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02)화 (203/237)

“제가 프리아 님께 이 환약을 드린 이유가 무엇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저에겐 자식이 없습니다만 그에 가장 가까운 이를 찾으라 한다면 프리아 님일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것이 독인 줄 알면서도 내어 주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일 것입니다. 자식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프리아가 맹독을 내어 달라 했다고? 기르의 말을 들은 오웬의 눈동자가 혼란에 휩싸였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프리아 님의 몸이 독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독이 되지만 프리아 님에게는 병의 악화를 막아 줄 치료 약일뿐이었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세상 어디에 그런 약이…….”

기르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오웬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뒷말을 잇지 못한 채 다시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프리아 님을 낳은 대공비에게는 친정에서부터 따라온 나이 든 유모가 있었습니다. 모계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주술과 치료법을 익힌 유랑민 출신의 여인이었지요. 마녀로 몰려 처형당할 수도 있는 위험하고도 기이한 의술이었습니다. 하여, 여인은 자신의 재능을 감춘 채 평생을 충실한 귀족 가의 하녀로 헌신했습니다.”

무덤덤한 어조로 기르가 말을 이었다.

“자신이 곱게 키워 낸 대공비가 어린 자식 하나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아기는 어미를 닮아 천사 같은 아름다운 외양을 지녔으나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여인은 소중한 자신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금단의 치료법을 행하기 시작했지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으나 그 치료법은 서서히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설마 프리아 님이셨습니까?”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든 시종장이 탄식했다. 기르는 대답 없이 궤짝 위에 놓인 이야기책에 시선을 주었다.

“아이가 네 살이 되던 무렵 떠돌이 연금술사가 대공의 성을 찾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소로 배정받은 동쪽 탑에서 어린아이를 발견했지요. 처음 보는 손님이 신기했는지 아이는 매일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낯선 이의 연구실을 찾곤 했습니다.”

오웬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적 드문 성내를 뛰어다니는 어린 프리아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달아올라 붉은 뺨을 한 어린아이가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복도를 내달린다. 마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한 광경이 그의 뇌리 속에 펼쳐졌다.

“오래지 않아 그는 아이의 건강 상태가 예사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모가 아이를 살리고자 내린 처방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몸의 신경 체계는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고 선천적으로 약했던 심장에도 큰 무리가 가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대로는 한두 해도 채 버티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될 운명이었지요.”

“어찌 그런 일이…….”

침통한 표정으로 시종장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황실의 자손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훌쩍였다.

“제가 프리아 님의 주치의가 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가능한 독을 중화시켜 정상적인 몸으로 되돌리려 했지요. 그러나 이미 독성에 적응해 버린 신체는 크게 반발했습니다. 치료 과정 중에 유모가 세상을 떠나고 저는 프리아 님을 데리고 산과 들을 다니며 약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시행착오 끝에 병의 증세를 약화시키면서 심장으로 가는 무리를 줄일 수 있는 약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웬과 시종장의 시선이 유리병에 든 환약으로 모였다. 병을 가득 채운 짙은 색의 구체를 보며 오웬은 프리아의 소지품에서 저 동그란 알약을 발견해 냈던 그날의 일을 아프게 떠올렸다.

“적은 양으로 생명체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이 독약이 프리아 님에게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자식 같은 이에게 이런 위험한 것을 쥐여 준 이유는 오직 한가지뿐. 내 아이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시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오직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진실입니다.”

확실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 속에서 오웬은 그동안 그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여러 의혹들을 풀 열쇠를 발견해 냈다.

“그 약만 드시면 건강해지실 수 있는 거지요? 저하, 대답해 주십시오.”

시종장의 질문에 답하는 기르의 표정에 오래 간직해온 비통이 서렸다.

“증상을 약화시키고 고통을 덜어 줄 뿐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하네.”

