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16)화 (217/237)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소신은 폐하의 의중을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정하신다 한들 돌아가신 프리아 님께서 살아 돌아오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장례식 준비를 서둘러야 할 상황에 황후 책봉이라니…….” 

푸념을 늘어놓던 시종장이 기르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후궁의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황제에 비해 침착한 태도를 보인 까닭에 자식같이 아끼던 이를 잃은 그의 슬픔 역시 상당하리란 사실을 그만 깜박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녕 말리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여전히 대답 없는 기르를 향해 시종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리면 듣기는 하겠는가?”

눈감은 이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던 그의 시선이 이제야 시종장에게로 향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팔이의 말 보다는 시종장의 말을 신뢰할걸세. 자네가 나서지 그래?”

기르의 말을 들은 시종장이 펄쩍 뛰었다.

“제가 무슨 수로 폐하를 말리겠습니까?”

“나도 별다른 수는 갖고 있지 않네만.”

“그, 그래도 친척 어르신이라 알고 계시니 이번 기회에 손위의 위엄을 보여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시종장의 말을 들은 기르가 의문을 표했다.

“내 정체를 밝혔단 말인가? 아까는 누가 믿겠냐며 그리 만류하고서?”

“숙부로 알고 계십니다. 저하의 아드님이라 믿고 계시지요. 그런 일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외유를 나간 왕족이 필부에게 반하여 혼외자를 생산하는…….”

혼인도 하기 전에 사생아부터 생산한 난봉꾼이 되어버린 기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조차 없는 사생아 숙부의 말을 잘도 듣겠구만. 쓸데없는 짓을 했어.”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어찌나 집요하게 물어오시던지.”

제 탓을 하지 마시고 수상쩍게 행동하신 본인을 돌아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프리아 님을 자식이라 하셔도 보는 이들에겐 부모자식간처럼 보이지 않으니 우리 폐하께서 얼마나 저하가 거슬리셨겠어요?

억울한 본심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입속으로 웅얼거리고 있던 시종장의 귀에 익숙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폐하!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반갑게 맞이하는 시종장을 무시하며 실내로 돌아온 오웬은 프리아의 상태부터 살폈다. 생명의 징후가 없는 망자의 손을 오웬은 다시 오래도록 잡고 있었다. 애틋한 모습에 시종장은 눈시울을 붉혔으나 기르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만 떠오를 뿐이다.

“날이 어둡습니다. 어디로 옮길 생각이십니까?”

오웬을 재촉하듯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웬은 시트로 프리아를 감싸 다시 품에 안은 후 방향을 틀었다.

“나는 한동안 이곳에서 나오지 않는 걸로 해두지. 지하로 가겠다.”

“지하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폐하?”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은 시종장에게 고갯짓을 하며 오웬이 지시했다.

“들고 따라와.”

공개된 곳까지는 시종들의 힘을 빌렸으나 그들을 숨겨진 내실로 들일 수는 없었다. 여러 차례 왕복하며 얼음을 옮겨다 놓았던 시종장이 다시 떨어진 명에 난색을 표했다. 저걸 어찌 또 소신 혼자 옮기란 말씀이십니까. 너무 하십니다, 폐하.

“우선 일부만 옮기도록 하지.”

얼음을 준비하라 일렀던 장본인 기르가 시종장보다 앞서 양동이에 손을 뻗었다. 힘든 기색 없이 양손에 손잡이를 거머쥔 그를 따라가며 시종장이 시샘을 늘어놓았다. 거죽뿐 아니라 힘도 여전하신가 봅니다. 정녕 비법을 알려주지 않으실 셈입니까? 세상 혼자 젊게 사니 좋으시냐고요.

거대한 개미굴.

본궁 지하와 연결된 여러 갈래의 통로를 마주한 기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중 한 방향의 통로 바닥이 유독 매끄럽게 다져있는 것을 발견한 기르에게 시종장이 다가와 귓말을 남겼다.

“백조궁으로 이어진 길입니다. 두 분께서 틈만 나면 왔다 갔다, 땅이 닳을 지경이었지요.”

그랬던 거군.

황제가 오지 않은 밤에도 다음날이면 여전히 피곤한 기색을 보이던 프리아의 모습을 떠올린 기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외부인인 자신에게 서슴없이 비밀통로를 공개한 황제를 향해 기르가 질문을 던졌다. 백조궁 방향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냉정하게 답했다.

“간자라 판단되면 죽일 것이다.”

흠칫 몸을 떤 시종장이 들고 있던 양동이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 손엔 등불, 다른 손엔 얼음을 든 까닭에 덥다, 춥다 정신이 없었다.

