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의 주인인 황제가 지금까지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이라…. 사용인들의 숙소와 황실 친족들에게 내어준 처소를 제외하면 짐작 가는 곳이 마침 한군데 있었다.
“이 밤에, 지금 말씀이십니까?”
시종장이 마뜩잖은 기색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프리아와 황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요, 원칙적으로 폐하의 밤 방문이 권장되는 곳이기는 하나 지금 이 상황에서요?
“그 눈빛은 뭐지? 어쩐지 불쾌하군.”
공손하던 시종장의 눈에 어린 불손의 기미를 포착한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가시고자 하신다면 제가 어찌 만류할 수 있겠습니까. 소신은 다만…….”
“다만?”
“프리아 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심신을 회복하신 후에 방문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조심스럽게 답한 시종장의 말을 들은 오웬의 표정은 한층 어두워졌다.
“그때는 늦어. 그리고 이미 말했을 텐데. 장례는 치르지 않을 것이다.”
“장례도 치러드리지 않고 다른 후궁을 찾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우리 폐하,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난봉꾼이네.
섭섭함과 일말의 기대가 섞인 묘한 얼굴로 시종장은 오웬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시종장이 자신의 행보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웬은 기가 막히단 표정을 지었다.
“다른 후궁이라고? 내가 지금 후궁전에 가 여인을 품을 것이라 여겼단 말이야?”
“아니시옵니까? 황궁 내에서 폐하께서 지금껏 방문하지 않으신 곳이라고는 그분들의 처소밖에 없지 않사옵니까?”
잘못 짚었구나. 아차 싶은 시종장이 매섭게 노려보는 오웬의 시선을 피해 어색히 고개를 돌렸다.
“흠.”
시선을 돌린 곳에서 시종장은 그를 한심하단 눈길로 바라보는 동년배의 소리 없는 질책과 마주하고 말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십니까? 저는 다만 황실의 번영을 바라는 충직한 궁인으로서 지극히 상식적인 추측을 내놓았을 뿐인데요.
“어떻게 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흔히들 저승이라 하더군. 그곳으로 갈 것이다.”
불유쾌한 오해를 사느니 차라리 소란을 감수하겠다 마음먹은 오웬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저승이요. 저승이라 하시면……예? 저승? 폐하, 지금 저승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시종장은 멍하니 눈꺼풀만 깜박였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요.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가는귀먹은 모양입니다. 외람되오나 폐하,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승으로 간다 하였다. 혹여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때는 장례를 허락하지. 합동 장례를 치르게 되겠군.”
아이고 우리 폐하 농담도 잘하셔.
듣기만 해도 섬뜩한 농담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시종장은 어색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농담 맞지요?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 하였지? 얼음은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좋겠는가?”
시종장에게서 시선을 거둔 오웬이 기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시 프리아 님을 이곳에 모셔야겠습니다.”
여러 장의 모포를 바닥에 펼쳐 누일 공간을 만든 기르가 오웬에게 답했다. 잠시 후, 오웬이 프리아를 안아 바닥으로 내리자 기르가 빈 침대 위로 얼음을 쏟아부었다. 고르게 펼친 얼음 위로 얇은 시트를 올리자 죽은 자를 위한 침상이 완성되었다.
오웬이 프리아를 그 위로 눕히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시종장은 그가 취한 다음 행동에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폐하! 몸이 상하십니다!”
“차갑긴 하군.”
침상에 올라 프리아의 옆에 자리 잡은 오웬은 놀라 모포를 건네는 시종장에게 손을 저어 거부 의사를 보였다.
“상태를 보아 추가 보충하겠으나 가능한 빨리 돌아오시기를 권합니다.”
“노력하지.”
기르의 말에 답한 오웬이 유리병을 다시 꺼내 들었다. 입구를 감싼 밀랍에는 황가의 문장이 찍혀있었다.
‘본 적이 있는 물건인데 어디서 보았더라.’
눈에 익은 유리병의 출현에 시종장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나갔다.
“폐하, 주십시오. 소신이 열어드리겠습니다.”
“내가 하겠다.”
오웬의 거부에 시종장은 늘 소지하고 다니는 나이프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다양한 도구가 장착된 나이프에는 작은 스크류가 달려 있었다.
밀랍을 뚫고 들어간 스크류에 코르크 마개가 뽑혀 나왔다. 그와 동시에 시종장의 뇌리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폐하! 혹시 그 물건은…, 암리타가 아닙니까? 그걸 왜 지금 개봉하시는……”
말을 다 끝맺지 못한 시종장이 경악한 얼굴로 다시 외쳤다.
“기, 기르 저하를 제거하려 하심입니까? 아니 되옵니다! 기르 저하께서는 사생아가 아니십니다. 적법한 황실의 일원이세요. 폐하의 종조부란 말씀입니다.”
