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09)화 (210/237)

사내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를 가리키는지 단박에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벤은 필사적으로 프리아를 숨기려 들었다. 

“뭐? 뭘 묻는 건데? 보석은 이미 아까 그 사람들이 가져갔어. 내 수중에 없다고.”

벤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사내에게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봐, 없잖아. 못 믿겠으면 더 뒤져 보든가.”

“그따위 물건에 대해 묻는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따위 물건이라니. 돈이 참 많은 놈인가 보다. 그렇게 돈도 많으면서 왜 아픈 사람을 치료도 해 주지 않고 내쫓았어?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면 뭐, 그런다고 프리아가 당신을 따라갈 줄 알아?

소년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객기와 총기,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소년의 눈동자를 내려다본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프리아. 지금 어디에 있지?”

“그게 누군데? 난 그런 사람 몰라. 이름도 처음 들었어.”

“내 후궁의 이름이다. 정체를 감추고 타인을 가장하는 취미도 갖고 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겠군.”

후궁?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웬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벤이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따로 배운 것은 없지만 후궁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황궁에 산다는 황제의 부인들이 아닌가? 그 귀부인들과 프리아가 무슨 상관이라고?

“황제가 남첩에게 흠뻑 빠져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느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황제니 후궁이니 그런 높으신 분들의 사정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승전식 선물을 받으러 갔을 때 곧 황제의 행렬이 지나간다 하여 잠시 관심을 가졌을 뿐, 그조차도 소란에 휘말리느라 제대로 모습을 보지 못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 너를 겁박하고 고문한 자들에게도 엄중한 벌을 내릴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무엇이든 들어준다니 자기가 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돈이라면 우리도 있어. 이번엔 재수 없게 잡혔지만 다음에는 값을 좀 덜 받더라도 전당포에 넘겨 버릴 것이다. 진료비와 약값, 알훼니아까지 가는 여비만 마련한다면 이따위 나라 당장 떠나 버리고 말 거야.

“때려죽여도 말 안 해.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도둑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냐. 떳떳하다고.”

“그래, 떳떳한 소년. 다시 묻도록 하지. 너에게 보석을 팔아 오라고 시킨 사람은 누구냐? 내 후궁이 너에게 그리하라 하였느냐?”

“아까부터 왜 자꾸 후궁 얘기야? 궁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는데 내가 무슨 수로 후궁을 만나?”

“넌 이미 그를 만나 보았다. 지금 함께 지내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알려 다오.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이다.”

애타게 찾고 있다고? 이렇게 뻔뻔할 수가. 벤은 조소를 지으며 한참 높은 시선 위를 노려보았다.

“버렸으면서.”

버린 주제에. 이제 와서 왜.

“버리지 않았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이다.”

“그게 버린 거야. 툭하면 쓰러지는 데다 앞도 잘 보지 못하니까 쫓아낸 거잖아?”

자신을 노려보는 소년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은 오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앞을 잘 보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돈도 많으면서 왜 병을 고쳐 주지 않았던 거야? 옮을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지?”

프리아가 앞을 보지 못할 리가 없다. 아이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 자신을 속이려 하고 있었다. 소년을 노려보는 오웬의 눈동자에 분노가 섞여 들었다.

“황제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도 중죄에 해당한다. 어리다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아까부터 왜 자꾸 후궁이니 황제니 뭐니 상관없는 소리를 해 대는 거야? 만나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어. 나 같은 사람은 평생 가야…….”

알아듣지 못한 척 고집스럽게 말을 이어 가던 벤의 입술이 멈췄다. 사내가 옷깃에 손을 넣어 익숙한 물건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프리아의 것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로켓이 열리자 그 안에서 작게 자른 머리칼 한 묶음이 나타났다. 그 머리칼이 눈에 익은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을 본 벤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더없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 머리칼을 매만지는 사내의 표정 또한 벤에게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같은 눈빛을, 애틋한 마음을 다른 이에게서 늘 보곤 했기에.

“황제가 아닌 한 사내로서 그대에게 요청하고자 한다. 내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다오. 그는 내 후궁이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반려다.”

흔들리는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웬이 다짐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그를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할 거야. 너에게도 프리아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다만 도울 것이다. 그를 돕게 해 다오. 프리아를 살리게 해 줘. 너 역시 의사를 부르기 위해 보석을 팔려 했던 것이 아니냐.”

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위압감은 여전했지만 어쩐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곳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써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만약을 대비해 한스를 붙여 두었지만 소식을 전할 수 없으니 두 사람은 답답해하고 있을 것이다.

“말해 주겠느냐?”

이윽고 소년의 입에서 나온 지명을 들은 오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몇 달을 찾아 헤매었으나 프리아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황실 사냥터와 이어진 숲이라니. 그리던 이가 숨은 곳은 그가 미처 내려다보지 못했던 발밑이자 돌아보지 않은 등 뒤이며,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황궁의 뒷산이었다.

“피아, 언제 일어날 거야?”

나 심심해. 프리아의 곁에 누워 있던 릴리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한스가 준 빵도 먹고 벤이 하루에 한 개씩만 먹으라고 했던 사탕도 오늘 벌써 두 알이나 먹어 버렸다. 사탕은 왜 이렇게 금방 없어지는 거지? 녹지 않고 계속 입 안에 있으면 좋을 텐데.

입술에 남은 설탕 결정을 혀로 할짝이며 아이가 입맛을 다셨다. 혼자서 소꿉놀이도 하고 종이에 동그라미도 열 개나 그렸는데 피아가 일어나지 않았다.

“매일 잠만 자구. 나 심심해.”

