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97)화 (198/237)

태어난 직후부터 오웬은 초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화공이 지정해 주는 자세를 취한 채 좀이 쑤실 때까지 얌전히 버티고 앉아 있어야 하는 그 시간들을 오웬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여 단란한 황실 가족이라는 가식적인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기록들을 시종장은 애지중지했으나 오웬은 어떠한 결과물이 나오더라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짓투성이 그림보다는 진실이 담긴 글 한 줄이 더 가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프리아가 관심을 보였을 당시에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집무실에 들린 바이런에게 박제된 그림보다는 실물을 보는 편이 더 즐겁지 않겠냐는 질문을 던져 그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주장으로는 상대의 그림을 소유하기 원한다는 것은 언제나 함께 하고 싶은 소망의 발로이니 연인이라면 마땅히 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 타당성이 있다 생각한 오웬은 수장고에 보관 중이던 로켓을 찾아 프리아에게 건네주었다. 내심 자신 또한 그 답례를 받게 되길 기대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현재 오웬의 목에 걸려 있는 로켓에는 초상 대신 받아 낸 금빛 머리칼이 들어 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초상을 받아 내지 못한 것을 오웬은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물론 초상이 없어도 오웬은 언제든지 프리아의 모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머릿속을 온통 점령한 그의 모습을 타인에게 어찌 전할 수 있을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동원한다 해도 부족할 것이다.

눈매가 부드러워진 황제의 표정을 보며 마르타는 그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후궁의 생존을 확신한 것만으로도 그간 날이 서 있던 황제의 심기가 눈에 띄게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후궁을 찾지 못한다면 황제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해 갈 것이었다.

“프리아 님의 초상을 그렸던 이를 알고 있습니다.”

심부름을 갔던 에델이 응접실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마르타가 입을 열었다.

“프리아의 초상이 있다고? 백조궁에선 보지 못했는데 유폐궁에서 보관하던 것이냐?”

흥미를 보이는 오웬에게 마르타가 답했다.

“프리아 님의 허락 없이 그려진 것들이라 제가 압수하여 처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렸던 자를 불러온다면 초상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용도는 불순하나 실력은 확실하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가서 데려오도록 해.”

“그자는 현재 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은밀히 사람을 붙여 두었으나 어제 있었던 소동에 휘말려 놓치고 말았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마르타의 말을 들은 오웬의 표정이 급변했다. 꼬리를 붙이다니. 시녀장이 그리 행동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평범한 화공이 아니라는 의미군. 사람을 붙인 연유가 무엇이지?”

“화공으로 일하던 자가 아닙니다. 백조궁에서 프리아 님의 시중을 들었던 올가 라는 여인을 기억하시지요? 폐하께서 추방을 명하셨던 여인이옵니다.”

후궁의 사통을 주장하던 그녀의 열에 들뜬 눈동자를 떠올린 오웬이 불쾌감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가 신분을 속이고 유폐궁에 잠입해 프리아 님께 접근하는 것을 목격한 이가 있습니다. 에델 네가 고하거라.”

자신을 호명하는 시녀장의 말을 들은 에델이 긴장한 얼굴로 황제 앞에 섰다. 올가가 린드가르트의 궁에서 모습을 감춘 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이 있었다. 조용히 궁을 빠져나가는 그녀에게서 하녀 게르다의 모습을 발견한 에델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에델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황제에게 고하였다.

“확실합니다! 폐하. 게르다, 아니 올가라는 그 여자가 프리아 님께 무슨 해코지를 한 것이 틀림없어요!”

“술에 취했다고는 하나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의식을 잃었던 것은 수면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녀의 신분을 가장했기에 의심을 사지 않고 주방에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겠지요.”

아직 어린 에델이 감정에 격앙되어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마르타가 나서 설명을 거들어 주었다.

“그날 아침의 일을 다시 말해 보거라. 강아지를 어디에서 발견했다고?”

황제의 물음을 들은 에델이 온 힘을 다해 그날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와인을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숙취가 엄청났습니다. 일어나 보니 프리아 님의 침실 문이 열려 있었어요. 침대 위는 텅 비어 있었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벽장문을 열었다가 그곳에 아니 계신 걸 알고 욕실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도 아니 계시기에 옷장 문을 열어보니 여우 털 망토 하나가 사라져 있었습니다.”

