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08)화 (209/237)

“지금 뭐라 했느냐? 누가 왔다고?”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어요!”

“폐하께서 오셨다고? 그게 참말이더냐? 폐하께서 대체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왕림하셨단 말이냐?”

“저희도 모릅니다. 소장님,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나가 폐하를 맞으셔야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소장을 재촉하며 서기관이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았다.

“날, 날 좀 일으켜 다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깡마른 서기관에게 의지한 소장의 육중한 다리가 후들거리며 힘들게 집무실의 문턱을 넘었다. 북구 재판소에 임명받은 이래로 그가 주로 상대해 온 이들은 음주 소란, 무전취식, 사기, 도박을 일삼다 체포당한 잡범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가끔은 강도, 살인, 방화를 저지른 중범죄자가 잡혀 오기도 했다. 범죄자들로 득시글한 이 불경한 곳에 황제가 방문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일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열 살은 더 늙어 버린 소장이 서기관의 부축을 받으며 귀빈실에 도착했다. 귀빈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수호 기사의 날카로운 시선이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잘못한 일도 없거늘 지레 위축당한 그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어 귀빈실에 내려놓았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위엄 있는 노인에게 예를 표하려 하는 그를 서기관이 급히 제지했다. 선황이 이미 사망했으며 새로운 황제의 시대가 열린 지 한참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소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대가 이곳의 책임자인가.”

노인의 곁에 서 있던 서늘한 인상의 청년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장은 곧 그가 황제임을 깨닫고 급히 자세를 낮췄다.

“예, 폐하. 하인델이라 하옵니다. 기탄없이 명하소서. 온 힘을 다해 폐하를 돕겠습니다.”

“보석 절도로 잡혀 온 소년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다.”

“보석 절도 말씀이시옵니까?”

“그 소년을 만나 봐야겠어. 전해 듣기로, 내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군.”

“예? 폐하의 물건을 말씀이시옵니까?”

황제의 물건을 훔친 간 큰 도둑이 이곳으로 잡혀 왔다니 금시초문이었다. 당황한 그가 서기관에게 명해 각 부의 직원을 불러 모았다. 잠시 후, 현재 자리를 비운 주무관이 출처가 불분명한 귀품을 팔러 온 소년을 체포해 조사 중이라는 보고가 이어졌다.

“폐하, 제가 가서 죄인을 데려오겠습니다.”

오웬은 소장의 제의를 거절했다.

“옥사로 가겠다. 안내하도록.”

“폐하, 환경이 불결한 곳이옵니다. 따로 공간을 마련하겠사오니…….”

직원을 독촉하려던 소장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입을 다물었다. 귀빈실을 이미 빠져나간 오웬이 차가운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든 상관없으니 어서 옥사로 안내하거라.”

“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눈치 빠른 서기관이 복도로 뛰어나갔다. 그의 뒤에서 손짓 발짓으로 신호를 보내던 소장이 뒤늦게 따라와 합류했다.

“훔치지 않았단 말이야! 몇 번을 말해야 해?”

찬물 세례를 받고 깨어난 소년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소년은 어제까지 조사받던 신문실에서 옮겨져 고문실 의자에 앉혀지게 되었으나 겁먹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놈. 어린것이 이렇게 겁이 없으니 제가 뭘 훔쳤는지도 모르고 날뛰는 게 아니겠느냐.”

소년에게서 나는 고약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주무관이 입을 열었다. 끌려온 직후에는 멀끔했던 소년의 옷차림은 신문을 거치며 땀과 먼지에 절어 퀴퀴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밤이면 씻지 않은 자들로 가득한 옥사에 갇혀 새우잠을 잔 까닭에 그들에게서 옮겨 온 형용할 수 없는 오취까지 더해졌다.

소년이 빵이나 옷, 신발 따위를 훔친 좀도둑이었다면 정해진 체벌을 받은 후, 하루 이틀 옥사에 갇혔다가 풀려났을 것이다. 보석상의 신고를 받은 주무관은 장물로 의심되는 보석을 확인한 후 이것이 예삿일이 아닐 것이라는 직감을 느꼈다. 분명 신분 높은 귀족의 물건이리라. 이 일을 해결한다면 자신에게도 그럴듯한 뒷배가 생겨나지 않을까.

보석의 주인을 찾기 위해 세공사를 만나고 온 조사관에게서 물건이 황실의 보석, 그것도 황제의 귀품이라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전율을 느꼈다.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한다면 공을 빼앗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소장의 눈 밖에 나 지저분한 일만 도맡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주무관은 조사관과 둘이서 우선 일을 해결한 후, 황궁에 찾아가 직접 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년이 지니고 있던 것은 귀품의 일부분이며, 세공사가 만든 장신구의 표면에는 더 많은 보석이 붙어 있다고 들었다. 이야기가 새어 나가 공을 빼앗기기 전에 서둘러 남은 보석의 행방을 알아내야 했다.

아직 어린놈이기에 몇 대 쥐어 패면 순순히 입을 열 것이라 생각했으나 소년은 독하게 버티고 있었다.

“입을 열지 않는다면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벽에 걸린 고문 도구를 손짓으로 가리켜 보이며 주무관이 으름장을 놓았다. 소년이 신문실에서 받았던 구타는 앞으로 행해질 고문에 비한다면 실상 어린아이 장난 수준에 불과했다. 덩치 큰 성인 남성도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죄를 토해 내는 곳이 고문실이었다.

