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99)화 (200/237)

내가 대체 뭐가 부족하단 거야? 고집불통 영감탱이. 

오늘도 어김없이 입문을 거절당한 벤이 대장간 문턱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풀무질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할 약골로 보이냐고?”

아직 덜자란 얼굴로 성인이라 우기는 벤의 말을 믿어줄 어른은 없었다. 물론, 벤이 조금 욕심을 낮춘다면 허드렛일을 돕고 약간의 품삯을 받는 심부름꾼 자리는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업종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대장간의 정식 도제 자리였다. 고되고 힘든 일이었으나 버텨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하게 된다면 다른 업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짭짤한 돈벌이가 가능했다.

쓸 만한 기술 하나만 배워 둔다면 어딜 가든 밥벌이 하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그 기술이 없어 평생을 고생만 하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 아버지를 빗대 한 말일 것이다.

농기구를 사러 온 한스를 따라 대장간에 들렀던 벤은 더 크면 오라는 말과 함께 그 팔뚝으로 풀무질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조롱을 들었다. 내가 얼마나 힘이 센데. 사람 무시하냔 말이야. 

“왜 대답이 없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니까?”

답이 없는 한스를 향해 벤이 신경질적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이게 다 곰 같은 괴력을 발휘하는 저 무식한 놈 때문이다. 수레로 배달해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여러 대의 농기구를 번쩍 들어 옮기는 한스의 건장한 팔뚝을 대장간 영감은 꽤 탐이 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뭘 보고 있는 건데?”

벽에 시선을 고정한 한스에게로 벤이 다가갔다. 뒤에서는 문만 한 등짝에 가려져 보이는 것이 없었다.

“여자네? 무슨 죄를 진 거야?”

보통 흉악범을 수배하기 마련인 전단에 여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오가다 어디서 본 것처럼 흔하고 평범한 인상이다. 얼굴에 큰 화상 흉터가 있거나 칼자국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이런 초상으로는 한 마을에 한두 명씩 제국의 온 여인들이 번갈아 잡혀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 황실……해, 끼, 끼치?”

뭘 하나 했더니 전단에 적힌 글씨로 읽기 연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작문은 서투르지만 읽는 속도만큼은 셋 중에 가장 뛰어난 벤이 으쓱거리며 전단을 읽어 내려갔다.

“이것도 못 읽냐? 황실에 해를 끼친 인물로 발견 즉시 신고 바람. 사살이 아닌 생포를 원칙으로 한다.”

“한스도 읽을 수 있다! 어, 어두운 갈색, 머리. 오른, 쪽, 입술 아래, 점 두 개. 우, 우아한…….” 

벤이 먼저 소리 내 읽어 버리자 기분이 상한 한스가 다음 문장을 읽다가 다시 한계에 부딪쳤다. 다시 벤의 낭독이 이어졌다.

“우아한 제국어를 구사. 귀족 출신으로 하녀의 신분을 가장. 이름은 올가이며 게르다란 가명을 사용한다. 웃기네. 귀족이면서 하녀의 행세를 한다고? 아무튼 이 여자만 잡아가면 이 돈을 다 준대. 금액이 어마어마한데?”

평생 가져 보지 못한 현상금의 액수에 놀란 벤이 입을 크게 벌렸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이 여인을 잡게 된다면 평생 놀고먹어도 될 큰돈을 손에 넣게 될 것만은 틀림없다.

“잡아? 잡히면 죽어?”

“누가 죽인대? 생포하라고 적혀 있잖아. 뭐 잡혀가면 언젠가 죽게 되겠지.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고.”

“잡히면 죽는다. 불쌍하다.” 

천성이 순한 한스가 알지도 못한 여인을 동정했다. 저런 멍청이는 손에 넝쿨이 굴러 들어온다 해도 놓치고 말 것이다. 쯧쯧거리며 한심해하던 벤이 여전히 벽에 붙은 한스의 등을 잡아당겼다.

“가자. 나 사탕도 사야 해. 그놈의 기념품 때문에 릴리가 완전 맛 들였어.”

마을 중심에 있는 빵 과자점으로 향하며 벤은 릴리 몫의 사탕을 꼭 사 오라고 했던 프리아의 당부를 떠올렸다. 돈이 부족하면 먼저 준 보석을 팔아도 된다 했으나 벤은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아직 모피 판 돈이 조금 남아있었다. 대장간 영감탱이에게 일자리를 달라 조르는 것도 이제 끝이었다. 흥, 두고 보라지. 난 알훼니아에 가서 더 끝내주는 일자리를 찾을 테니까. 

“……돈이 많이 들겠지?”

“한스, 못 들었다.”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벤의 말을 듣지 못한 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사를 부르면 돈이 많이 들 거 같냐고. 그냥 의사 말고 귀족들이 부르는 비싼 의사 말이야.”

“불렀다, 한스. 저번에 어머니 배 아파서. 그때, 한스가 의사 불렀다. 막냇동생 나왔다.”

재작년 여름, 산고가 심했던 어머니를 돕기 위해 마을 노파를 부르러 갔던 일을 떠올린 한스가 자신 있게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고기 주셨다. 고기 주면 된다.”

“바보야, 그때 부른 건 산파잖아. 애 낳는 것도 아닌데 산파를 불러서 뭐해.”