“역시 시종장은 알고 있었군.”
두 사람 사이에 이미 대화가 오간 것을 알지 못하는 시종장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오웬 앞에 엎드려 호소했다.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감히 폐하를 속이려 들었습니다. 제 눈으로 보고도 한동안 믿지 못했던 터라 폐하께 혼란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기르 저하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황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의심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죽이고 싶을 때가 있지만 오늘 그리하지는 않을 거야.”
시큰둥한 오웬의 답에 시종장의 어깨가 들썩였다.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더는 그 끔찍한 물건으로 인해 혈족 간에 피의 다툼이 벌어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곳에 가두시고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서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르에게로 다가간 시종장이 오열을 터트렸다.
“저하, 모든 것이 다 제 불찰이옵니다. 저하의 식사만은 제가 손수 챙길 것이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도 언젠가는 노여움을 푸실 것이옵니다.”
“내가 마실 것이다.”
기가 찬 오웬의 말에 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다는군. 직접 나서고 싶었지만 이미 섭취한 경험이 있으니 내게는 약효가 나타나지 않을걸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험이라니요? 섭취하셨다고요? 설마 선황께서! 선황께서 진정 저하를…….”
“형님께서 내게 사용할 마음이 있으셨던가? 그렇다면 성공이군. 결과적으로 소원을 들어드린 셈이야.”
“아이고, 저는 저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친이 가장 아끼던 후궁의 몸에서 난 이복동생을 견제하기는 했으나 선황은 그의 몸에 위해를 가하진 않았다. 가끔 선황이 서늘한 눈빛으로 유리병을 매만지는 밤이면 시종장 홀로 공포에 떨었을 뿐이었다. 선황이 그에게 약을 사용했다면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폐하, 이리 주십시오. 무서운 물건입니다. 폐하의 자리를 위협하는 간악한 놈들이 나타난다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한 놈도 남김없이 처단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시종장은 오웬에게서 유리병을 받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조용히 그가 벌이는 촌극을 지켜보던 오웬이 입술을 열었다.
“이제 알겠군. 자랑스러운 조상들께선 이 약을 그런 용도로 애용하셨던가.”
기르가 프리아를 자식처럼 아끼며 키웠듯이 시종장 또한 오웬을 제 손주로 여기며 살뜰히 키워냈다. 어린아이 손에 들린 칼붙이를 바라보듯 시종장은 애타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생명수로 알려진 암리타의 숨겨진 효능은 암살이었다. 약을 복용한 자는 순식간에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되며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독약과는 다르게 시신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아 원인을 알 수 없는 돌연사로 판정될 뿐이다.
오랜 세월 황실에서 암리타는 뒤탈 없이 형제를, 자식을, 아비를 제거하는 맹독으로 사용되었다. 황실의 피를 이은자에게만 그 효과가 발휘되었으며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일생 중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약물이 불사의 약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이유는 일정 기간 보장되는 죽음의 유예에 있었다. 육신이 죽었다고 판단한 혼백은 저승으로 향하게 되지만 명부에 등록되지 않았기에 회생의 기회가 주어진다.
온전히 숨이 멎기 전에 돌아올 수 있다면 생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 짧은 유예 기간을 이용해 먼저 세상을 떠난 이의 혼을 찾아 함께 돌아온다면 두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다.
조건은 하나, 지상의 육신이 부패하기 전까지 돌아오는 것이다. 약을 마시고 저승으로 떠난 이가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부분은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영원히 저승을 떠도는 망자가 되고 말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요물이란 말입니까. 생명수니 뭐니 하는 것은 그저 위장일 뿐이지요. 이건 사람을 살리는 약이 아닙니다, 죽이는 약이에요. 그 약을 마신 이중 살아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암살약으로 빈번히 쓰였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오웬 역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오웬은 고소를 머금으며 차가운 어느 겨울밤의 일을 떠올렸다.
‘누구에게도 내가 사망했다 알려서는 안 된다. 짐은 반드시 부활할 것이니. 내 숨이 끊기고 나면 이 약을 마시고 나를 찾아오거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야. 능히 해내고말고.’
조부이기 앞서 수십 년간 제국을 통치해온 황제였기에 선황으로서 후계에게 남길 중한 유언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러나 조부를 찾은 오웬에게 들려온 말은 망령된 노인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허황된 전설을 믿고 형을 살려 달라 조부에게 애원했던 어린 날의 자신이 한없이 우습고 비참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그 밤으로부터 수많은 날이 흐른 지금, 오웬은 그때의 노인과 같은 심정으로 아니 그보다 더 절박한 마음으로 유리병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