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낡은 계단 위로 오웬은 발을 내려놓았다. 썩은 티가 역력한 외관과는 다르게 나무 계단은 시끄러운 비명을 질러 대면서도 제법 충실하게 제 몸을 딛고 선 자를 지탱해 주었다.
“폐하! 몸조심하십시오! 소신이 곧 따르겠습니다!”
아직 구멍에서 발을 빼지 못한 시종장이 애타게 부르짖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오웬은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남루한 겉모습은 그저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 사내에게서는 오랜 세월 몸으로 체득한 고아한 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족인 아비에게 받은 교육만으로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아무리 신분 높은 귀족이라고 해도 황족이 아닌 이상 황궁에 들어서면 어느 정도 주눅 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사내에게선 오랜만에 돌아온 제 집을 대하는 듯한 여유와 익숙함이 느껴졌다. 지난가을 백조궁에서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원인이기도 했다.
타국의 여인에게서 본 자식에게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애티튜드를 익히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 언젠가 제국에 돌아와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자손에게 부와 권력을 물려주기 위한 포석의 일부였을까. 그토록 제국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면 왜 오랜 세월 돌아오지 않고 변방을 떠돈 것일까.
순간 프리아가 소지했다던 많은 양의 독약을 떠올린 오웬이 자신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위해 모든 걸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의심하는 우스꽝스러움이라니. 서글픈 권력자의 비겁한 천성이다.
닫힌 문 앞에 도착한 사내가 오웬을 바라보았다. 오웬 자신이 그에게 숙부로서의 공경을 허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눈에도 역시 제국의 황제를 향한 경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사내가 안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아담한 실내로 들어서기 전 오웬은 빠르게 안을 살펴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자신을 경계하는 오웬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사내가 로브를 벗어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였다.
“염려하시는 이유는 이해하나 이 안에 무엇 하나 위험한 것은 들여놓지 않았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제 아이를 위한 휴식처였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사내가 먼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작은 방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함께 1인용 소파가 둘, 그리고 몸을 뉘일 수 있는 장의자가 벽 쪽으로 하나 놓여 있었다.
구석에 있는 궤짝으로 시선을 옮긴 사내의 눈에 일순 애틋함이 깃들었다. 궤짝 위에는 접힌 모포 한 장과 함께 몇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 오웬은 프리아가 즐겨 읽던 이야기책의 제목을 발견해 냈다.
“이곳은…….”
“혼자 쉬고 싶을 때 들리라 했지요. 이번엔 꽤 오래 머물다 간 모양입니다.”
“프리아가 여길 다녀갔다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말이냐? 왜 입구를 치워 놓지도 않았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상처에 감염이 될 것인데!”
1층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부러진 기둥과 썩은 가구를 떠올리며 오웬이 험한 눈빛을 보냈다. 이제야 썩은 나무 바닥에서 벗어나 아래로 내려온 시종장이 그 말을 듣고 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지었다.
“너무 하시옵니다! 폐하! 소신을 그리 위험한 곳에 홀로 내버려 두시다니요!”
억지 눈물을 보이던 시종장은 멀쩡한 다리를 떨며 소파 쪽으로 기어가 앉았다.
“저하! 제 발 좀 보아주십시오. 가시에 찔려 피가 나는 것 같습니다. 벌써 열이 나는 것 같아요.”
축 늘어진 시종장에게 다가간 기르가 신발을 벗겨 발을 살폈다. 상처 하나 없는 맨발을 보면서도 시종장은 엄살을 부리며 울상을 지었다. 매몰차게 발을 내려놓은 기르가 오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못 짚으셨습니다. 애초에 무분별한 출입을 막기 위해 그리 둔 것이지요.”
“다른 출입구가 있다는 뜻이냐?”
“모두가 쉽게 알아챈다면 은신처라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은신처라니. 프리아에게 왜 그런 곳이 필요해? 타인의 눈을 피해 편히 쉬고 싶었다면 오웬 자신의 처소도 있었다. 시설뿐 아니라 보유한 장서를 따져 보아도 다 쓰러져 가는 이 폐가 따위보다는 자신의 다락방 쪽이 월등했다. 다녀간 흔적 하나 찾아볼 수 없던 다락방을 떠올리며 오웬이 기르를 쏘아보았다.
“벽에 빗금을 남겨 두었더군요. 프리아 님께서는 보름간 이곳에 머무셨던 것 같습니다.”
벽난로 옆 어두운 벽을 가리키며 기르가 말했다. 그 앞으로 걸어간 오웬이 벽에 새겨진 작은 빗금을 바라보았다.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넷, 중심을 가로지른 선이 하나, 날짜의 흐름을 알려 주듯 다섯 개씩 묶은 낙서 흔적이 총 세 군데 남아 있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지냈지? 시중들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무얼 먹으며 지냈느냔 말이야.”
분노와 안타까움이 섞인 오웬의 말을 들은 기르가 쓸쓸히 미소 지었다. 그는 궤짝을 열어 오웬에게 텅 빈 유리병과 바닥을 드러낸 단지를 보여 주었다.
