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12)화 (213/237)

황제가 돌아왔다. 

회의를 중단하고 급하게 황궁을 빠져나갔던 황제가 그날 오후, 기사들과 함께 되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외출의 이유를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던 궁인들은 주인의 귀환에 안심하며 서둘러 자세를 낮춰 예를 표했다.

그들 중 호기롭게 곁눈질하던 몇몇의 시선이 황제의 품, 정확히는 그 품에 안긴 누군가의 윤곽에 가 닿았다. 불경하게도 황제의 망토를 둘러써 얼굴을 숨긴 인물은 바닥에 발을 딛는 대신 단단한 두 팔에 안겨 황궁의 문턱을 넘었다.

누구일까. 어떤 여인일까. 어쩌면 여인이 아닐지도 모르지. 총애를 받았던 사내 후궁만큼이나 아름다운 연동을 발견하셨을지도 모를 일.

속삭임은 이윽고 웅성거림으로 변해 궁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황제께서 여인을 품으셨다. 거리의 예인에 마음을 빼앗겨 금화로 값을 치르고 품에 안아 데려왔다더라. 아니다, 이미 남편이 있는 귀족 부인이라 얼굴을 가렸고 조만간 이혼 절차를 밟아 후궁으로 들이신다더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찌 그런 망측한 헛소문을 입에 담는 것이야? 회초리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백조궁의 수석 시녀 유디스의 분노가 어린 시녀들에게로 떨어졌다.

“유디스 님! 그것이 아니오라 저희는 다만…….”

“새 후궁이 들어와 폐하께서 이대로 프리아 님을 잊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변명하듯 불안한 속내를 털어놓은 어린 시녀의 눈동자에는 초조가 깃들어 있었다. 염려하고 있으나 누구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던 금기를 입에 올린 시녀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응접실의 침묵을 깨뜨리며 괘종시계가 오후 5시가 되었음을 알렸다.

봄을 맞은 백조궁의 풍경은 작년 가을과 다를 것이 없었다. 호수는 여전히 고요하고 숲은 무성했으며 밤이면 밝은 달이 청색 지붕 위로 떠올랐다. 가을꽃이 진 자리마다 봄꽃이 피어났으며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워 보는 이의 시선을 곳곳마다 잡아끌었다. 

일상 또한 변함없었다. 다른 궁에 배속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궁인들은 황제의 명을 받고 돌아와 업무에 복귀했다. 그들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어나 궁의 안팎을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그들보다 기상이 늦은 시녀들은 각자 몸단장을 한 후, 후궁의 수발을 들기 위해 응접실로 모였다. 황제에게 가장 사랑받는 후궁의 처소답게 호화로우면서도 쓸모 있는 물건들이 적재적소에 놓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수를 놓고 다른 누군가는 차를 마셨으며 어떤 이들은 공방의 카탈로그를 펼쳐 들었다. 긴 하루를 보내기 위해 그들은 수시로 담소를 나누었는데 화젯거리가 동이 날 때면 창밖으로 눈을 돌려 눈부신 봄을 찬양하곤 했다. 밤이 되어 황제가 찾아온 후에야 그들은 후궁의 응접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구슬픈 유령놀이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후궁을 향한 황제의 추모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던 이들의 마음속에도 차츰 불안이 생겨났다.

죽은 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황제가 백조궁 주인에게 각별했다고는 하나 그는 이미 떠난 사람이었다. 황제의 품에 안겨줄 이가 더는 이 백조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사내 후궁을 품었던 것처럼 다른 이를 마음에 두게 된다면 이 애달픈 추모 역시 순식간에 끝나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되찾은 안정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그들은 본궁에서 들려온 정체 모를 여인 소식에 일제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새 후궁에게 비극으로 끝난 옛 연인의 처소를 하사할 리 만무하다. 백조궁을 채운 궁인들은 황제에게 있어 그저 마음 아픈 추억을 되살리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잊으실 리가 있겠느냐? 그런 쓸데없는 말을 떠들 시간이 있으면 자수나 더 놓도록 해!”