한참 걸어 나간 끝에 그들은 걸쇠가 걸린 큰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한기가 몰려왔다.

“동굴이군요.”

지하 통로보다 한층 낮은 온도에 감탄하며 기르가 물기 맺힌 벽을 쓰다듬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은신처로 쓰였던 모양인지 간단한 세간도 갖춰져 있었다.

“차마 죽일 수 없는 누군가를 가두는 데 쓰였겠지.”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프리아를 내려놓으며 오웬이 말을 받았다.

“그런 이가 있으십니까?”

“아직은 없어.”

의미심장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종장이 양동이를 내려놓고 제 팔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모골이 송연한 것이 누군가의 원혼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

“얼음은 더 가져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오히려 온도가 너무 낮아 고뿔이 염려되오니 시종장께서는 담요를 가져다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르의 말을 듣고 반색한 시종장이 담요를 가져오기 위해 일어섰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오웬이 기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마치 알고 있는 것 같군.”

답이 들려오지 않자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정체는 뭐지? 그렇게 완벽한 황실 예법을 갖췄으면서 감히 외부인이라 주장할텐가.”

오웬은 가끔 그에게서 조부를 겹쳐보곤 했다. 시종장의 말에 따르면 종조부가 외부에서 낳은 아들이라 하니 외모의 유사성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기이하게 느끼는 것은 단순히 외모가 닮아서만이 아니었다.

황실의 직계로 태어나 후계자로 교육받고 자란 이들에게서만 느껴지는 황가 특유의 기품과 격조 높은 우아함, 그리고 오만함이 눈앞에 있는 이에게도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대의 부친이 황가의 일원이라 해도 외부에서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그대는 황궁을 경외시하지 않아. 심지어 날 손아래 보듯 불경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하지.”

“그렇게 보였습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황실 후계자로 교육받으며 자란 이만이 동류를 알아볼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질손의 지적은 과장된 면이 있었다.

후계자로 교육받았기엔 후궁 소생이라 그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황후의 소생만이 전하라 불렸으며 그에게는 저하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그럼에도 형은 그가 부친이 가장 사랑하던 후궁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경계심을 드러내곤 했다.

“그대는 혹시 조부의 혼외자가 아닌가? 별궁에서 비밀리에 황실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겠지. 황태자를 미덥지 않게 여긴 조부의 지시였을 거야.”

“생명수는 찾아오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 돌아오자 오웬의 안광이 한층 서늘하게 반짝였다.

“앞선 질문부터 답하죠. 형님이 난봉꾼이기는 했으나 내 아비가 될 정도로 천륜을 거스르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형님이란 폐하의 조부를 뜻합니다. 그러니 제 부친은 폐하의 고조부가 되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지? 고조부께선 이미 수십 년 전에 돌아가셨어. 유령의 아이라도 잉태한 것이 아니라면 그대의 부친이 될 수 없네.”

고조부의 사망으로 황위에 오른 조부의 통치 기간은 50년을 넘었다. 설령 유복자라 해도 고조부의 소생이 되기 위해선 나이 50세를 넘겨야 한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이는 결코 쉰을 넘긴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서른 중반으로 보일뿐.

“저는 곧 예순여섯이 됩니다. 나이를 잊고 산지 오래였습니다만 시종장이 일러주더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경청하던 오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자가 지금 나를 능멸하려 함인가.

“서른다섯이 되던 해, 어떤 약물에 노출된 이후 노화를 피해 가는 몸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하였고 그저 형의 노여움을 피해 잠시 몸을 숨기자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형이 무척이나 아끼는 물건을 훔친 데다 별궁의 지붕까지 날려버렸으니까요.”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성분이 궁금해 약간 덜어왔을 뿐이지만 허락 없이 손댔으니 불호령이 내리리라 생각했습니다. 나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십수 년이 지난 후입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방랑하던 어느 날, 신세를 지게 된 대공가에서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침대에 놓인 프리아의 얼굴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기르가 말을 이었다.

“자식처럼 길렀던 아이가 후궁이 되어 먼 곳으로 떠났다 하더군요. 수십 년 만에 나고 자란 황궁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폐하가 아시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제 이름은 기르하르트, 폐하의 종조부이긴 하나 혈연을 내세우고 싶진 않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에 황실과 연을 끊은 사람입니다.”

두 눈 가득 소용돌이치는 혼란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오웬이 그에게 질문했다.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지? 불로에 성공한 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의도한 것이 아니니 성공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몸으로 살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저조차도 확신할 수 없기도 했고요.”

“약물 노출이 원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무슨 약물이지?”

