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10)화 (211/237)

“찾으시던 이는 만나셨소?” 

기르를 알아본 주민이 반갑게 말을 건넸다. 그는 프리아가 몸을 숨기고 있을 만한 빈집을 찾기 위해 기르가 마을을 수소문하던 중 얼굴을 익히게 된 주민이었다.

아비가 곁에 있었군. 안심한 기르가 주민의 말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광장에 가 물어보시오. 빵집 주인이 마을 일이라면 아주 빠삭하게 알고 있다오.”

“감사합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기르가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가는 것을 본 주민이 다시 땅으로 손을 뻗어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릴리아나야, 네 집은 어디…….”

아이를 데려다주기 위해 집이 어느 쪽에 있는지 물으려 했던 주민의 말이 끊겼다. 어느새 아이의 모습이 사라져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우거진 나무 덤불뿐이었다. 오라비가 데려갔나 보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주민이 시선을 다시 땅으로 돌렸다.

“집은 알려 주면 안 돼. 비밀이야.”

벤의 당부를 떠올린 릴리아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지. 아이는 작은 발을 부지런히 놀려 깊은 숲으로 향했다.

남매가 사는 오두막은 깊은 산중에 숨겨져 있어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도를 그려 준다 하여도 산길에 익숙한 자가 아니라면 같은 자리를 뱅뱅 돌다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아이는 발을 깡총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벤? 한스?”

기대를 품고 말을 걸어 보았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직도 안 왔어. 토라진 릴리아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침대로 향했다.

“피아, 아직도 자?”

작은 손이 투정하듯 누워 잠든 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에휴, 아이가 제 오빠를 흉내 내 연거푸 한숨을 토해냈을 때 프리아의 눈동자가 열려 그 모습을 눈에 담아냈다.

눈앞이 환하다. 요즘 들어 부쩍 떨어진 시력으로 인해 사물이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거나 아예 어두워 칠흑 같은 밤으로 느껴지기 일쑤였는데 어찌 된 일일까. 제 눈에 보이는 선명한 시야를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프리아가 수차례 눈을 깜박였다.

“릴리아나?”

“릴리 심심했어.”

투정을 받아 줄 이가 일어나자 서러움이 샘솟은 릴리아나가 입술을 내밀며 울먹거렸다.

“심심했어? 벤은? 혼자 놀고 있었어?”

“벤 없어. 한스도 없어. 마을에 갔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며 프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구나. 늦게 일어나서 미안해.”

“괜찮아. 이거 줄게. 피아 가져.”

아이가 손을 내밀어 활짝 핀 꽃가지 하나를 프리아에게 건넸다. 진분홍 꽃잎이 풍성하게 피어 있는 모습에 프리아가 감탄을 터트렸다.

“고마워, 릴리아나. 정말 예쁘다. 벌써 이렇게 피었구나.”

“맛있어. 새콤달콤해.”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맛을 강조하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발언에 프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먹을 수 있는 꽃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한동안 낯선 꽃을 보면 무턱대고 입으로 가져가려 해 기르가 골머리를 앓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이거 맛있지. 그래도 많이 먹으면 배탈 나니까 조금만 먹어야 해?”

독소가 있는 꽃잎을 잘못 먹어 한참 배앓이를 하고 나서야 버릇을 고칠 수 있었다. 프리아의 말을 들은 릴리아나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도 릴리한테 똑같은 말 했어.”

“아저씨? 손님이 왔어?”

“아니. 손님 못 들어와. 우리 집에는 벤이랑 한스랑 릴리랑 피아만 들어올 수 있어.”

시선에 걸리는 낯선 이는 없었으나 프리아는 경계하듯 목소리를 낮춰 아이에게 물었다.

“밖에 꽃이 많이 피었어?”

“이만큼. 아니, 이이이이만큼.”

제 어깨만큼 팔을 벌렸던 아이의 손이 점점 더 확장되어 침대 위를 가득 채웠다. 프리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봄 내음을 들이마셨다. 며칠 새 코끝으로 느껴지는 공기마저 달라져 있었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에 통증이 없다. 심장을 압박해 오는 둔중한 감각도, 누가 머리를 잡고 흔드는 것처럼 어지럽고 찡한 두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토록 또렷한 시야와 맑은 정신을 가지고 대화를 나눈 것이 얼마 만의 일인가.

