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07)화 (208/237)

아뿔싸. 세공에 열중하느라 방문한 고객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하인의 보고를 잊고 있었다. 당황한 사내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바이런 님. 주문하실 물건은 결정하셨나요?”

“37번 루비 귀걸이 한 쌍, 46번 오팔 목걸이 하나, 그리고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코담뱃갑을 하나 주문하려 하네. 색은 검정이 좋아. 그리고 장식은 자네 선택에 맡기도록 하지.”

바이런이 긴 손가락을 들어 카탈로그의 샘플을 짚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표면색이 어두우니 장식은 금과 은을 쓰는 것이 좋겠군요. 비너스의 탄생을 오마주해 돋을새김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요?”

“아주 좋아, 진주도 추가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사내가 하인을 불러 주문서 작성을 지시했다. 염문을 몰고 다니는 남자, 바이런. 엮인 여인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가 공방에 주문하는 물건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를 시샘하면서도 흉내 내고 싶어 하는 철부지 도련님들이 많았기에 공방은 덩달아 호황기를 맞았다.

“주문도 마쳤으니 이제는 그대가 나의 호기심을 풀어 줄 차례야. 폐하의 보석이 도난당했다는 것 같던데 자세히 들려줄 수 있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바이런이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으나 어쩔 수 없이 조사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확실한 얘기야? 보석 조각만 보고 그게 어디에 붙어 있던 물건인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고?”

“흔한 물건이었다면 저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고품질의 광석만 취급한다는 것은 바이런 님께서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 녹주석과 청금석은 색이 아름답고 경도가 뛰어나 제가 아껴 두고 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세공하여 제작한 로켓이니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공방에서 탄생해 여인들의 품에 안긴 장신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바이런 자신만 해도 정인들과의 기념일뿐 아니라 콧대 높은 미인의 마음을 열기 위해, 혹은 토라진 정인을 달래기 위해 뻔질나게 공방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제국에서 가장 많은 보석을 소유하고도 여인에게 내어 주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남색에 빠진 황제라 했다. 후궁들에게 의무적으로 지급한 보석을 제외하고 그가 마음을 담아 선물한 귀품을 받은 이는 오직 한 사람, 사내 후궁 프리아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프리아의 목에 걸려 있던 작은 로켓은 옷에 가려져 있을 때가 많았으나 방심할 때면 옷깃 밖으로 삐죽 빠져나와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런은 그와 같은 물건을 승전식 날 옷을 갈아입던 오웬의 목에서 본 적이 있다.

“혹시 그 로켓, 한 쌍으로 만들었어?”

“예, 로켓이란 보통 연인 사이에서 나눠 갖는 물건이니까요. 폐하께서 어느 쪽을 잃어버리셨는지 모르겠군요.”

로켓을 나눠 가진 두 사람 중,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이는 한 명뿐이다.

‘프리아.’

바이런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내가 당황했다.

“다과를 준비해 오라 일렀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다음에. 지금부터 성질 급한 외사촌을 만나러 갈 예정이라.”

배웅도 마다하며 바이런은 사내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프리아의 물건이 발견되었다고 한들 무사를 단언하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다시 절망에 빠지게 될지라도 오웬은 이 소식을 알아야 했다.

부디 무사하기를. 그 햇살 같은 미소를 다시 볼 수 있게 되길. 바이런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을 몰아 황궁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폐하께서는 현재 회의에 들어가 계십니다.”

시종에게 차를 내오라 지시하는 시종장의 어깨를 바이런이 붙잡았다.

“미안, 오늘은 차와 인연이 없는 날인 것 같아. 급한 일이니 오웬을 좀 불러 주겠어?”

“예? 무슨 사고라도 치셨습니까?”

회의에 참석한 황제를 불러오라니 전대미문이었다. 놀란 시종장이 바이런의 번지르르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폐하의 도움을 요청할 정도라니, 대체 무슨 사고를 치셨기에.

“사고는, 시간을 지체하면 우리들에게 일어날 것 같은데. 어차피 보고가 올라오겠지만 일을 해결한답시고 늦어질 게 뻔해서 말이야.”

공을 세우려는 관리들은 보석을 가져왔다는 소년을 고문해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먼저 출동하려 들 것이다. 보석의 주인이 황제가 가장 아끼는 사내 후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프리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패라 여겨 거칠게 다룰 수도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꼭 아셔야 할 일이란 말씀이신가요?”

“프리아의 소지품을 팔러 온 이가 잡혔어.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까?”

“예?”

바로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 시종장이 눈을 끔벅거리다 그 뜻을 알아채고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아니, 함께 가시지요.”

일의 시급함을 인정한 시종장이 동행을 권했다. 가는 도중 바이런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들은 시종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야?”