이런 철없는 것들. 그따위 뜬 소문에 휘둘리다니. 폐하께서 어찌 프리아 님을 잊으신단 말이야? 

화를 참지 못한 유디스가 잡고 있던 수틀을 거칠게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그 누가 물어본다고 하여도 단언할 수 있다. 두 분은 서로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처럼, 프리아 님 역시 어딘가에서 폐하를 그리워하고 계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궁은 지난겨울 틀림없이 사망했으며,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황제가 고집을 부리고 있을 뿐이다. 모두 입을 모아 쑥덕였지만 유디스는 듣지 않았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그것이 죄가 되는가? 내가 이곳에서 프리아 님을 기다리고 있으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해?

프리아님의 곁에 있었더라면. 자신이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프리아님은 자취를 감추시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유폐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더라도 파수꾼처럼 곁을 지켜 건강한 모습으로 폐하와 다시 만나게 해드렸을 것이야.

“여인이라니, 설마 폐하께서 그러실 리가 있겠어요? 소문이 잘못 퍼진 것이겠지요.”

“사냥하러 다녀오신 게 아닐까요? 폐하께서 커다란 짐승을 잡으신 기쁨에 직접 떠안고 돌아오셨을지도 모릅니다.”

나이 든 시녀 두엇이 유디스의 심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으나 앳된 시녀가 눈치 없이 다시 입을 열고 말았다.

“폐하께서 짐승을 왜 손수 옮기시겠어요? 아리따운 여인이라면 모를까.”

“저도 들었습니다. 분명 여인이라고. 망토로 얼굴을 가렸지만, 폐하께서는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셨다고 해요. 소중히 품에 안으신 채로 침실로 들어가셨다지 뭡니까?”

“네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잖느냐? 궁에서는 아침에 기침만 해도 저녁이면 부고로 돌아오는 법이라고 내 진작 일러주지 않았어?”

표정이 굳어가는 유디스 대신 앞으로 나선 시녀들이 철모르는 소녀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헛소문일 것입니다. 여인이건 사내이건 간에 폐하께서 마음에 두셨다면 본궁 시녀들에게 몸단장부터 거들게 하셨겠지요. 그리하셨다면 소식이 여태 아니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본궁 시녀들과 친분이 두터운 한 시녀의 말에 유디스가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새 후궁이 될 여인이 들어왔다면 시종장께서 백작부인들부터 불러 모으셨을 터. 이토록 조용할 리가 없지. 설령 부인들을 데려오지 않았더라도 본궁 시녀들이 총출동해 단장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본궁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벌써 소문이 한 바퀴를 돌아 여인의 이름은 물론이오, 가문의 이력까지 밝혀지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폐하의 품에 안겨 황궁 문을 넘었다고? 프리아 님이 돌아오셨으면 모를까, 다른 누가 감히 폐하의 품에 안겨 궁을 오갈 수 있겠느냔 말이다.

작년 가을, 본궁에서 잠이 든 후궁을 안아 들고서 백조궁을 찾았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린 유디스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찾으셨다면 응당 하실 법한 행동이지 않은가? 다시는 홀로 떠나지 못하게 꽁꽁 싸매어 침전으로 데려가셨을테지. 지난여름 그리하셨던 것처럼 침실에 가두실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독차지하고 싶으실 거야.

유디스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프리아 님이 돌아오신다면 달려 나가 품에 안긴 후, 그간의 행적을 추궁하는 단독 심문을 하루 이상 가질 생각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무얼 했으며 무엇을 먹고 지내셨을까. 제가 그립지는 않았냐며 저는 무척이나 그리워했다고,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늘 기도하며 잠들었다고 투정하고 싶었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찾으신 거라면.

품에 안겨 돌아온 이가 프리아 님이 맞다면.

입을 다문 채 골똘히 생각하던 유디스가 앉았던 자리에서 용수철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복도를 내달리는 수석 시녀의 행동에 놀란 시녀들이 급히 뒤를 따랐으나 그녀들이 1층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이미 마차가 떠난 후였다.