따귀를 얻어맞고 발에 걷어차이며 이틀을 버텼다. 퍼렇게 멍이 들고 입술이 터져 피딱지가 앉은 얼굴로 벤은 제 앞에 선 두 명의 어른을 노려보았다.

“당신들! 내가 나가서 고발할 거야! 미성년자를 고문하는 건 불법이라고!”

“성인이 아니라고? 조서에 따르면 분명히 네 입으로 성년을 넘겼다고 말한 것 같은데?”

“누가 날 성인으로 봐? 멍텅구리들 같으니.”

지금껏 그토록 성인이라 말하고 다녔어도 믿어 주는 이 하나 없었다. 벤은 자신이 겁먹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러 허세를 부렸다. 고문실로 끌려가면 생니는 물론이오, 손발톱을 죄다 뽑히게 될 것이라 들었다. 못이 박힌 관에 갇혀 온몸의 피가 다 흘러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될 거란 소리도 들었다.

옥사에 갇혀 반쯤 미쳐 버린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벤은 필사적으로 귀를 막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여기서 자신이 입을 연다면 릴리아나와 한스, 그리고 프리아까지 끌려와 지독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벤은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며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내가 질 줄 알아? 난 살아서 여길 나가 따뜻한 나라로 갈 거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네 마님이란 여자가 이걸 주며 팔아 오라 했다고?”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그렇다고 했잖아!”

기죽지 않고 소리치는 벤에게 주무관은 조소를 날렸다.

“네가 말한 마님이란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한다 한들 귀하신 마님께서 너처럼 지저분한 평민 아이에게 귀품을 팔아 오라 시키겠느냐? 집사도 있고 하녀장도 있을 터인데. 은밀히 처분을 원했더라도 몸종을 시켰겠지.”

“시킨 게 맞아. 난 마님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라고!”

“이리 귀한 물건을 네가 훔쳤을 리는 없지. 분명 뒤에서 따로 지시한 놈이 있을 것이다. 누구냐?”

“마님이 시켰다니까!”

3일째가 되는 오늘까지 같은 답만을 내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조사관이 딱한 얼굴을 했다.

“보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느냐? 안다면 그리 말하지는 못할 것이야. 손만 잘려 나갈 줄 알아? 네 목이 달아날 것이다.”

목이 달아난다고? 조사관의 말을 들은 벤이 멈칫하며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 목이 왜 달아나? 설령 황족의 물건을 훔쳤다고 해도 손 하나가 잘릴 뿐이다. 내가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 어쩔 수 없군.”

주무관이 조사관에게 손짓하자 그가 벽에 걸린 채찍에 손을 뻗었다. 공포에 질린 벤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을 때, 쾅 소리를 내며 잠겨 있던 고문실의 문이 밖으로 열렸다.

“소, 소장님!”

땀을 흘리며 들어온 덩치 큰 중년 사내를 본 두 사람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이게 무슨 짓인가. 처벌이 정해질 때까지 처소로 돌아가 있게.”

“처, 처벌이라뇨. 처소로 돌아가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 생길 뒷배를 믿고 용감해진 그들이 소장에게 소심한 항의를 시작했으나 직원들의 손에 의해 끌려 나갔다. 이윽고 소년만이 남게 된 공간 속으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아직 나이가 어리군. 의사를 불러와.”

소년의 얼굴에 남은 멍을 본 오웬이 지시를 내렸다.

“소장,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고문을 허한 것은 그대인가?”

“아, 아니옵니다. 정녕 소신은 모르고 있던 일이옵니다.”

“아이를 험하게 다룬 자들을 파직시키고 옥에 가둬 적법한 처벌을 내리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어, 어서 의사를 불러오너라!”

허둥대는 소장의 앞에서 고문실의 문이 닫혔다. 벤은 의자를 끌어내 앉은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사람이다. 로켓에서 본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남자. 프리아의 주인.

“앉거라.”

빈 의자를 가리키며 한 말에도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묶여 있진 않은 것 같은데 혹시 몸을 움직일 수 없느냐?”

고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아 벤은 무섭게 생긴 의자 위에 앉혀 있기만 했을 뿐이었다. 구속구를 채우기도 전이라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의사가 곧 도착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피, 필요 없어. 이런 건 잠자고 일어나면 금방 나아.”

매 맞은 육체가 고통을 호소했지만 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고문하겠다 겁박하는 어른들 앞에서도 벤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을 때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등줄기가 오싹하고 손발 끝에 서늘한 기운이 도는 걸까.

그가 입고 있는 값비싼 의복에 주눅이 든 것일까. 아니다, 설령 온몸에 주렁주렁 보석을 달고 금실로 엮은 옷을 입은 이가 나타난다고 하여도 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내는 벤을 때리기 위해 손을 치켜들지도 몽둥이를 들어 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어두운 눈동자로 고요히 벤을 응시할 뿐이었다. 무엇하나 강제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압박감이 들었다. 벤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사내 앞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나이가 몇이지?”

“열여섯… 아니, 열셋.”

성인이 아닌 것이 증명되면 나쁜 놈들에게 크게 벌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벤은 제 나이를 밝혔다. 벤의 말을 들은 사내는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후궁은 아이들을 참 좋아하지.”

아이라니 무슨. 아직 성년은 아니라고 해도 아이의 범주에 들어가긴 싫었다.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오웬이 다시 물었다.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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