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던 노인의 귀로 딸랑이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굽어 있던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긴장한 티가 역력한 소년이 어울리지도 않는 모자를 움켜쥐고 노인 앞으로 걸어왔다.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려 가는 곳, 전당포.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노인의 가게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궁지에 몰린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떨리는 손으로 제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을 내밀고 약간의 돈을 챙겨 돌아갔다. 귀한 것이니 잘 보관해 달라, 꼭 찾아가겠다 장담한 이들 대다수가 며칠 후면 다른 물건을 들고 다시 가게를 방문했다.
한때는 누군가의 보물이었던 것들. 작은 가게 안은 그들이 찾아가지 못한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구석에는 유행 지난 드레스가 쌓여 있고 벽에는 고장 난 시계가 걸렸다. 사용감이 역력한 구두들이 진열장을 차지하고 팔리지도 않는 장식품은 유리 진열대 안 상석에 놓여 노인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게를 잘못 골라잡은 것 같다. 벤은 실망했으나 오후의 무료함에서 깨어난 노인은 살뜰한 관심을 보여왔다.
“맡기실 물건이 있으십니까?”
관심을 표하는 노인의 말에 벤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켜 하지 않는 소년의 표정을 본 노인이 자상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왕 오셨으니 물건이나 보여 주십시오.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맡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주저하는 손님들의 마음을 여는 단골 멘트였다. 노인이 제시하는 금액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들은 없었으나 절박함이 앞섰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찾아가실 때까지 소중히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파는 이, 사는 이 누구도 그 말이 진실이 되리라 믿지 않았다. 그저 자존심을 채워 주는 발언일 뿐. 실제로 물건을 찾아가는 이들의 수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망설이던 소년이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노인의 눈에 보이지 않게 주머니의 입구를 살짝 벌린 소년은 손가락을 집어넣어 붉은 조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적산호군요.”
손님들 중에서도 가끔 보석을 들고 오는 이들이 있었으나 품질이 좋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적산호는 피처럼 붉고 짙은 색을 띨수록 가격이 높았다. 보석상은 아니었기에 해박하지는 못했으나 이처럼 짙은 색을 띤 산호는 노인 인생에 있어 처음 보는 상품(上品)이었다.
“비싼 거예요. 어르신께서 마님께 주신 겁니다.”
벤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노인이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의사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하며 보석을 팔아야 한다는 말에 여동생은 자신이 아끼던 붉은 돌을 망설임 없이 벤에게 내주었다. 곁에 있던 한스 역시 간직하고 있던 푸른 구슬을 꺼내 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느 것이 더 값이 나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개중 가장 크기가 작은 것을 골라 노인에게 보여 주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수중에 남아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옷을 사 입었다. 평소 입던 것의 수배나 되는 가격에 깜짝 놀랐지만 귀족 집 하인으로 보이려면 이 정도는 입어야 한다는 말에 지갑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마님께서 무척 아끼시던 물건이겠군요. 이 정도는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노인이 금고를 열어 꺼낸 돈을 벤 앞에 보여 주었다. 값을 제대로 쳐준 걸까? 사기당하는 건 아닐까? 이런 낡은 가게 말고 번듯한 곳에 간다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의 머리를 채운 고민을 이해한다는 듯이 노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여기는 다시 찾아가신다는 전제로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려 가는 곳입니다. 제값을 받길 원하신다면 보석상에 가 보십시오.”
“보, 보석상이요?”
여기 말고 이런 걸 사 주는 곳이 또 있단 말이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소년에게 노인이 질문했다.
“마님께서 뭐라 말씀하시던가요? 다시 찾아가길 원하신다면 제가 보관해 드리고, 물건을 되찾지 못해도 더 많은 돈을 받길 원하신다면 보석상으로 가셔야 합니다.”
“비싼 거예요.”