“흔히들 불사의 약이라 부르지요. 실재할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미 한번 죽었으며 살아난 자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미 한번 죽었다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오웬이 기르의 말을 되풀이했다. 오웬이 품에서 꺼낸 작은 약병을 바라보며 기르가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암리타. 왜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요? 먼 이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생명수를 일컫는 말입니다. 황가의 선조는 그 생명수를 얻어온 걸까요? 아니면 이름을 빌어와 영험함을 더하려 했을까요?”

이름 따위 무엇이든 상관없다. 오웬에게 절실한 것은 이 약이 실제로 프리아를 되살릴 수 있는가 하는 효능이지 이름의 기원 따위가 아니었다.

“그대가 암리타를 마셨다고?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지? 누군가 그 약을 같이 마신 사람이 있었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어?”

오웬의 급박한 물음에 기르가 대답했다.

“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동물들도 함께였으나 그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지요. 실제로는 마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허황된 전설을 신봉하는 형을 비웃어줄 의도였습니다. 기껏해야 맹물이거나 향유 몇 방울 들어가 있을 거라 판단하고 증류 실험을 통해 성분을 밝히려 했습니다. 그 결과 약 성분이 공기에 섞여 호흡으로 스며들었던 것이지요.”

그때 발생한 폭발음을 떠올리며 기르가 동굴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폭발의 원인은 그가 부주의하게 다른 화학용품에 있었다.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험실의 동물들은 모두 죽어 있었지만 작은 개체들이었으니 폭발의 충격을 이기지 못했던 탓이리라 여겼습니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실은 그때 모두 사망했으며 저만 살아 돌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기절이라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남은 자의 숙명은 오직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뿐이리라. 그 당연한 진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 이들에게서 숱한 전설과 영약과 사술이 태어났다.

황가에 전해 내려오는 암리타라 이름 붙여진 정체 모를 약물 또한 그 거짓된 부산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왔다. 젊은 날,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대의 말은 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 누군가 그대를 살리기 위해 뒤를 따른 이가 아무도 없었단 말인가? 어떻게 홀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지?”

오웬의 질문에 답하며 기르는 약병을 채운 액체의 양을 눈여겨보았다.

“정량을 복용해야 원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더군요. 작은 동물들에게는 충분한 양이었으나 저에게는 부족했던 탓에 저승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 것 같습니다.”

산중 노인에게서 받은 책에 숨겨져 있던 글을 바탕으로 그가 추론해낸 결론이었다.

“암리타는 황제로 즉위한 자만이 쓸 수 있는 영약으로 알고 있다. 황자 신분이었던 그대가 어찌 사사로이 사용할 수 있었던 거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기르를 쏘아보던 오웬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황제의 일생 중 단 한 번. 황후를 포함한 직계혈족에게만 쓸 수 있다는 영약이라고 알려져 있죠. 즉위하지 않았어도 황실의 피를 이은 사람에게는 그 약효가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서가 숨을 거두었던 그때, 조부가 약을 내어주기만 했다면 되살려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는 뜻이 된다. 자손들의 죽음을 외면하던 조부는 자신의 죽음이 목전에 다가오고 나서야 영약의 힘을 빌리기 위해 오웬의 손을 붙잡았다.

손목을 휘어감던 노인의 강한 아귀힘이 떠올라 오웬은 불쾌한 시선으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론일 뿐입니다. 젊은 날 경험한 것은 그 약과 관련이 없으며 저의 불로 역시 다른 원인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죠.”

‘실패한 자에게 다시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죽음을 되돌리기 위해선 다른 목숨이 필요하다.’ 숨겨져 있던 문구의 일부를 떠올리며 기르가 쓸쓸하게 덧붙였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직접 약을 마셔 프리아를 살려내고 싶었다.

황제가, 저 치기 어린 젊은 사내가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기르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황제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후의 상황은 그대에게 맡기겠어. 그대가 정녕 나의 종조부라면 아이 한 명 더 키우는 것쯤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레온 전하를 말씀하시는군요. 어찌 노인 둘에게 황자를 맡기려 하십니까.”

돌아오지 못할 상황을 가정한 오웬의 말을 기르가 받아쳤다.

“시종장은 응석을 받아주기만 할 테니 엄격한 스승이 필요해.”

“저야말로 엄격한 스승이 못 됩니다. 그저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그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뒤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시종장이 나타났다.

“폐하, 이 밤에 또 어디를 가시려고요?”

모포 4장을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온 시종장이 오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건네는 모포를 받으며 오웬이 대답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

지금부터 오웬이 가고자 하는 곳을 그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