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황제가 뛰쳐나가는 모습을 본 시종장이 황급히 노구의 몸을 일으켰다.
“저하,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말없이 사라지시면 아니 되십니다!”
황제의 뒤를 쫓아 계단을 오르는 시종장에게서 뒤늦은 당부의 말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삐걱거리던 소음이 멎은 뒤, 기르는 구석에 놓인 궤짝 앞으로 다가섰다. 가죽으로 표면을 두른 양장본의 책장을 넘기자 반으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편지를 마저 읽지 못하고 있던 자리에 도로 끼워둔 것이었다. 다시 종이를 펼쳐 들었다. 정갈하면서도 우아한 필체,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다.
『기르에게.
고생 많았지? 돌아와 줘서 기뻐. 형님들과 형수님들은 잘 계시는지, 조카들은 잘 자라고 있는지 직접 묻고 싶었는데 들을 수 없게 되어 아쉬워.
기르가 돌아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면 난 먼 곳에 가 있을 거야. 어떤 표정으로 이 편지를 읽고 있을까. 상상해 봤어. 화를 내겠지? 어찌 약 하나 관리하지 못하고 이 사달을 일으켰다고 야단치고 싶을 거야.
미안해. 기르가 힘들게 만들어 준 귀중한 약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어. 어쩌면 그 일 때문에 기르도 고초를 겪게 될지 몰라. 기르까지 의심받게 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황가의 일원임을 밝혀 꼭 무사히 위기를 넘겨주었으면 해.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살게 해준다는 약속을 기억해? 어린아이였을 때는 그 나이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었지.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나는 25번째의 생일을 무사히 맞게 되었어. 고마워, 기르. 약속을 지켜 줘서.
기르가 아니었다면 여섯 살의 봄도, 열 살의 여름도, 열다섯의 가을과 스물네 살의 겨울도 맞이하지 못한 채 이른 여행을 떠났을 거야. 작고 약했던 어린 내가 어른으로 자랄 때까지 지켜 줘서 고마워.
나의 유년기와 소년 시절은 늘 기르가 주는 가르침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어. 기르는 내게 스승이자 엄마였고 아빠였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알려 준 나침반이기도 했어.
나는 이제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해. 낯선 곳으로 가 낯선 이들을 만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을 보며 잠이 들 거야. 걱정하지 마. 기르가 알려 준 대로, 내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조심히 행동하며 앞으로 나아갈게.
슬퍼하지 마. 둥지를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다면 영원히 나는 법을 익히지 못할 것이라 내게 말해 줬잖아? 모든 새는 날기 위해서 한번은 추락을 경험한다고, 밖에 나가지 않고서는 꽃의 아름다움도, 이슬의 단맛도, 흙의 보드라움도 느끼지 못할 거라고 했지?
나는 이미 여행을 시작했어. 알훼니아를 떠나오던 그때, 이미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던 거야.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 지난가을 기르가 나에게 찾아와 줬던 것처럼.
많이 반가워하겠지만 나는 이제 기르와 함께하지 않을 거야. 나에게 내 길이 있는 것처럼, 기르에게는 기르만의 길이 있을 테니까. 나로 인해 오래 멈추었던 그 여행을 다시 떠나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
기르가 내게 그래 줬던 것처럼 언제까지나 행복하기를, 자유롭기를 바라고 있을게.
안녕, 나의 스승, 나의 아빠, 내 생의 길잡이였던 기르에게.
온마음을 담아 사랑과 감사를 전합니다.
언젠가 기적처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프리아』
황가의 장자로 태어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성장했던 형은 형제들을 아끼면서도 언제나 의심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황후 소생은 아니었으나 황제가 가장 사랑하던 후궁의 몸에서 난 황자라는 이유로 그에게서 기르는 가장 견제받는 동생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르는 애초부터 욕심내지 않았던 황위에 더욱 무관심함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이들을 만나지 않고 장서관에 틀어박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내렸다. 그 과정에서 과학과 의학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실험을 거듭하는 동안 세월이 흐르고 황태자였던 형은 황제로 등극했다.
황가의 부를 누리며 행사 때마다 자리를 채우는 고루한 황족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실험 중에 일어난 사고를 계기로 그는 제국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한 계절 잠시 머무르고자 들렀던 먼 나라의 성에서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보름만 더, 몇 달만 더, 이 아이가 조금 더 자라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출발을 유예하는 사이에 스무 해의 시간이 흘러갔다.
혼자가 좋았으나 슬그머니 다가와 곁에 앉는 작은 몸을 내칠 수는 없었다. 자유를 갈망했으나 어디서건 그를 따라오며 눈을 빛내는 어린 천사에게 품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적을 원했지만 귓가에서 재잘대는 참새 같은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무심코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렇게 보모가 되고 스승이 되었으며 부모가 되었다.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작은 팔다리와 상기된 붉은 뺨, 제멋대로 달라붙어 헤실거리며 부벼 오는 부드러운 볼, 귀찮게 따라다니고 끊임없이 말을 붙여 왔으며 세상 온갖 것이 궁금하고 신기한 작은 아이를 그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다 자랐다는 걸 알면서도 아픈 몸을 핑계로 독립을 미뤄 왔다. 아이가 이미 제 손을 놓고 세상을 향한 비행을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작던 아이는 어느새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낯선 이를 만나 사랑하며 혼자서도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프리아와 젊은 황제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어떻게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주고받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프리아가 이룩한 세계이며 그가 없는 곳에서 홀로 이뤄낸 성취였다.