회의실의 문을 열고 나타난 시종장에게 오웬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폐하, 시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 실례를 범했습니다.”

다가온 시종장에게서 귓속말을 들은 황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아무런 지시 없이 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대신들은 당황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해산하라는 폐하의 명이십니다. 내일 시간을 다시 정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돌아온 시종장이 그들에게 황제의 말을 전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주시오. 폐하께서 저리 놀라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다시 전쟁이 터진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던 대신들이 입을 열었다.

“대신들께서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돌아가 계시면 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황제에게서 신랄한 지적을 받아내느라 진땀을 빼던 대신들이 그제야 숨을 돌렸다. 한층 강퍅해진 황제의 성미를 그들은 전쟁의 후유증이라 여기고 있었다.

“돌아들 갑시다. 보완해서 제출하라 명 받은 서류가 한두 장이 아니지 않소?”

회의실을 빠져나오던 대신 중 나이가 지긋한 사내 하나가 옆에 있던 이에게 말을 걸었다.

“소문 들으셨습니까? 폐하께서 아직도 사내 후궁이 살아 있다 여겨 밤낮으로 찾아다니신다 합니다.”

“외지 손님을 받은 집들은 수색 요청까지 받았는걸요. 궁인들이 저희 집에도 다녀갔습니다. 외국에서 온 가정 교사를 들였는데 얼굴을 확인하고 가더군요.”

“회의 중엔 그리 냉철하신 폐하께서……. 믿기지 않습니다.”

“젊은 나이에 사별했으니 오죽하시겠습니까. 마음을 다독여 줄 분이 어서 나타나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멀리 후궁전 방향을 응시하며 사내가 말을 받았다. 황제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총애를 독차지할 여인은 어느 궁에서 나오게 될 것인가. 각자 줄이 닿은 공국을 떠올리며 대신들이 쓴 입맛을 다셨다.

회의를 멈추고 한걸음에 달려온 오웬에게 바이런은 그가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목에 걸린 로켓을 꺼내 표면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초조하게 떨리고 있었다.

‘후궁께서는 따로 챙겨 갈 것이 없다 말씀하시며 로켓 하나만 목에 거신 채로 백조궁을 나오셨습니다.’

귀족의 저택뿐 아니라 평민들의 집까지 이 수도에 존재하는 곳이라면 수색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프리아가 있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수색에서 제외했던 빈민가와 사창가까지 뒤지기 시작한 지도 꽤 여러 날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달째 프리아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 숨어 있기에 목격담 하나 나오지 않는 것인지.

고통을 견디기 위해 오웬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밤이면 약의 힘을 빌려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겨우 수시간 허락되는 꿈의 세계에서 오웬은 프리아를 쫓아 끝없는 미궁 속을 헤매었다.

시간이 흐르자, 프리아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되려 오웬의 정신을 갉아먹는 좀벌레가 되었다. 미치기 직전에야 들려온 그의 소식 앞에서 오웬은 침음을 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누군가 프리아를 해쳐 로켓을 손에 넣었을까. 로켓을 분해해 보석을 떼어 팔듯 그 아름다운 육체를 훼손해 함부로 내다 버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또다시 프리아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면 간신히 버텨 온 정신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오웬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소년이 갇혀 있는 곳이 어디지?”

침묵을 지키던 오웬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이 내려 날카롭게 변한 오웬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바이런이 입을 열었다.

“북구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라 들었으니 그 지역 재판소일 거야.”

그토록 기다려 왔던 프리아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오웬의 표정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최악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고통 속을 헤매는 표정이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한 바이런이 손을 뻗어 사촌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작은 실마리 하나를 주웠을 뿐이야. 프리아의 성격을 잘 알잖아? 가난한 아이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보석을 나눠 주었을 수도 있어.”

그리했기를 바란다. 가는 길마다 흔적으로 남아 행방을 알리는 불빛이 되기를. 험한 일을 당해 강제로 빼앗겼을지도 모른다는 이 빌어먹을 상상을 부디 비웃어 주었으면.

“먼저 갈 테니 가능한 많은 이들을 동원해서 따라오도록 해. 한 명도 빠짐없이 무장시켜.”

바이런에게 병사 동원을 명령한 오웬이 결심한 얼굴로 걸음을 내디뎠다.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르는 시종장에게 바이런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돌아오는 그의 품에서 그리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봄이 왔어도 여전히 서늘한 이 궁전에 온기가 되돌아오기를 바란다.

프리아, 이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야.

수도에 위치해 있다고는 하나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어 늘 우중충하고 한산했던 재판소에 비상이 걸렸다.

“소장님! 큰일 났습니다! 폐하께서 오셨어요!”

집무실 의자에 기대고 앉아 졸고 있던 재판소 소장의 눈이 황급히 뜨였다. 뭐지? 방금 굉장히 황당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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