바보같이 이미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말았다. 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이 은화 하나를 다시 꺼내 적산호 옆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럼 다시 찾아가시겠군요. 소중히 보관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는 걸까? 침을 꿀꺽 삼킨 벤이 손을 내밀어 은화를 움켜쥐었다. 벤이 아무렇게나 지어 낸 주인의 이름을 노인은 꼼꼼한 필체로 장부에 적어 넣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벤은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이미 반나절을 소비했다. 노인이 말한 보석상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을까. 큰돈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앞일을 생각한다면 나온 김에 가능한 많은 돈을 모아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볼까? 아니다, 그건 보석을 살 만큼 돈을 가지고 있거나, 내다 팔 귀품이 있음을 대놓고 드러내는 행위에 다름없었다. 북적이는 거리,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는 호객을 들으며 벤은 걸음을 멈춘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짝이는 예쁜 것들을 취급하는 곳이라면 외관에서부터 티가 나겠지. 벤은 움츠러드는 어깨를 다시 펴고 상점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창을 타고 들어온 빛이 투명한 결정으로 모여들었다. 순도 높은 광석의 아름다움. 수십 년 보았어도 질리지 않는다. 사내는 감탄하며 다시 도구를 집어 들었다.
“주인 어른,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라고 해.”
하인에게 응대를 지시했으나 그가 떠나지 않자 사내는 의아한 눈을 들어 올렸다.
“범죄와 관련된 일이라 합니다. 바로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인의 말을 들은 사내의 표정에 곤혹이 실렸다. 범죄와 관련되었다고 한다면 짐작 가는 일은 한 가지. 그의 고객 중 하나가 귀품을 도난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바로 가겠네.”
끼고 있던 외눈 안경을 내려놓은 그가 서둘러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제국 내 제일가는 보석 세공사이자 길드장인 그는 고위 귀족을 대상으로 한 보석상을 따로 운영 중이었다. 제국 내에 보석상은 여러 곳이 있었지만 그가 취급하는 것처럼 값비싸고 희귀한 보석은 시중에 풀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고위 귀족은 물론이오, 황족들도 그를 자주 찾았다. 후궁에게 보석을 즐겨 선물했던 선황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후한 값을 치러 주곤 했다. 선황이 승하한 후, 그의 주문품은 젊은 황제에게 넘어갔다. 이후 추가 주문이 없어 아쉽기는 했으나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에 부인과 축배를 들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그러실 게지. 아끼는 후궁의 숫자도 차츰 늘어가리라 기대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조사관이 테이블 위로 상자를 꺼내 놓았다.
“한눈에 보아도 예사 물건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보내 신고했다 합니다.”
그가 상자를 열자 익숙한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명한 남색을 띠는 청금석과 에메랄드라고 불리는 녹색의 결정체, 투명도가 뛰어나 그 값이 어지간한 다이아몬드를 능가하는 최상급의 녹주석이다.
“아니, 이것은…….”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내에게 조사관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모를 수가 없지요. 제 손을 거친 아이들입니다.”
“평민으로 보이는 소년이 마님의 심부름이라며 그것들을 팔겠다 가져왔다고 합니다. 가져온 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보석의 가치 또한 잘 알고 있는 눈치가 아니어서 감정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잡아 두었다고 했습니다.”
“평민이 이 녹주석을 가지고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혹 짐작 가는 고객이 있으십니까? 저희 쪽에도 절도가 신고된 건은 없어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보석에도 등급이 있고 이 정도의 물건이라면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석을 팔러 온 소년을 구금하고 심문해 보았지만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매질을 버티며 소년이 입을 다문 사이 이틀의 시간이 흘러갔다.
“다른 보석은 더 나오지 않았습니까?”
“소년이 가지고 있던 것은 이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조사관의 답을 들은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분이 계시지만 어찌 평민 소년의 손에 흘러들어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이것은 제가 황실에 납품한 물건입니다. 정확히는 로켓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던 보석들이지요.”
조사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황실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선황께서 의뢰하셨으나 승하하시어 폐하께 전해 드렸습니다.”
놀란 조사관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폐하의 물건을 훔친 도둑을 잡게 되다니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마, 마, 말씀 감사합니다! 당장 돌아가 상부에 보고부터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발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한 조사관이 황급히 문을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옆 응접실에서 카탈로그를 살피고 있던 단골 고객이 걸어 나와 입을 열었다.
“지금 황제라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