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04)화 (205/237)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올가는 무성하게 자라난 덤불 속에 몸을 숨기고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 들리는 것은 오직 새소리뿐. 올가를 뒤쫓아온 사람은 없었다. 

얼굴을 가린 것이 오히려 사내의 호기심을 유발시켰던 것 같다. 올가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눈 아래를 가린 천을 벗어던졌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다.

눈에 띄는 미형도, 추녀도 아닌 평범한 얼굴. 거리를 지날 때면 한두 명쯤 자신과 비슷한 인상을 지닌 여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황실에 해악을 끼친 죄인으로 수배당하고도 지금껏 잡혀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골목 어귀에 붙어 있던 수배 전단을 처음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어딘가 낯익은 여인의 초상 아래로는 어처구니없는 죄목과 함께 꽤 높은 액수의 현상금이 적혀 있었다. 

타인의 얼굴은 숱하게 그려 왔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얼굴이었던가. 올가는 신기한 눈으로 벽보에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닮고 또 어떻게 보면 닮지 않았다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초상화의 완성도는 높지 않았다. 실물을 보지 못하고 주변인이 말하는 인상착의를 조합해 그려 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해 여름, 아비가 부른 늙은 화공 앞에서 몇 벌 되지 않는 외출복을 차려 입고 긴 시간 자세를 취한 적이 있다. 노련한 화가는 지친 표정을 한 그녀에게 가상의 생기와 거짓으로 자아낸 교태를 덧씌워 꽤 그럴듯한 초상을 만들어 냈다. 

화공의 제자가 서둘러 복제한 그녀의 초상은 후처를 찾고 있는 늙은 귀족 가를 떠돌다 우연히 한 사내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구혼자를 찾기 위한 초상화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기 마련. 한창때의 황제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수수한 여인이었으나 지금 그녀에게는 황제가 찾는 두 가지 것이 있었다. 죽어가는 노인이 갈구하는 것. 건강한 신체와 젊은 나이.

한때, 성욕이 왕성했던 황제에게 하룻밤 안길 여인을 조달했던 그 사내는 올가의 아비에게 거금을 치르고 그녀를 데려갔다. 

황제의 여인이 된다니.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얼어붙은 그녀를 사내는 감언이설로 꾀었다. 다정하신 분이라 한번 손닿은 여인들에게도 평생 먹고살 재산을 내려 주신다며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한은 화려한 궁에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게 되리라 했다.

원했던 삶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운명이 나이 든 후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온갖 진귀한 것이 다 모여있는 황궁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또래의 젊은 귀족 사내 한 명 꼬여 내지 못하는 그녀를 일컬어 아비는 멍청하고 욕심이 없는 계집이라 폄훼했다. 

갖고 싶은 게 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가질 수 없었을 뿐. 그녀는 태생적으로 미를 탐하는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은 모두 값이 나갔다. 화폭에 옮겨 담으면 그것들은 모두 올가의 것이 되었다. 

황제의 여인이 되어 그 물건들을 실제로 가질 수 있게 된다니. 퇴락한 가문의 서녀인 자신에게 어째서 이런 기회가 찾아온 것일까. 오래지 않아 올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무리 영락한 귀족이라고 해도 내일 죽을 노인에게 제 딸을 바칠 부모는 없었던 것이다. 

황제의 침실은 아름다웠으나 누워 있는 황제에게서는 악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제의 정부라는 것은 그저 허울뿐, 실제로는 침대를 데우기 위한 화로나 다름없었다. 

‘더럽고 추악한 늙은이.’

비싼 옷을 입고 값나가는 것을 걸치게 되었지만 마음은 늘 진창을 구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가득 찬 황궁의 복도를 걸어도 옮겨 그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희미한 인상에 늘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자신을 알아보는 이는 적었으나 그녀는 짙은 베일을 벗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위를 이을 후계자인 황손이 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쓰러진 조부를 대신해 외유를 떠났다던 황손이 일정을 마치고 환궁한 것이다. 침실과 이어진 곁방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올가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젊은 황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태어나 눈으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첩이 온통 그의 초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된 지도 꽤 여러 날이 흘렀다. 특징이 없어 쉽게 기억에 남지 않는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알아보는 이들이 늘었다. 벽보에 적힌 현상금의 힘일 것이다. 시녀장의 짓일까? 잠시 생각하던 올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녀장이 아니다. 이건 폐하께서 지시하신 일이야. 폐하께서 나를 필요로 하고 계셔. 

