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05)화 (206/237)

올가의 요청을 받은 청년의 시선이 초상으로 향했다. 제 형들 위로 머리 하나가 더 솟아올랐을 만큼 위협적인 체구를 지닌 청년의 표정은 뜻밖에도 아이처럼 순박했다. 소의 눈망울처럼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동요하는 광경을 올가는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종이에 그려진 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본 듯한 얼굴이었다.  

“모, 모른다. 한스는 아, 아무것도 몰라. 미안하다.”

올가의 시선을 외면하며 청년이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사정을 모르는 다른 청년들은 자신들의 동생이 여인 앞에서 수줍음을 타는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다시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정녕 모르시는 얼굴이옵니까?”

자신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여인 앞에서 한스가 진땀을 흘렸다. 큰일이야, 벤이 말한 것처럼 피아를 잡아가려는 사람이 나타났다. 어서 가서 조심하라고 말해 줘야 해.

“한, 한스는 진짜 모른다! 한스 바쁘다. 친구들한테 감자 주러 가야 해.”

당황한 한스가 어머니가 들고 있던 감자 바구니를 통째로 빼앗아 들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네 형들과 동생들도 먹어야지.”

아, 아프다! 등짝을 후려갈기는 어미의 매서운 손날을 받으며 한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들에게서 바구니를 다시 빼앗은 여인이 쯧쯧 소리를 내며 구박을 이어갔다.

“덩치는 곰만 한 녀석이 무슨 엄살이야. 따로 나눠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부엌에서 뚜껑 달린 바구니 하나를 꺼내온 여인이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감자를 나눠 담았다. 

“아직 식사 전이면 같이 드시겠어요? 양은 넉넉하니 사양하지 말아요.”

아들의 손에 바구니 손잡이를 쥐여 준 여인이 올가에게 말을 건넸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길이 급해서요. 늦기 전에 찾아뵈어야 할 분이 있습니다.”

한사코 사양하는 올가의 손에 여인은 감자 몇 알이 담긴 꾸러미를 건넸다.

“어디까지 가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산 밑이라 이 동네는 해가 금세 진답니다. 집에 딸아이들도 있으니 어려워하지 말고 하룻밤 묵고 가시면 어떻겠어요?”

살가운 여인의 권유에도 올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는 댁에 신세를 질 예정이에요.”

“그렇담 다행이구. 한스, 네가 가시는 곳까지 모셔다드려.”

“한, 한스 바쁘다! 얼른 가야 해! 오늘 자고 올 거다.”

허둥대던 한스가 빠른 걸음으로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올가와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안심한 그가 뒤를 돌아보며 누구에겐지 모를 당부를 남겼다.

“쫓아오면 안 된다. 산에 뱀 나온다. 곰도 있다. 진짜 무섭다.”

저 녀석이 왜 저럴까. 당황해하던 여인이 다른 아들에게 올가의 배웅을 부탁했지만 그녀는 그조차 사양하며 예를 표했다. 

“행여 산 쪽으로는 발도 들이지 마세요. 새끼 낳은 짐승들이 한참 예민해져 있을 시기라 마주치면 큰 변을 당한답니다. 내 말 꼭 명심해요.”

지난겨울 발정기를 맞았던 늑대들이 새끼를 낳아 한참 젖을 물리고 있는 시기였다. 산길에 익숙한 이들도 이 시기에는 주변을 살피느라 평소보다 걸음이 늦어지곤 했다. 