새파랗게 젊다 못해 어리게까지 느껴지는 황제의 눈에 담긴 격정이 진심임을 알고 있다.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를, 거침없는 열정을, 잔인하도록 서툴고 곧은 연심을 외면하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기르는 프리아에게 마음에 치는 파도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가르칠 수 없었다. 출렁이지 않는 것은 바다가 아니며 날갯짓을 멈춘 새는 추락할 뿐이다. 생각을 어찌 멈출 것이며, 감각을 차단할 것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황제의 저 눈부신 젊음은 타오르는 불이다. 그 불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손을 내민다면 어찌 될 것인가. 황제의 격정은 프리아의 마음을 흔들고, 심장을 요동치게 해 발병을 가속화시켰으며 발작을 불러왔고, 이제는 생의 시계를 앞당기고 있었다. 이 사랑의 끝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기르는 프리아의 편지를 다시 접어 기름종이로 감싼 후 품 안에 넣었다. 기름종이를 다시 짐꾸러미에 돌려놓기 위해 입구를 열자 그 안에 있던 낡은 책 한 권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국으로 오는 도중 찬비를 여러 번 만나 유리병에 밀봉해둔 환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젖어 버리고 말았다. 초라한 여관에 도착해 벽난로 불에 젖은 옷가지와 소지품을 말리고 있을 때였다. 물에 젖어 붙어버린 책장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고 빠른 건조를 위해 불빛 위로 가져갔다.
불빛을 받은 종이 뒷면으로 무언가 비춰 보이는 것이 있었다. 검게 적힌 본문의 글자와 흰 공백 사이에서 주홍색의 철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주홍의 철자를 조합해보았으나 그 뜻은 이어지지 않았다. 기르는 나타난 철자를 종이에 옮겨 여러 방식으로 해독하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알리기 위해 문을 두드린 여관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기르는 그 사이 반나절의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해석한 문장의 일부를 기르는 지금 이 순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한번 실패한 자에게 다시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죽음을 되돌리기 위해선 다른 목숨이 필요하다.」
만약 자신이 찾아내기 전에 프리아의 시간이 멈춘다면. 이미 저승의 문턱을 건넌 이후라면.
황제가, 저 치기 어린 젊은 사내가 해낼 수 있을까.
그는 프리아를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잠시 생각하던 기르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는 모든 힘을 동원했지만 아직까지 프리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시선으로 추적한다면 그는 영영 프리아가 숨은 곳을 발견해내지 못할 것이다.
툭하면 숨어 버려 유모와 자신을 곤란하게 하던 아이였다. 하루 종일 찾지 못해 속을 태우다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달려가는 일도 많았다. 이곳에 이런 틈이 있었던가. 숨은 공간이 존재했구나. 뒤늦게 알아차리고 한숨지을 때면 아이는 제 잘못을 모르는 말간 얼굴로 두 눈만 끔벅거리곤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숨바꼭질이다. 가장 좁은 틈, 타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 기르는 이 저택에서부터 프리아가 걸어갔을 길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본 적이 없는데…….”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내가 여인에게 초상화를 돌려주었다. 마른 체형의 사내는 천으로 얼굴 아래를 가린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며 시선을 흘끔거렸다.
“모시는 분이라 했소? 왜 집을 나가셨을까.”
“이쪽으로는 오시지 않으셨나 봅니다. 살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둘러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뜨려 하는 여인을 사내가 붙잡았다.
“그런데 그쪽은 좀 낯이 익은데 말이야. 그 천 좀 내려봐 줄 수 있을까?”
“이 손 놓으십시오. 놓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그런다고 내가 겁먹을 줄 알고? 어디 소리 질러 봐. 누가 오는지.”
사내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여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당신 같은 이를 찾는다는 벽보를 본 적이 있거든. 얼핏 보면 흔한 얼굴이긴 한데 내가 꽤 눈썰미가 좋단 말이야?”
손목을 잡아챈 사내에게서 빠져나오려 힘을 주던 여인이 품 안에서 단도를 꺼냈다. 망설임 없이 손등에 내리꽂히는 공격을 피하지 못한 사내가 크게 비명을 내질렀다.
피가 쏟아져 나오는 손을 붙잡고 신음하는 사내에게로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엉성하게 복부를 스친 칼날이 사내의 옷을 찢어 놓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공격 의지를 상실한 사내에게로 여인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여기 사람 죽네! 도와주시오!”
어느새 흘러내린 두건을 다시 올려 쓴 여인이 가게를 뛰쳐나갔다. 중심가와 꽤 떨어진 곳에 있어 사내의 비명은 고작 그의 귓전을 울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