“간식으로 먹으라고 둔 것인데 양은 조금 부족했을 듯싶습니다. 시녀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제 몸 하나는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아이입니다. 그렇게 키웠지요.”
“내 후궁의 아비라도 되는 양 말을 하는군. 대접을 받고 싶다면 노선을 확실히 해. 국구가 되고 싶은지, 내 숙부 행세를 하고 싶은 건지.”
오웬의 비아냥을 들은 기르가 시종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시종장은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연거푸 멀쩡한 발을 주물러 댔다. 그렇게 된 거로군. 세대를 뛰어넘어 황제의 숙부가 되어 버린 기르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그저 변방을 떠도는 식객에 불과할 뿐이지요. 제 위치는 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황가의 핏줄임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기르의 말을 들은 시종장이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식객이라니요, 저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황궁은 저하께서 나고 자란 곳이 아니옵니까? 돌아가신 선황 폐하께서 들으셨다면 얼마나 서운해하셨겠어요?”
사내가 황실에서 태어난 황자라도 되는 양 말하는 시종장의 발언에 의문을 느낀 오웬이 눈썹을 찌푸렸다.
“궁에서 나고 자랐다니 무슨 말이지? 저자를 칭할 때 저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야?”
헉. 그제야 말실수를 깨달은 시종장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제가 또 기르 님을 저하라 불렀군요. 기르 님께서는 보다시피 너어무 기르하르트 저하와 닮으셨고 이름도 같으셔서 마치 도, 돌아가신 저하께서 살아 돌아오신 듯, 저도 모르게 저하를 자꾸 저하라 부르게 되나 봅니다.”
산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 버린 시종장의 변명에 기르는 잠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으나 반박하지 않았다.
“제 나이가 어느덧 예순을 넘고 보니 깜박깜박 놓치는 것도 많고 눈앞도 침침하여 저하께서는 저하가 아니시거늘 저하라 칭하게 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하. 아니, 폐하.”
“그리 힘들면 후임을 정해서 올려보내. 돌아가는 대로 승인해 줄 테니.”
오웬의 차가운 말에 충격받은 시종장의 푸념이 한동안 이어졌다. 후임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저 아직 창창한 나이옵니다. 그 미욱한 것들이 어찌 그 자리의 무게를 감당하겠사옵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니 차를 올리겠습니다.”
벽난로를 피운 기르가 밖에서 물을 가져와 찻주전자를 올렸다.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오웬이 지친 몸을 소파 위로 기댔다. 보름간 여기서 무얼 하며 보냈을까. 얼마나 숨죽이고 있었기에 태후가 온 궁을 이 잡듯 뒤졌어도 흔적 하나 발견하지 못해. 불을 피우면 굴뚝으로 연기가 새어 나가 바로 들켰을 것이다. 온기 없이 겨울날을 이곳에서 모포 한 장으로 버텼을 프리아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오웬의 손이 낡은 천 위를 쓰다듬는 것을 본 기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세 개의 잔 위로 천천히 찻물을 따랐다.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먼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 보이는 기르의 행동에 오웬의 심기가 뒤틀렸다. 숙부 건 숙부 할아버지 건 간에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내다.
“위험한 것은 들여놓지 않았다 말씀드렸지만 수정해야겠군요. 프리아 님께는 해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두 분께는 다르니까요.”
구석에 놓아두었던 짐 꾸러미에서 밀봉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든 기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병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본 오웬이 표정을 굳혔다.
“그 물건은 역시 당신이 프리아에게 넘긴 거로군.”
저 물건으로 인해 프리아가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고 결국 자신의 곁을 떠나 버리고야 말았다. 일순 치밀어 오른 분노를 참지 못한 오웬이 손에 든 찻잔에 힘을 주었다. 손잡이에서 떨어져 나간 찻잔이 순식간에 바닥을 굴렀다. 조각난 잔에서 새어 나온 물이 양탄자 위로 얼룩을 만들었다.
“폐하!”
놀란 와중에도 찻잔은 얌전히 탁자 위로 내려놓은 시종장이 오웬의 손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외려 깨진 조각을 갈무리하던 시종장이 손가락을 베이는 사고를 입고 말았다.
“적절치 못한 행동을 보이시는군요. 그런 화풀이는 곁에 있는 이를 힘들게 할 뿐입니다.”
짐 꾸러미에서 구급약을 꺼낸 기르가 능숙한 솜씨로 시종장의 손가락에 붕대를 감았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저 물건으로 인해 프리아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어?”
알고 있다면 감히 그 뻔뻔스러운 낯짝을 황궁에 내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분노로 온몸을 떠는 오웬에게 기르가 무심한 말투로 답했다.
“알고 계시다시피 이 약은 제가 독초에서 뽑아낸 성분을 배합해 만든 것입니다.”
“말해. 무슨 의도로 그런 위험한 것을 프리아에게 쥐여 주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