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00)화 (201/237)

자식처럼 기른 아이가 몇 달째 행방불명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상을 후궁 프리아가 아닌 제 손으로 길러 낸 젊은 황제라 생각하니 금세 답이 나왔다. 애간장이 타고 피가 마르고 상황을 그렇게 만든 이들에 대한 분노가 솟구칠 것이다. 

이제는 다 자라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가 되었건만 여전히 자신의 눈에는 보살펴 드려야 할 황손 저하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눈에도 프리아는 일국의 후궁이 아니라 늘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품속의 어린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먼저 만나 조심스럽게 상황을 전달할 생각이었던 시종장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크게 분노해 본인의 정체를 밝히고 질손을 꾸짖으려 드신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자신은 그와 함께 청년기를 황궁에서 보냈기에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가 떠나고도 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태어난 까마득한 질손이 아닌가.

사람이 수십 년째 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을 어찌 믿을 것인가.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거나 자신을 능멸한다고 여겨 분노를 터트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이에 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시종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종조부와 질손 간의 칼부림 사태만큼은…….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폐하, 기르 님을 뵙기 전에 제가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시종장은 식은땀이 배어나는 이마를 떨리는 손으로 훔치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제가 눈빛으로 무언의 허락을 보냈다.

“돌아가신 선황 폐하께는 여러 형제가 있으셨지요. 저 멀리 비요른 지방을 통치하고 계신 빌헬름 대공뿐 아니라 재작년에 돌아가신 게르톤의 태후께서도 폐하께는 대고모가 되시고요. 그리고 워낙 어리실 때라 기억하지는 못하시겠지만 작고하신 요하네스 대공께서도 폐하를 무척 아껴 주셨…….”

“가계도를 전부 읊을 생각이 아니라면 본론만 꺼내도록 해. 한두 번 뵈었다고 까먹을 멍청이는 아니니까.”

“아이고, 기억하고 계셨군요. 참으로 영특하십니다.”

어린 황손을 대하듯 간지러워진 시종장의 말투에 오웬이 불유쾌한 시선을 보냈다. 성인이 된 지 몇 년이 지났거늘 아이 보듯 대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분 외에도 선황 폐하께는 오래전 헤어져 소식을 듣지 못한 동생분이 계셨습니다. 선 선대 황제 폐하께서 아끼시던 후궁에게서 본 황자 님이셨지요. 서른다섯이 되시던 해에 궁을 떠나신 이후 통 소식을 듣지 못하였는데 작년 가을 예상치 못한 분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늙지도 않은 팽팽한 얼굴로 나타나셔서는 폐하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셨답니다. 금쪽같이 기른 프리아 님을 폐하께서 홀랑 잡아먹어 버리셨으니까요. 한술 더 떠 폐하께서는 종조부 어르신을 연적으로 오해하시고는 씩씩거리며 저에게 정체를 알아내라 추궁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진땀을 뺐겠습니까? 시종장은 차마 그리 고할 수는 없었다.

“그분께서는 돌아가신 줄 알았던 기르하르트 저하와 쏙 빼닮은 얼굴을 하고 계셨어요. 제가 어찌나 기절초풍을 했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밤에도 벌떡 일어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는…….”

“내 종조부의 아들이니 숙부가 되는 것이다. 그 간단한 말을 뭘 그렇게 돌아서 하지?”

같은 말을 반복하던 시종장의 설명을 오웬이 잘라 냈다. 선수를 빼앗긴 시종장은 꿀 먹은 입이 되어 침만 가득 삼킬 뿐이었다. 아니,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그럴듯한 공국의 적녀와 혼인이라도 했다면 기록이 남아 있었겠지. 종조모의 신분이 변변치 않았던 게로군.”

선황이 반대하는 혼인을 해 소식이 끊긴 것이라 추측한 오웬이 말문 막힌 시종장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예……. 저도 그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존재하지 않으니 알아낼 수가 없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연을 맺은 여인이 한 명도 없지는 않았겠으나 소생은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딱히 권리라고 주장할 것이 없었겠지. 종조부께서 부탁하는 편지라도 남기셨던가? 시종장이 그자를 그리 감싸고 돈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감싸고돌다니요. 아니옵니다, 폐하. 저는 다만 옛정을 외면할 수 없어 최소한으로 편의를 보아 드렸던 것뿐이옵니다.”

굳이 사실관계를 따져 보자면 시종장이 감싸고 돈 것은 기르가 아닌 황제였으나 정정해 봤자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숙부님 앞이니 예의를 차리라는 거군. 그자가 나를 먼저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나도 화내지 않겠어.”

그의 정체를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피가 섞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이미 오래전에 했다. 예상보다 가까운 친족이었다는 정보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예, 폐하. 이 노신 간절히 간청드리옵니다. 돌아가신 선황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실 것이니 부디 두 분께서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죽은 사람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그자 앞에 몸을 낮춘다면 그것은 아직 살아 있는 프리아를 위한 것일 뿐. 망령 따위가 지켜본다 한들 눈 하나 깜짝할 자신이 아니었다.

