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98)화 (199/237)

“몸이 온전치 않다니 무슨 소리지? 프리아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는 거야?” 

황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고개를 움츠리면서도 에델은 용기를 내 말을 이어갔다.

“밖으로 드러나는 외상을 입으신 건 아니옵니다. 유폐궁에 오신 이래로 침실과 응접실을 제외한 다른 곳으로는 일절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어요.”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들었다. 살던 곳에서 끌려 나와 낯설고 외진 곳으로 옮겨졌으니 충격이 컸겠지. 밖은 혹한이고 몸이 약하니 산책을 나갈 의욕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더 있었더란 말이냐?”

밤낮으로 말을 달려 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오웬은 프리아의 죽음을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혹, 자신이 그동안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프리아가 큰 병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에게 그 사실을 숨긴 것이라면 그걸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실은 병사가 아니라 자진이었고 그 사실을 알리기 껄끄러워 병으로 죽었다 알렸다는 태후의 말을 듣고서야 그 의심은 증폭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체한 건 분노와 절망, 다른 종류의 자책이었다. 

“프리아 님께서 마음 두실 곳을 찾지 못하신 것은 전적으로 저의 잘못이옵니다. 모심에 소홀하여 나가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죄 죽어 마땅하옵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저 저의 죄를 면피하고자 함이 아니옵니다.”

에델은 오웬에게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오후, 유폐궁을 방문했던 태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간밤에 피를 많이 쏟으신 탓에 프리아 님은 영 기운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그리 전달했는데도 태의께서는 여느 때와 같은 처방만을 내리고 자리를 떠나셨어요. 답답한 마음에 뒤를 쫓아가 좀 더 나은 처방이 없느냐면 태의께 대들었습니다.”

딱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에델을 응시하던 태의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었다.

“후궁께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드리라 했습니다. 드시고 싶으신 것이든, 보고 싶으신 것이든 간에 여한이 없도록 살펴드리라 했지요. 그 말을 들은 저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태의께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설마 프리아 님께서 회복되지 못하고 이대로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신단 말씀이옵니까? 어찌 그런 망발을 하세요?’

“제 질문을 들은 태의께서는 다시 입을 다무셨습니다. 안달이 난 저는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서는 태의의 옷자락을 붙잡았지요. 그러자 태의께서는 후궁의 병은 자신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시며 이대로라면 겨울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남기고 저를 뿌리치셨어요.”

에델의 말을 들은 오웬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프리아는 워낙 몸이 약해 코피를 흘리거나 실신하는 일이 잦았다. 네 말대로 그리 위독한 상태였다면 어찌 홀로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더란 말이냐!”

성난 기세로 에델을 다그치는 오웬의 서슬에 놀란 시종장이 그를 말리기 위해 뛰어왔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 아이는 태의의 말을 전한 것에 불과하옵니다. 태의를 불러 사실을 확인해 보시옵소서.”

에델에게로 향했던 오웬의 분노가 이번엔 시종장에게로 향했다. 

“병을 고칠 수 없다니 태의된 자로서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아니 될 말이 아닌가! 겨울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이 몇 월 며칠인지 알고 있어?”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응달에 쌓인 눈은 단단히 얼어붙었고 맨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은 여전히 칼날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2월 하순. 머지않아 곧 봄이 도달할 것이다. 

“프리아 님께서 어떻게 궁을 빠져나가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몸으로는 멀리 가지 못하셨을 거예요. 저는 올가라는 그 여인이 그 사실을 이미 알고 프리아 님께 접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외부로 나가 병을 치료하자 권한 게 아니었을까요?”

잔뜩 겁을 집어먹었음에도 에델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동안 자신이 품고 있던 의문을 오웬에게 고했다. 

“네 말대로 태의도 고치지 못한다는 병을 어느 누가 치료할 수 있다는 거지?”

“에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생각합니다. 출정식 날 크게 상하셨던 몸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유폐궁에 오게 되시어 전보다 쇠약해지셨을 겁니다. 만약 다른 이에게 몸을 의탁하셨다면 그들이 의사를 불러 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르타도 나서 에델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 말을 들은 오웬의 머릿속에 새롭게 피어나는 의혹이 있었다.

“시종장. 그 사내는 어찌 되었지? 아직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폐하, 그 사내라 하시면 누구를 말씀하심이…….”

짚이는 데가 없는 시종장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프리아의 주치의. 나보다 먼저 떠난 것으로 아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

“기르 저……, 기, 기르 님 말씀이시옵니까?”

무심결에 황제의 앞에서 ‘기르 저하’라 존칭을 붙일 뻔한 시종장이 식은땀을 닦아 내리며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래, 그 사내. 프리아와의 신뢰가 두텁지 않았던가. 프리아가 소지하고 있던 약에 대해서도 그자가 무언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자가…….”