“그게 무슨 말이야?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약이 있으니 이제 프리아만 찾으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오웬의 귀에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계셨을 겁니다. 어린아이에겐 그저 먼 미래일 것이라 생각해 스물다섯이란 숫자를 말씀드렸지요. 가슴속 깊이 바라면서도, 그 작던 아이가 자라 무사히 십 대를 버텨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기적이었지요.”

프리아의 생일은 겨울이라고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이하고서야 한 해를 무사히 보냈다며 기르와 축하하곤 했다는 그 말의 의미를 오웬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겨울이 끝났다. 프리아는 이제 스물다섯이 되었다. 

“기적이라고? 방법이 없다고? 그럼 이 제국으로 온 이유가…….”

죽기 위해서였다. 어린 조카를 대신해 사내의 몸으로 후궁이 되어 제국 행을 결심한 이유가 죽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조카를 지키기 위해.

그렇다면 나는.

나는 대체 너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자신의 병을 숨긴 채.

그 수많은 밤을 함께하면서도.

‘……영원히 안녕.’

프리아가 남긴 인사의 이유를 오웬은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고. 혼자 작별한 채 모습을 감춰 버리다니.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프리아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버텨 냈던 전장의 날들이 오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가 죽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

어딘가에서 분명 살아 있을 거라고. 네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슬퍼했는지 알아?

후궁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시녀의 말을 듣고도, 불러낸 태의에게서 증상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이토록 잔인하게.

잔혹하게 이별을 고할 수 있는가.

‘나는 사람이 죽는 게 싫어. 내가 죽이는 것도 싫지만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도, 죽은 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싫다. 그러니 내 앞에서 오해할 짓을 하지 마.’

그 순간 오웬의 머릿속에 지난여름 프리아에게 사과하는 대신 변명처럼 꺼냈던 그 말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프리아는 무슨 얼굴을 했던가.

“정녕 방법이 없습니까? 저하, 무슨 말이라도 해 주십시오. 약을 저렇게 많이 준비해 오셨으니 프리아 님을 찾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이곳에 오기 전에 시녀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네. 약이 없는 상태로 유폐궁에 가게 되었으니 하루하루 상태가 악화되었을 테지. 여기 예비로 남겨 두었던 약이 스무 알이네. 어느 정도 시간은 벌게 해 주었겠지만 남은 약이 없을 걸세. 앞으로는 몇 배로 양을 늘려 투약해야지만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거야.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어서 찾아야 하네.”

주변의 대화가 들려오지 않았다. 귀가 웅웅거리고 머리가 깨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으며 구역질이 올라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웬은 지하실을 뛰쳐나와 썩은 계단을 올랐다. 무슨 정신으로 빠져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숲이 우거진 낯선 땅에서 오웬은 조여드는 심장을 느끼며 몸을 숙이고 불규칙적으로 터져 나오는 숨을 골랐다.

프리아가 떠난 이유를 생각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여러 생각 끝에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그의 결정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던가.

태후의 말만 믿고 사랑하는 이를 내칠 것이라 생각했나.

내가 그에게 한 행동들이, 꺼내어 보인 마음이 고작 그에게는 후궁을 대하는 황제의 변덕으로만 느껴졌던가.

소리 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생애 첫사랑이다.

처음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보였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사랑해 주리라 믿었다. 

전장으로 떠나며 그를 추궁하고 외면했지만 그건 잠시간의 삐걱거림 일뿐, 곧 돌아와 그를 품에 안고 용서를 구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런 이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미친 사람처럼 그를 향해 헤매이며 원망하기도 했다. 프리아, 왜 나를 믿지 못했지?

이제야 그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에게 죽음을 선사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꺼낸 말이 그를 떠나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자신이 한 것은 산자의 이기적인 사랑.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과 함께 자라온 프리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놓을 수 없어.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너의 일방적인 이별은 받아들일 수 없어.

오웬은 아직 작별하지 않았다. 곧 프리아를 찾아 모든 걸 되돌려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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