투정하듯 잠든 이의 팔을 흔들어 깨워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제 오라비를 흉내 내, 손가락을 누워 있는 프리아의 코끝에 가져다 댄 아이가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숨결이 뿜어져 나온다. 손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간지러워!”

아이는 까르륵 웃으며 듣는 이 없는 허공에 대고 입술을 움직였다. 요즘 들어 피아가 오기 전처럼 혼자 말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부모 없이 세상에 둘만 남게 된 남매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법을 깨우쳤다. 숲으로 들어간 벤이 산짐승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릴리아나는 낡은 오두막에서 혼자 노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짐승들도 동면에 드는 한겨울에는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스가 찾아와 챙겨 주지 않았다면 남매는 한 계절도 나지 못하고 굶주림에 지쳐 영원한 잠에 들었을 것이다. 벤의 사냥 실력이 늘어나자 배곯는 일이 줄어들었다. 가죽을 내다 팔아 모은 돈으로 빵과 옷을 샀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남매는 행복했다. 누구에게도 매 맞지 않았으며 빚에 쫓겨 도망칠 일이 없었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아이 둘이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어른들은 그저 이웃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놀러 다니는 것이라 여겨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산에 지천으로 자라는 이름 모를 풀처럼, 둥지마다 태어나 귀를 시끄럽게 울리는 산새처럼 아이들은 씩씩하게 자라났다.

‘벤 언제 와?’

수십 번씩 묻는 릴리아나의 물음에 내일,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또 내일이라 대답하던 한스가 아침 일찍 오두막을 나섰다.

‘벤, 마을에 갔다. 내가 가서 벤 데려온다.’

‘마을에? 빵 사러 갔어? 나도 같이 갈래.’

벤을 데리러 간다는 한스의 말에 반색한 릴리아나가 그를 따라나서기 위해 문 앞으로 향했다. 난처한 표정을 짓던 한스는 다시 돌아와 꾸러미에서 빵 한 덩이를 꺼내 릴리아나에게 내밀었다.

‘옆, 옆 마을에 갔다. 거기 멀다. 릴리아나 다리 아프다.’

‘다리 안 아픈데. 나도 가고 싶어.’

‘릴리 가면 피아 혼자다. 피아랑 놀아 줘야 해.’

부루퉁하니 입술을 내민 릴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스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달랬다.

‘그치만. 피아가 안 일어나는데. 릴리는 심심한데.’

‘함께 있는 건 좋은 거다. 그래서 한스가 벤 데리러 간다.’

‘알았어. 그럼 릴리가 피아랑 있을게. 빨리 와. 벤이랑 막 뛰어서 응?’

릴리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스가 긴 다리를 휘두르며 숲으로 뛰어나갔다. 뛰어가 빨리 돌아오겠다는 한스의 약속에 릴리아나가 만족스럽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무 심심해.”

누운 이를 내려다보며 투정하듯 말한 아이가 신발을 들어 발을 굴렀다.

“피아 안 일어나면 나 혼자 갈 거야.”

그래도 반응이 없자 어른처럼 한숨을 내쉰 릴리아나가 홀로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내가 맛있는 거 갖다 줄게. 잘 자고 있어.”

마당에서 창문 안쪽을 들여다보며 당부한 아이가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숲으로 향했다.

진분홍 꽃을 따 입에 넣고 쪽 빨아들이면 새콤한 단맛이 돈다. 숲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터득한 지식으로 간식거리를 찾아내며 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피아랑 같이 먹어야지.”

너무 세게 쥐었나? 조심스럽게 펼친 손바닥에 온통 꽃물이 들었다.

“에이, 지지.”

뭉크러진 꽃잎을 바닥에 버린 아이가 탁하고 발을 굴렀다. 손 닿는 곳에 있는 꽃잎은 모두 아이의 입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자신의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줄기로 한껏 뻗은 손등에 낯선 이의 손이 겹쳐졌다.

“아가야, 왜 혼자 있니?”

손 닿지 않은 곳에 피어 있던 꽃송이를 꺾어 자신에게 건네는 사내를 향해 릴리아나는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혼자 아니야. 아빠랑 있어.”

벤이 몇 번이고 말했다. 혼자 있을 때 낯선 사람을 보면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고. 혼자냐고 물어보면 아빠가 근처에 있다 말하고 뛰어 숨어야 한다고 했다.

“아빠가 어디 계시니? 근처에 계셔?”

“나무 주우러 갔어. 저어기.”

덤불 위를 가리키며 순식간에 자신과의 거리를 벌린 여자아이를 기르는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혼자 돌아다니다가 무서운 동물을 만나면 아야 한단다. 이 꽃은 많이 먹으면 배탈 나니 조금만 먹어야 해.”

“릴리 많이 안 먹었어.”

꽃잎으로 물든 작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기르는 유난히 탐스러운 꽃가지 하나를 꺾어 종이에 싼 사탕 과자와 함께 아이에게 내밀었다.

“어서 아빠 곁에 가 있으렴. 이건 아저씨가 주는 건데 아빠에게 보여 드리고 괜찮다 하시면 먹거라.”

아이는 경계를 거두지 않으면서도 손을 내밀어 사탕과 꽃을 가져갔다.

“아빠!”

우렁차게 소리쳐 제 아빠를 부른 아이가 덤불로 뛰어갔다. 마침 덫을 놓기 위해 산을 찾았던 마을 주민이 아이를 보고 알은척을 해 왔다.

“릴리아나 아니냐? 놀러 왔니?”

“쉿!”

조용히 해. 아이가 검지 하나를 들어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힐끗 아래쪽을 내려다본 주민의 시선이 기르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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