의사는 산짐승 고기 따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위독했던 밤, 벤은 달려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아 가며 훔친 몇 푼의 돈을 의사 앞에 내밀었다. 그때 의사가 보인 경멸과 천시의 눈빛을 벤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다 쓰러져 가는 집으로 왕진 온 의사는 어머니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 돈은 돈대로 잃고 허무하게 남매는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빌어먹을 사기꾼들이라며 벤은 평생 다시는 의사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데 그 결심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돌팔이 의사 말고 귀족들이 부르는 제대로 된 의사를 찾는다면 프리아의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봄이 되자 프리아의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며칠 전에는 해가 높이 뜬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밤이냐며, 왜 촛불을 켜 두지 않는지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까 점심 먹었잖아. 낮잠에서 덜 깬 거지? 그렇지?’

‘그렇구나. 또……. 괜찮아. 다시 괜찮아질 거야.’

‘진짜 안 보이는 거야? 나 안 보여? 이거 안 보이냐고?’

손까지 흔들어 대며 당황하는 벤과 다르게 프리아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후, 다시 시력을 회복한 프리아가 릴리아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벤은 두려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분명 몸이 아픈 데다 앞까지 볼 수 없게 되니 쫓겨났을 것이다. 어머니도 건강이 악화돼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숙소와 일자리를 제공해 주던 곳에서 쫓겨났다.

처음 프리아의 발병을 눈치챘을 때는 혹, 전염병인가 싶어 릴리아나를 위해서라도 내보내야 할까 고민에 휩싸였다. 그와 접촉한 자신들 모두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자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모피 판 돈으로 꾸준히 음식을 사다 먹고, 낡았지만 꽤 입을 만한 옷을 사다 입으며 지난겨울을 보냈다.

어느새 봄이 와 들판은 다시 초록 풀로 뒤덮였다. 우거진 숲 골짜기마다 부지런히 덫을 놓으면 스튜 끓일 토끼 정도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더는 배를 곯지 않게 돼 쑥쑥 자라나는 릴리아나와 벤과 다르게 프리아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같이 알훼니아로 가자고 하더니. 본인이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수중에 지닌 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보석은 지금 말고 나중에 팔아서 여비로 쓰려고 했지만 이대로라면 언제 출발을 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이 작은 동네 말고 큰 곳으로 가면 귀한 물건을 맡겼다가 찾아갈 수 있는 전당포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좀 멀끔한 옷을 사 입으면 귀족 집에서 일하는 하인으로 보이겠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 한스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의 호응에 기분이 좋아진 벤이 거만하게 얼굴을 치켜들었다.

“너도 같이 데려가 줄게. 귀한 걸 팔러 가니 호위 한 명쯤은 데리고 있어야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목적했던 빵 과자점에 도착했다. 가게 벽에는 대장간에서 이미 보았던 수배 전단이 붙어 있었다.

“한스, 자세히 봐.”

“아까 봤다.”

이미 보았던 전단에 흥미를 잃은 한스가 갓 구워 나온 과자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우리가 잡게 될 수도 있잖아. 다시 보고 똑똑히 기억해 둬야지.”

이왕 주울 거면 겉만 예쁘고 골골거리는 놈보다는 저런 돈 덩이를 잡아야 했는데. 툴툴거리면서도 전단을 눈여겨보는 벤의 입가엔 미소가 배어 있었다. 전당포에 가서 보석을 팔고 프리아의 병을 고쳐 알훼니아로 가자고 해야지. 말로만 들었던 바다란 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한스 너도 갈 거지?”

목적지도 모르면서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입궁했다고?”

시종장의 보고를 받은 오웬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예, 폐하. 북문 관리로부터 지금 소식을 받았습니다. 오후 알현 시간에 맞춰 올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 일러두겠습니다.”

“지금 가겠다. 백조궁으로 갈 마차를 준비해.”

“예?”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깜짝 놀란 시종장이 당혹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폐하, 외람되오나 아직 오전 정무 시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하, 아니 그분…그자에게도 여독을 풀 시간이 필요할 테니 제가 먼저 만나뵙, 아니 만나서 폐하의 의중을 전달드리는 것이 어떨까요?”

“그자가 무슨 살아 돌아온 선황이라도 되는 양 쩔쩔매는군.”

“아, 아니옵니다. 폐하. 제가 어찌 돌아가신 선황 폐하와 일, 일개 주치의를 동일 선상에 두고 있겠습니까?”

허둥대는 시종장을 외면한 오웬이 계단을 뛰다시피 걸어 내려갔다. 시종장은 젊은 황제의 속도를 따라오느라 다리가 찢어지다 못해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자가 어떤 신분이건 이제는 관심이 없어. 프리아의 행방을 알아낼 단서를 갖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야.”

“이제 막 도착하신 분이 어찌 아실 수 있겠습니까. 폐하, 그러시면 잠시만이라도 제가 먼저 저하를 만나 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저하라고? 방계도 아니었던 모양이군. 이제야 잃어버린 숙부 한 분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군그래.”

“저, 저하라고? 제 요망한 입이 그랬습니까? 아, 아니옵니다, 폐하. 조, 조금만 속도를 늦, 춰 주시면.”

아이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시종장이 계단 난간을 붙잡고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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