“그렇게 많이? 나도 보고 싶네.”

“릴리가 보여 줄게. 우리 밖에서 놀아.”

놀이 상대를 되찾은 기쁨에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빨리 가자, 빨리. 옷자락을 끌며 재촉하는 아이의 성화에 프리아는 급히 신발을 찾아 신었다.

광장은 한산했으나 마을에 단 하나뿐인 빵집에는 여러 명이 줄을 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의 끝에 선 기르는 요깃거리가 될 빵 몇 개를 집어 기다렸다가 값을 치르며 주인에게 물었다.

“요즘 들어 갑자기 주문량이 늘어난 집은 없습니까?”

마을 주민들의 사정이라면 접시와 포크의 개수까지 꿰고 있다는 빵집 주인이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글쎄요. 전쟁에 나갔던 이들이 돌아왔으니 조금씩들 먹성이 늘긴 했습니다.”

“혹,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청년을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키는 이 정도고 마른 체형입니다.”

허공에 손을 짚어 보인 기르가 주인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전에 병사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같은 걸 물어봅디다. 손님도 궁에서 나오셨소? 크게 죄를 진 이가 도망이라도 쳤습니까?”

주인의 반문을 들은 기르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지은 이가 아닙니다. 혹시 보게 된다면 황궁에 가 고하십시오. 큰 사례를 받으실 겁니다.”

“죄인이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죄지었다는 여인을 찾는 방이 붙은 적도 있고 하니 괜히 흉흉해서 한 말이지요.”

이제는 빛바랜 벽보를 곁눈질하며 주인이 말을 덧붙였다.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병자를 고치는 이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 마을에는 의사가 없습니다. 있는 거라곤 산파뿐이지. 어디 몸이라도 편찮으신 거요? 병을 고치시려거든 더 큰 마을로 가셔야 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기르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궁을 오가는 입구는 넷.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배치되어 있어 주야로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비교적 통행인이 적은 북문이라고 해도 프리아 혼자서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기르는 황궁 사냥터와 이어지는 뒷산에서 출발하여 인접한 마을을 하나씩 짚어 가는 중이었다.

수도의 경계를 넘어 다른 도시로 들어갔다면 신분 조사 과정에서 이미 정체가 밝혀졌을 것이다. 위조된 문서를 사용해 위기를 넘겼다 하더라도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로 목격자 한 명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기르는 프리아가 아직 황궁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판단했다. 태후가 황궁 주변을 수색했을 무렵에는 자신의 저택에 숨어 있었을 것이니 흔적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황궁 사냥터가 수색의 범위에서 제외된 후에야 나와 산을 넘었으리라.

사람이 몸을 숨길 만한 동굴은 이미 모두 찾아보았다. 프리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란기를 맞은 동물들이 제 새끼를 키우느라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익히 들어 위험성을 알고 있는 프리아가 봄이 올 때까지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있을 리는 없었다.

버려진 집을 찾아 하룻밤씩 머물며 수소문했지만 비슷한 이를 보았다는 이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디에 있니, 프리아. 기르는 고개를 저어 머릿속을 점령한 불길한 상상을 몰아냈다.

막 빵 가게를 나온 기르의 앞을 왁자지껄 어울려 떠들어 대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지나갔다.

“아까 봤냐? 그 멍청이가 거지새끼 찾아 돌아다니는 거.”

“한스, 벤 찾고 있다. 릴리는 내 친구다.”

키 큰 소년의 말에 다른 소년이 어눌한 말투로 흉내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못됐어. 부모 없는 애들이라고 그렇게 놀려도 돼?”

야무진 눈매를 가진 여자아이 하나가 따지고 들자 무안을 당한 사내아이가 붉어진 얼굴로 반박했다.

“한스가 왜 부모가 없어. 엄마 아빠 다 있는데.”