황홀한 부름이지만 지금 달려갈 수는 없다. 황제가 자신을 찾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 유폐궁에 잠입한 이유를 추궁하고 후궁의 행방을 묻기 위함일 것이다.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이보다 한발 앞서 후궁이 숨은 곳을 알아내야만 한다. 무른 성격의 후궁은 차마 자신을 내치지 못할 것이며 황제는 그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올가는 두 번의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 첫 번째로는 후궁에 대한 황제의 맹목을 가벼이 여기고 사통을 고한 것. 두 번째로는 조급한 마음에 후궁에게 탈출을 종용한 것이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후궁의 마음을 돌리고 함께 빠져나왔거나, 황제의 귀환을 기다리며 후궁의 곁을 지켰어야 했다. 기력 없이 누워 있던 후궁이 어떻게 혼자서 유폐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후궁에게 돌려준 약의 힘일까. 어쩌면 따로 내통하던 조력자가 있었을까. 

그날 이후 수십 번 생각해 보아도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후궁을 찾아야 황제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승전식이 있었던 날, 놓쳐 버린 금발의 사내는 후궁이 틀림없을 것이다. 축복받은 삶이다. 부유한 대공 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아쉬운 것 하나 없이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왔겠지. 신이 공들여 빚어낸 수려한 외모 덕으로 결국 황제의 마음까지 거머쥐었다. 

어째서 누군가의 삶은 이토록 빛이 나고 다른 이의 삶은 진창을 굴러야 하는가. 올가와 후궁은 황제에게 바쳐진 몸이라는 같은 조건에 놓였지만 그 대상이 달랐기에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신과 후궁의 삶이 바뀌었다면 황제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는 않았다. 천덕꾸러기 서녀에서 벗어나 황궁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전보다 한층 나아진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 

후궁에 대한 자신의 마음 또한 그저 단순한 질시가 아니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후궁의 모습을 볼 때면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가 자신 외엔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신세라는 걸 떠올리면 등줄기가 오싹하도록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황제가 지닌 아름다움이 차갑고 단단한 보석 같다면 후궁이 지닌 미는 눈의 결정 같아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져 버릴 듯한 위태로움이 있었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면 세상의 더러움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은 황홀경을 느낀다. 한 번도 실물로 가져본 적이 없기에 올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소유할 뿐이다. 

이 눈으로 보고 그리고 싶다. 후궁을 찾아 헤매는 황제의 절박함과 비통함을, 빈사에 이른 후궁의 마지막 숨을.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올가는 오로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산야를 헤매 다녔다. 얼마나 걸었을까.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무심코 멈춰 섰을 때, 주변은 온통 황혼이었다. 

갓 쪄낸 감자를 바구니에 담아 마당으로 나온 중년 여인이 초라한 행색을 한 그녀를 보고 멈춰 섰다. 

“누굴 찾아요? 이 동네는 집과 집 사이가 멀어서 다음 집은 또 한참 걸어야 하는데.”

“찾는 이가 있습니다. 혹 이 그림에 그려진 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인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올가가 꾸러미에서 프리아의 초상을 꺼내 들었다. 올가에게서 종이를 받아든 여인이 천천히 초상을 살폈다.

“곱게도 생겼네. 난 늘 집안에만 있어서 외지인을 볼 기회가 없거든. 우리 애들에게도 물어볼게요.”

여인이 집안에 대고 소리치자 청년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에게서 초상을 받은 아들들이 번갈아 그림을 살펴봤으나 알아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로 숨었기에 모습을 본 이가 이토록 존재하지 않는 걸까. 후궁으로 오인하고 따라갔던 외지 청년과 돈을 받고서야 입을 연 상인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이를 보았다는 사람조차 나오지 않았다. 실망한 올가가 초상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다 저녁에 어딜 또 가려고? 애기들 집 가려거든 이 감자나 좀 가져가.”

뒤늦게 집에서 나온 거구의 청년에게 여인이 말을 걸었다. 

“애기 아니다. 애기라고 하면 릴리가 화내.”

그의 말을 들은 다른 청년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제 동생을 놀려댔다.

“이러다 우리 한스, 그 꼬맹이에게 장가드는 거 아냐?”

“뻔질나게 드나드는 걸 보니 꿀단지라도 묻어 둔 거 같은데?”

“아니다. 릴리는 색시 아니라 친구다. 릴리와 벤, 피아 모두 한스의 좋은 친구다.”

형제들의 놀림을 받은 청년이 화난 얼굴로 답하자 여인이 아들들에게 지청구를 놓았다.

“어린애 두고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부모 마음에 생채기 맺혀.”

“피아는 또 누구야. 꼬맹이 하나가 더 늘어난 모양이지?” 

“피아는 꼬맹이 아니다. 어른이다. 둘째 형이랑 똑같다. 스물다섯이다.”

“그럼 장가를 갔겠네. 새로 이사 온 사람이야?”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올가가 키 큰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그분, 제가 찾고 있는 사람 같은데 이 그림 좀 봐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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