“유디스 님!”

목청껏 소리쳐 불렀으나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떠나버린 유디스 대신 주변을 지키고 있던 시종 하나가 그녀들에게 잡혀 거센 추궁을 받았다. 그에게서 수석 시녀가 본궁으로 떠났다는 말을 들은 그녀들의 얼굴은 곧 사색이 되고 말았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유디스 님께서 본궁에 쳐들어가버리셨어!

마차가 본궁에 도착했다. 모름지기 숙녀라면 신사가 에스코트해줄 때까지 얌전히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법이었으나 유디스는 그리하지 않았다. 시종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갔던 시종은 예고 없이 바깥으로 뻗어 나온 발에 놀라 움찔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칠게 열린 마차 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종달새처럼 몸집이 작고 눈빛이 영민해 보이는 귀족 소녀였다.

“비켜요!”

박력 있게 소리를 지른 유디스가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본궁의 입구로 향했다. 백조궁의 시녀들이 그녀 앞에서 이런 행동을 보였다면 채신머리없다며 호되게 혼냈을 것이나 지금은 교양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폐하가 계신 곳이다. 어느 궁 아이이기에 이런 경거망동을 하는 게야?”

진전도 잠시, 복도를 내달리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 놀란 본궁 시녀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백조궁 수석 시녀 유디스입니다. 폐하를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수석 시녀께서 무슨 일로 폐하를 뵙길 원하시는지요?”

중년 여인은 태도를 정중하게 바꾸었으나 고압적인 눈빛만은 거두지 않았다.

“폐하께서 동반하여 돌아오신 분이 누구신지 알고 싶습니다.”

아, 그런 이유에서군.

간절한 눈빛에 담긴 호소를 외면하며 중년 여인은 입술 위로 호선을 그려냈다. 황제가 품에 안고 돌아온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녀 역시도 아는 것이 없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만인의 주목을 받는 황제가 정체 모를 이를 품에 안고 돌아왔으니 궁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그 또한 기이하다 할 일이었다.

“폐하께서는 현재 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동반하신 분이 계시다니 금시초문이군요. 혹, 수석 시녀님께서 말씀하시는 이가 시종장님은 아니시겠지요?”

“시종장님을 찾는 것이 아니오라…….”

여인의 반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유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조궁의 수석 시녀라 말씀 전해주시면 분명 윤허하여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일 리 없다. 유디스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프리아 님이야. 프리아 님이 돌아오셨어. 확신한 순간부터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분명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찾아 함께 돌아오셨을 것이다. 그리고 프리아 님의 곁에는 내가 있어야만 해.

“돌아가 계시지요. 말씀은 전하겠으나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수석 시녀의 신분으로 시녀장도 아닌 일개 시녀에게 제지당한 것이 억울했으나 허락을 받지 않은 이상 유디스에게는 황제의 개인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권리가 없었다.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는 중년 시녀를 피해 유디스는 1층으로 되돌아갔다.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폐하를 만나 뵐 때까지, 프리아 님과 다시 만나게 될 그 순간까지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수호기사를 대동한 황제가 중앙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유디스가 저도 모르게 그 앞으로 튀어 나갔다.

“폐하!”

몇 걸음 떼지 못하고 붙잡힌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맹수처럼 사나운 기사의 눈길이 유디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백조궁 아이가 아니더냐?”

황제의 뒤를 따라오던 시종장이 유디스를 발견하고 알은척을 했다. 주변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거침없이 전진하던 황제 역시 그 말을 듣고 멈춰 섰다. 황제의 눈짓을 받은 기사는 유디스를 풀어주었으나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폐하, 프리아 님께서!”

스스로 내뱉은 말이 놀라워 잠시 말을 멈췄던 유디스가 울음과도 같은 질문을 다시 토해냈다.

“프리아 님께서 돌아오신 거죠? 프리아 님께서 돌아오신 게……,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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