“한스가 얼마나 착한데. 놀리지 마. 벤도 혼자서 여동생 데리고 사는 거 장하잖아.”

“뭐야, 너 벤 좋아하냐?”

뭐라고? 발끈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곱게 땋아 내린 양 갈래 머리가 들썩였다. 제국에서 딸 가진 부모라면 저 머리 모양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반으로 갈라 조금씩 땋아 내리며 장식끈을 함께 엮었다가 리본을 길게 남겨 팔랑거리게 두는 제국 전통 매듭법이다.

딸자식을 길러 본 적은 없지만 기르는 여자아이의 머리 묶는 법에 대해서라면 웬만한 유모들만큼이나 능통했다. 프리아의 머리가 길어 여자아이와 구별할 수 없었던 아이 시절,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거추장스러워하는 머리카락을 한두 번 묶어 주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었는지 프리아는 매일같이 찾아와 머리를 묶어 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사내의 손으로 어설프게 묶은 머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뛰놀다 매듭이 풀려 산발이 된 얼굴로 찾아와 몇 번이고 다시 묶어 달라 요구하는 통에 연구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여간해서는 풀리지 않도록 튼튼하게, 그리고 이왕 묶는 김에 예쁘게 완성해 낼 수 없을까. 학구열이 발동한 기르는 성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찾아가 알훼니아 방식을 배웠다. 그것도 모자라 타국 여성들의 머리 모양이 그려진 서적까지 구해다 읽으며 골몰하기까지 했다.

어느덧 기르는 제국 전통 매듭법과 그간 익힌 다양한 머리 모양을 응용해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내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얄궂게도 마을에 내려갔다가 여자아이로 오해를 받게 된 프리아가 손을 들고 이제부터는 다신 머리를 땋지 않겠다 선언하고 말았다.

그후로 실력 발휘를 할 날이 없게 되어 오래 잊고 있던 추억이었다. 사내아이와 대립하는 여자아이의 팔랑거리는 리본에 머무르던 기르의 시선이 그리운 빛을 띠었다. 산에서 만난 꼬마 아이도 앙증맞게 머리를 묶고 있었지. 꼬마 아이를 떠올리던 기르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꼬마 아이의 머리 모양이 눈앞에 보이는 여자아이의 것보다는 어린 프리아에게 묶어 주었던 형태와 꼭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기르가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방식이라 세상 어느 곳을 가도 그런 머리 모양을 한 여자아이는 발견하기 어려울 터였다.

조카 마티아의 머리를 묶어 주겠다며 끙끙거리는 프리아에게 기르는 지난날의 경험을 되살려 몇 가지 머리 모양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그 아이가 있던 곳에 내 아이가 있었구나.

기르가 걸음을 돌려 다시 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떨어진 빵 봉지를 발견한 아이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얘는 엄마고 쟤는 아빠야.”

크고 작은 바위를 손짓으로 가리키던 릴리아나가 그 사이에 놓인 작은 돌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얘는 아가야. 아이, 이뻐.”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더니 입까지 맞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렇게 자연을 벗 삼아 외로움을 달랬을까. 아이가 그저 안타깝고 사랑스러워 프리아는 손을 들어 작은 머리를 쉼 없이 쓰다듬었다.

찬란한 오후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위, 해는 머리 위로 떠 있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옷자락을 흔들고 지나간다. 봄비를 맞고 쑥쑥 자라난 풀이 길을 가리고 있었지만 아이는 두려움 없이 숲을 헤치며 앞서 걸었다.

오두막에서 지낸 이래로 이렇게까지 멀리 나와 보는 건 처음이다. 집 안에 있으라 강요한 이는 없었지만 발목이 회복한 후에도 기껏해야 오두막 주변 마당을 거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될까 두려워, 발작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점차 몸에 힘이 없어져 오래 일어나 있는 것조차 무리가 되었기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이토록 따스하다는 걸,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손길이 청량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올망졸망한 들꽃들이 내뿜는 향기는 또 어찌나 싱그러운지. 숲이 뿜어내는 생명력을 느끼며 프리아는 천천히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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