 대화를 들으며 번갈아 응시하던 시종장이 답답하단 표정으로 제 가슴을 내리쳤다.

“소신 피 말라 죽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십니까? 폐하, 레온 전하를 생각하십시오. 폐하께서 잘못되시면 어리신 전하께서 황위를 잇게 될 것입니다. 혼란이 불 보듯 명백하지 않습니까?”

질끈 눈을 감은 오웬에게서 침음이 들려왔다. 이때다 싶은 시종장이 설득을 이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야 안정을 되찾은 폐하의 백성을 어여삐 여겨 주십시오. 그들을 위해, 제국의 영광을 위해 이국땅에서 몸소 고초를 겪지 않으셨습니까? 소신은 믿어 의심치 않사옵니다. 폐하께서 저희를 저버리실 리가 없다는 것을요.”

조용히 신음하던 오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대로 살아가라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 프리아를 잃었다고 생각한 지난 몇 달간 오웬은 일어나 연옥을 걷고 잠들면 추락해 지옥을 헤매었다.

오웬은 힘겹게 일상을 소화했으나 돌이켜보면 텅 비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연인의 뒤를 쫓는 것뿐이다. 사는 것이 죽음과 같으니 행여 일을 그르쳐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남은 미련이 없었다.

“폐하…….”

시종장은 바닥에 엎드려 그의 젊은 황제에게 애원했다.

“시간이 약이 될 것이옵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힘이 드시겠지만 곧 지나갈 것입니다. 폐하를 붙잡기 위해 거짓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껏 살아오며 수많은 죽음을 보았지요. 슬픔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이도 보았습니다. 그들이 떠난 후의 삶에 만족했는지 소신은 알지 못하옵니다. 저는 다만 남겨진 이들의 삶을 보았을 뿐입니다.”

조용한 동굴에 울림을 남기며 시종장은 읍소를 이어갔다.

“살다 보면 언젠가 웃을 날이 찾아옵니다. 아픈 기억, 슬픈 마음, 언젠가는 흐려져 흔적으로만 남겠지요. 프리아 님을 잊으시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 많은 추억을 남겨주신 분이 아닙니까. 맘껏 그리워하고 슬픔을 토해내면서 한 발자국만, 한 발씩만 걸어주십시오. 훗날 그 길의 끝에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먼 곳에서 프리아 님도 폐하를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을 삼키며, 지독한 상실감과 싸우면서. 하루를 버티고 또 하루를 살아 생을 이어간다. 죽음이 운명이듯 삶 또한 운명이었다.

“보고 있다면 화를 내겠지. 그 얼굴이 보고 싶어.”

프리아에게로 돌아간 오웬의 시선이 그리운 과거를 더듬었다.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웃어주지 않아도 좋았다. 언젠가 외면했던 기억 속의 눈물로 손을 뻗어보지만 쓸쓸히 허공을 스칠 뿐이다.

폐하……. 시종장은 탄식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열변의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주군이 막 연인을 잃은 어린 청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제 나이의 수 배나 먹은 노회한 대신들을 쥐락펴락하고 불화를 조장해 공국끼리 서로를 더 견제케 하였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도 황제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었다. 첫사랑. 오웬에게 연인은 그의 전부였다.

그러니 시종장이 제아무리 이성적인 설득을 펼친다 한들 먹혀들 리가 없었다. 시종장은 자신 없는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프리아 님께서도 폐하가 위험에 처하기를 바라시지 않을 텐데요. 그리고 그 약은 황실의 피를 이은 자손에게만 효험을 보인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침상에서 내려온 오웬이 먼지 쌓인 책상으로 손을 뻗었다. 상판 아래 달린 서랍을 열자 빛바랜 종이 몇 장과 함께 깃펜과 잉크병이 나타났다.

“못 쓰겠군.”

병에 남은 굳은 잉크를 눌러보던 오웬이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무심결에 상비하던 잉크병의 마개를 열어 황제에게 건넨 시종장은 그가 쓰는 문구를 보고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폐하! 이리 독단적으로 결정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절차에 따라 충분한 논의를 거치신 후에…….”

일필휘지로 황후 책봉 문서를 작성한 오웬이 촛대를 들었다. 촛농은 황제의 서명 옆에 떨어져 동전 크기만 한 자국을 남겼다. 그 위로 오웬이 끼고 있던 반지를 눌러 인장을 찍어내자 순식간에 효력을 지닌 황실 문서가 완성되었다.

남은 종이 위로 깃펜을 올린 오웬이 또 한 장의 문서를 작성했다. 기르하르트와 시종장을 레온의 정식 후견인으로 지정하는 내용이었다.

“반드시 돌아올 생각이니 걱정은 접어두도록.”

어떻게 돌아오시려고요? 저승이 이웃 나라입니까? 

아아아. 탄식하는 시종장에게로 문서를 건넨 오웬이 차가운 침상으로 되돌아갔다.

“저하……, 저하…….”

어떻게 좀 말려 보십시오! 조카 손주께서 전횡을 휘두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애타는 시종장의 얼굴을 외면하며 기르가 손바닥을 맞부딪쳐 보였다.

“흠……. 연설은 감동적이었네.”

“그런 말씀 하실 때입니까?”

프리아가 황후 자리를 반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습은 황제의 몫이었다. 침상으로 고개를 돌린 기르의 시선에 프리아의 손등에 입 맞추는 오웬의 모습이 들어왔다.

“눈앞에 돌아온 이가 있으니 당사자에게 물어봐.”

“예?”

이건 또 무슨 말씀……?

“저하?”

시종장의 혼을 쏙 빼놓은 오웬이 입술 위로 유리병을 가져갔다. 남은 한 손은 프리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정녕, 이 몸을 타고 흐르는 피에 그대와의 계약이 존재한다면.

간절히 청하오니.

여신이여.

지금 이 순간 그대를 소환하고자 한다.

기꺼이 그 저울 위로 내 혼을 내려놓나니.

내 생애 소원은 하나.

길을 열어주소서.

달콤한 액체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까마득한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오웬은 눈을 감았다.

“폐하!”

오웬의 상반신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본 시종장이 놀라 달려왔다.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도 황제는 반응하지 않았다.

“저하! 도와주십시오! 폐하께서 의식이 없으십니다!”

침상으로 다가온 기르가 오웬의 상태를 확인했다. 전신의 맥박은 이미 멎었으며 심장의 고동도 들려오지 않았다. 눈꺼풀을 열어 동공을 확인했으나 역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학적으로 사망에 이르렀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하!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제국의 황제이십니다!”

폐하! 눈을 좀 떠보십시오! 시종장은 쓰러진 황제의 몸을 안고 오열했다.

갓 태어나 울음을 터트리던 순간부터 유모의 품에 안겨 젖을 먹던 모습, 첫 걸음마를 내딛던 황손의 모습이 삽시간에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황제가 왜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내렸는지 시종장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통감할 수 있었다. 이 순간 누군가 그에게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목숨 따위 기꺼이 내놓겠노라고. 그의 어린 황제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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