“이곳에 없다는 말이냐?”

오웬은 백조궁에 도착해 주치의를 불러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그가 아닌 난처한 표정을 한 수석 시녀의 등장이었다.

“기르 님이 돌아온 것은 맞사오나 짐조차 내려놓지 않고 다시 떠났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남기지 않았느냐?”

“그것이……. 저는 그저 프리아 님께서 자리를 비우셨다고 말씀드렸을 뿐이온데 그분을 흠모하던 아이들이 그만 잘못된 정보를 전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제 돌아오셨냐며, 후궁은 병으로 세상을 이미 떠났다는 비보를 그에게 전한 시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안타까움에 전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주치의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즉시 백조궁 밖으로 나가 버렸다고 했다.

“시종장, 어서 그자의 행방을 알아내라고 전해. 나처럼…… 유폐궁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도중에 잠시 말을 끊었던 오웬이 시종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황제의 말을 듣고서야 유폐궁과 기르의 관계를 떠올린 시종장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저하의 생모이신 후궁께서 한때 그 궁의 주인이셨습니다. 저하께서 어리실 때 그린 두 분의 초상화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 초상화의 주인이 그자의 부친과 조모였군. 기묘하게 얽힌 인연을 떠올리며 오웬이 잠시 얼굴을 굳혔다.

“제가 가서 찾아뵙고 이곳으로 모셔오겠습니다.”

“기다리며 허비할 시간이 없어. 마차를 돌리거라.”

다시 기회를 노리는 시종장을 제지하며 오웬이 시종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차는 급히 유폐궁을 향해 달렸으나 그곳에서도 찾는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르를 찾아온 궁을 수색하란 명이 떨어졌으나 기다리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초조한 얼굴로 집무실로 돌아온 오웬에게 시종장이 다시 말을 꺼냈다.

“어쩌면 그곳에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 그곳에는 아니 계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이제야 그에게 돌려주었던 자택의 문서와 열쇠를 떠올린 시종장이 오웬에게 허락을 구했다.

“같은 말 다시 하게 하지 마. 이대로 손 놓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날 돌아버리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얼른 앞장이나 서도록 해.”

말은 앞장을 서라 하면서 오웬은 본인이 먼저 나서 복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선두를 빼앗긴 시종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폐하! 위험하시옵니다! 제가 물건을 치울 이들을 불러오겠습니다. 폐, 폐하!”

닫힌 문을 발로 차 강제로 연 오웬이 먼지 자욱한 실내로 들어섰다. 몇 달 전 이곳을 수색했던 경비병들이 남긴 발자국 위로 다시 뽀얗게 먼지가 쌓였다. 건물 잔해가 어지럽게 널린 광경을 바라보며 오웬이 얼굴을 찌푸렸다.

“수일 내로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어. 이곳이 확실한가?”

“저하의 자택은 이곳이 맞사옵니다만 제 예상이 틀렸던 모양입니다. 송구하옵…… 으아악!.”

황제의 진로를 방해하는 썩은 가구를 치우기 위해 다가섰던 시종장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나무 바닥이 푹 꺼지며 한쪽 발이 구멍에 끼어 버린 것이다. 함정이 설치되어 있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했던 기르의 경고가 뒤늦게 그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폐하! 어서 몸을 피하시옵소서! 폐하! 저는 괜찮으니 어서!”

고작 썩은 마룻바닥에 신발이 낀 것만으로 화살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시종장을 오웬은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노구의 몸을 돕기 위해 발을 옮기는 오웬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톤, 자네의 등장은 여전히 요란하군그래.”

언제부터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잿빛 로브를 입은 기르의 등장에 시종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하! 저 좀 구해 주십시오! 함정에 걸렸습니다! 설치된 독에 찔린 것 같아요. 발끝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를 한심히 여기는 눈빛만은 종조부와 질손답게 닮아있었다. 기르는 시종장의 오두방정을 무시하며 오웬을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저 평범한 썩은 구멍이니 발을 힘차게 들어 올리면 빠질 게야. 목숨을 앗아갈 만한 것은 애초에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네.”

짐작만 하고 있던 혈연관계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숙부라 인식하게 된들 크게 달라질 것이 있으랴. 기록이 남지 않았으니 적법한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신분도 아닐 것이다. 애타게 그를 찾은 것은 숙부 대접을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웬의 눈에는 일말의 공경도 담겨 있지 않았으나 생명줄을 움켜쥔 자를 향한 초조와 절박이 깃들어 있었다. 달라진 그의 눈빛을 보며 기르가 계단 아래로 향할 것을 권했다.

“폐하께서 오래 머무실 만한 곳은 아닙니다. 내려오시겠습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