프리아를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뒷말은 차마 자신의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사통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태후는 프리아에게 오웬 자신이 돌아오면 그 손에 죽게 될 것이라 알렸다 했다. 구석에 몰린 프리아에게 믿고 있던 지인이 소식을 알렸다면. 

“대공가를 이미 떠났다고 했으니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프리아 님이 모습을 감추셨을 때는 기르 님 또한 아직 알훼니아에 머무르고 있던 상황입니다.”

후궁의 비보에 놀랐던 시종장은 몰래 사람을 시켜 알훼니아 대공가의 동정을 조사했다. 후궁에게 변고가 발생했다면 충격을 받을 이는 황제 한 명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궁을 자식처럼 아낀 기르의 분노 또한 쉽게 잦아들 리 없었다. 간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산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 탑에 틀어박혀 있다가 짐을 챙겨 제국을 향해 떠났다고 했다. 

“그러한가.”

프리아의 행방을 찾을 실마리가 사라졌다. 어두운 표정을 한 오웬이 유폐궁을 떠나며 시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자를 보는 이라면 신분을 가리지 말고 조사하도록. 그중에 프리아를 본 자가 있는지 알아내고 만약 찾아낸다면 의사를 부른 자들의 신분 또한 파악이 되어야 할 것이야.”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아이…….”

다시 뒤로 물러난 에델을 돌아본 오웬이 시녀장에게 말했다. 

“저 아이도 백조궁으로 보내.”

오웬의 심기를 거스르기는 했으나 주인을 향한 충정 하나만은 유디스에 못지않아 보였다. 프리아 성격에 저런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았을 리 없었다. 

언제 또 잠들었던가.

작은 창으로 오후의 해가 들이치고 있었다. 아직 날은 쌀쌀했지만 제법 봄 분위기가 났다. 해가 오두막에 머무르는 시간도 점차 길어지고 있다. 

“릴리?”

벤은 빵을 사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고 작은 오두막을 지키고 있는 것은 릴리아나와 프리아 단둘뿐이었다. 프리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소녀의 모습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부인. 차 드시겠어요?”

귀부인을 흉내 내 한껏 우아한 말투를 꾸며낸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벽난로 앞에서 들려왔다. 춥지도 않은지. 언 땅이 녹아 흙장난이 쉬워지자 릴리아나는 빨갛게 된 볼을 하고 하루 종일 바깥에서 뛰어놀다 들어오곤 했다.

“좋아요, 부인. 과자 먹을까요?”

이가 빠진 식기 위로 흙을 빚어 만든 과자가 쌓여 있다. 찻잔에는 찻잎 대신 누렇게 뜬 잡초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저는 과자 싫어요. 사탕 먹을래요.”

두 명의 귀부인을 번갈아 연기하던 릴리아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는 프리아의 시선 위로 익숙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정말 맛있는 사탕이랍니다. 내가 다 먹어야지. 새콤달콤해.”

한껏 입을 벌린 릴리아나의 입술 가까이 닿은 것은 보랏빛을 띤 작은 환약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챈 프리아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렸다. 환약을 빼앗긴 아이는 깜짝 놀라 영문도 모르고 눈동자를 깜박였다. 

“이거 어디서 났어? 어디서 찾은 거야?”

프리아가 소리치자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라 생각한 릴리아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머지 두 알을 찾아야 한다. 환약을 먹고 눈앞에서 죽어간 중년 여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직접 보진 못했으나 환약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던 작은 시녀 아이의 모습도.

다급한 마음에 릴리아나가 입고 있는 옷의 주머니를 헤집었다.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프리아의 눈에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헝겊 주머니가 보였다. 빠르게 잡아채 안을 확인했다. 남은 두 알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빼앗은 한 알을 더해 주머니 속에 넣은 프리아가 망설임 없이 손에 든 것을 난로 속에 내던졌다.

“내 사탕……. 피아가 버렸어.”

주머니가 불꽃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본 릴리아나가 억울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승전식 때 받은 기념품 꾸러미에는 과자와 함께 몇 알의 사탕이 들어 있었는데 그 색 또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색이 비슷해 간식거리로 착각을 한 모양이다.

소지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다. 눈을 뜨는 것이 늦었다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화내서 미안해, 릴리. 저건 먹으면 엄청 쓰고 배가 아픈 약이야.”

“사탕 아니야?”

프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릴리아나가 조금씩 다가와 앉았다. 눈물 맺힌 아이의 눈에는 서러움과 함께 자신에게 소리친 어른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사탕 아니야. 벤이 돌아오면 사탕 사 오라고 할게. 많이 사 오라고 할게.”

“진짜?”

양팔을 벌린 프리아의 품으로 릴리아나가 안겨들었다. 아이의 따뜻한 체온이, 팔딱대며 뛰고 있는 작은 심장이 눈물 나도록 기뻐서 프리아는 눈을 감고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끝이다. 

실감한 순간 프리아가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 이 생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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