여인의 조언을 한 귀로 흘리며 올가는 앞서 길을 떠난 청년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따돌리려 하는 걸까. 부러 험한 길을 택해 비탈을 올라가는 청년의 등을 올가는 악착같이 뒤쫓았다. 제 딴에는 몸을 숨기려는 것인지 덤불에 숨기도 했지만 워낙 덩치가 커 다 숨겨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올가의 노력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청년과의 거리는 현격히 벌어졌다. 타고난 지구력과 체력은 물론이오, 청년에겐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산길이 올가에겐 초행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한 번은 넘어지며 어설프게 짚은 수풀 주변에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걸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를 뻔하였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이 떠나가고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멀리서 짐승 우는소리가 들릴 때마다 올가는 주변을 경계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시 내려가 낮에 다시 올라올까. 아니야,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 사이 청년이 말을 옮겨 후궁이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한다면 기껏 잡은 실마리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봄은 왔으나 아직 일교차가 커 밤이 되자 몸이 떨릴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다. 후궁은 꽤 추위를 타는 편이었으니 불을 피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굴뚝 위로 솟아오르는 연기만 발견한다면 후궁이 숨은 곳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보름이라 환하게 떠오른 달이 대지를 공평히 비추고 있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나뭇등걸에 기대 몰아쉬고 있을 때,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온 뿌연 연기가 공중에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지? 어느 곳이야?

미친 사람처럼 헤매며 숲을 뒤진 끝에 올가는 절벽 아래 작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오두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미 지나쳐 온 곳이었다. 

저 불빛 속에 그토록 찾아 헤맨 후궁이 숨어 있을까.

나오세요, 프리아 님. 내가 그분의 곁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올가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나무를 꺾어 만든 막대기가 사방을 휘저으며 소음을 일으켰다. 그 길 끝이 늑대 굴을 향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여러 쌍의 노란 불이 한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이상을 느낀 올가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발소리를 죽이고 지척까지 다가온 숫늑대가 목표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목이 뚫리며 올가는 어느 오후, 그녀를 감싸 주었던 낯선 손길을 떠올렸다. 투병이 길어지며 치매 증상까지 나타난 노인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아끼던 여인 대신 낯선 계집이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노인은 불같이 화를 터트려 댔다.

황제에게 읽어 주기 위해 가져왔던 기도서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머리를 감싼 그녀의 머리 위에서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왜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지? 노망난 인간에게 맞아 죽는 것이 소원인가?’

설마.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 속으로 이마 위로 흐르는 피를 아무렇지 않게 닦아 내는 황손의 모습이 보였다. 시종들에 의해 제압당한 황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잠이 들 때까지 그녀는 구석에서 떨며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이후 황손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무는 일은 없었으나 올가는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온 초상화가 핏물에 잠겼다. 짐승의 사나운 발톱에 찢겨 알아볼 수 없게 된 초상화 위로 흙이 덮였다. 만족스러운 사냥을 마친 늑대들의 하울링이 고요한 산을 덮었다. 숫늑대의 신호를 받고 나온 암늑대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다가섰다. 

“피아를 찾는 사람이 왔다고?”

놀란 벤의 물음에 한스가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일인지 풀물에 옷을 잔뜩 더럽힌 한스가 감자가 든 바구니를 소중히 품에 안고 벤의 오두막을 찾아온 것이다.

“그 여자가 왔다. 그림에서 본 여자.”

“무슨 그림?”

자신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벤을 향해 한스가 벽을 가리켜 보였다. 

“대장간에서도 보고 빵집에서도 봤다. 한스 잘못 보지 않았어.”

“그 현상금 붙은 여자? 그 여자가 너희 집을 찾아왔다고? 왜? 빨리 말해!”

그제야 한스의 말을 알아들은 벤이 입을 크게 벌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 여자, 피아 그림 갖고 왔다. 엄마랑 형들에게 보여줬어.”

“그래서 말했어? 여기 있다고 말했냐고!”

“한스 말하지 않았다. 모른다고 했어.”

“잘했어. 앞으로도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벤의 당부를 들은 한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움직여 보였다. 엄마도 누나들도 모두 뱀을 싫어한다. 그래서 일부러 뱀이 자주 나오는 길을 찾아 멀리 돌아왔다. 역시나 뱀이 싫었던 것인지 그림에 나왔던 여자는 더 이상 한스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 너희 집에 있어?”

“없다. 뱀이 싫어서 가버렸다.”

“너네 집에 뱀 나와?”

“지네 나온다. 깨물면 아프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봤어야 하는 건데. 현상금이 도망갔잖아.”

한 푼도 아쉬운 상황에 그런 대어를 놓치다니. 현상금이 걸린 여자를 신고해 한몫 당당히 챙겼더라면 보석을 팔지 않아도 될 텐데. 벤은 아쉬운 마음에 한스를 독촉해 다시 한번 자세히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마을에 머물고 있다면 찾아내 기회를 노려 볼까.

일전 마을에 내려갔을 때,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사내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혹시나 싶어 누군가 그런 이를 아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한다고 한스와 릴리아나에게 단단히 당부해 두었다. 

현상금 붙은 여자가 왜 프리아의 그림을 갖고 있었을까. 프리아에게도 해를 끼치려고? 어쩌면 굉장히 높은 사람이, 황궁에 살고 있는 이가 프리아의 주인이었을지 모른다. 네 주인은 어떤 사람이야?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높은 사람이든 간에 한 번 버렸으면 그만이지, 왜 이제 와서 다시 데려가겠다는 거야?

아무리 힘이 세고 키가 크고 돈이 많은 주인이 찾아온다 해도 프리아는 그를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알훼니아로 돌아가 우리와 함께 살기로 했으니까. 아픈 몸이 나아 먼 길도 걱정 없이 떠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우리는 마차를 타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갈 거야. 

“릴리, 감자 먹어. 한스가 가져왔어.”

침대가에 붙어 앉아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여동생을 향해 벤이 손짓했다. 

“피아랑 같이 먹을래.”

“그럼 피아 일어나면 같이 먹어.”

“응.”

이미 식어 버렸지만 감자는 꽤 맛이 있었다. 한스와 감자를 나눠 먹으며 벤은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자고 가. 밖에 늑대 있어.”

“한스 자고 간다. 그렇게 말하고 왔다.”

“잘했어.”

체격도 나이도 한참 위인 한스의 등을 두드리며 벤이 만족을 표했다. 인형을 들고 꼼지락거리던 릴리아나가 침대 머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벤, 피아 코피 흘렸어.”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에 릴리아나가 차분한 어조로 제 오빠를 호출했다. 벤 역시 조용히 일어나 미리 준비해둔 물이 담긴 대야 앞으로 다가갔다. 벤이 능숙한 동작으로 수건을 적셔 피 묻은 입술과 턱 아래를 닦아 내자 릴리아나가 작게 뭉친 천을 가져와 잠든 이의 코 아래 갖다 댔다. 프리아의 손을 잡아 체온을 확인한 벤이 걱정되어 서 있는 한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작 더 가져다줄래?”

“알았어.”

실내의 온도는 지나치게 높아 다들 땀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 장작을 가져온 한스가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달그락거리는 소음과 함께 불꽃이 튀어 올랐다.

밤이 깊었다. 잠이 든 릴리아나를 토닥이며 벤이 한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좀 멀리 다녀올 거야. 어쩌면 늦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네가 여기 있어 줘.”

“한스도 같이 간다.”

“도둑으로 몰려 우리 둘 다 잡히면 어떻게 해? 한 명은 여길 지켜야지.”

“알았다. 그치만 벤 잡히면 구하러 갈 거다.”

“몇 대 좀 맞고 잡혀 있다 보면 풀려날 거야. 죽이기야 하겠어?”

가벼운 물건을 훔친 자에게는 몽둥이 찜질이, 귀족의 물건을 훔친 시종에게는 채찍질이, 황족의 물건을 훔친 이에게는 손이 잘리는 형벌이 내려진다. 최악의 상상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벤이 결심을 굳혔다. 이대로 죽게 둘 수는 없어. 의사를 불러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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