“벽장이라고? 왜 그런 곳에 프리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벽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오웬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떠오를 듯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프리아 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당황한 적이 꽤 있사온데 그때마다 벽장에서 발견되시곤 하셨습니다. 분명 침대에서 주무시는 것을 확인했는데 아침이면 벽장에서 잠들어 계시곤 하였어요. 연유를 여쭤보았는데 본인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말씀하셨습니다.”

“몽유병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프리아가 욕조에서 잠든 것을 본 적이 있었지.”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프리아는 어릴 때부터 옷장이나 벽장 같은 구석진 곳에 숨기를 좋아했어.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오웬이 다음 순간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프리아에게서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다. 내가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있지?

“밖으로 나가신 것이라 생각해 뒤를 따르려 했는데 복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그레첸이 갇혀 있었어요. 전날 밤에는 분명히 저와 응접실에 있었는데 말이죠.”

“어느 방이었느냐?”

“벽에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있는 방입니다. 한때 이곳의 주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프리아님께 보여드렸어요.”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선선대 폐하의 후궁이시던 분과 그분의 소생이신 황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곳입니다.”

강아지는 두고 혼자 빠져나왔던 거군. 그 밤 프리아의 행적 하나가 확인되었다. 방으로 안내하기 위해 앞서 몸을 돌린 에델을 오웬이 불러 세웠다.

“어딘지 알고 있다. 거기서 오는 길이었으니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거라.”

“예, 폐하. 그레첸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궁인들이 죄다 숙취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프리아 님이 나가시는 모습을 본 이가 없다 하여 문지기에게도 확인했지만 그도 보지 못했다 답하였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제각기 흩어져 프리아 님을 찾아다녔으나 어디에서도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게르다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여인이 프리아와 함께 사라졌다는 뜻이냐?”

“아니옵니다. 그날 아침 해자의 물이 얼어 탈출이 용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문지기를 추궁해 여인에게서 돈을 받고 미리 문을 열어 주기로 약속했다는 증언을 받았습니다. 혼자 유폐궁을 빠져나간 여인의 인상착의가 올가와 일치했습니다.”

오웬의 질문에 마르타가 대신 나서 답했다.

“해자의 물이 얼었다니 처음 듣는 얘기군. 해자에서 시신을 발견했다는 증언은 새빨간 거짓이었어. 왜 일찍 말하지 않았지?”

태후의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속이 답답해진 오웬이 그녀들을 쏘아보았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후 린드가르트 님의 처소로 찾아가 올가를 만나려 했으나 그쪽에서 숨기고 있어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린드가르트가 프리아의 실종에 개입되었다는 얘기야? 확실한가?”

다시 날을 세운 황제가 차가운 눈으로 마르타를 응시했다.

“알현을 거부하시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가 말씀드린 것처럼 유폐궁에서 일했던 하녀가 그녀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만을 알아냈을 뿐입니다.”

“프리아와 그 하녀의 사이는 어때 보였지? 반가워하는 것으로 보였느냐?”

“그러신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오히려 꺼리시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 하녀와 이야기를 나누시다 제가 들어가면 입을 다무시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표정이 밝지 않으셨습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인이다. 프리아가 사통했다 주장한 것도 모자라 신분을 속이고 유폐궁에까지 잠입하다니. 그 밤 분명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프리아는 오웬 자신을 피하기 위해 모습을 감추었지만 어쩌면 그 여인에게도 벗어나려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 레온의 일로 린드가르트가 프리아에게 앙심을 품었다 하더라도 그 여인의 증언이 있어야 추궁이 가능했다.

“일단, 초상은 화공을 불러 준비하도록 하지. 프리아의 행방을 찾는 동시에 그 여인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수배 전단을 만들어 곳곳에 붙이도록 해. 증언만 할 수 있다면 상태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마침 황제의 의복을 준비해 온 시종과 시종장이 도착했다. 한나절 사이에 폭삭 늙어 버린 시종장이 오웬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옷시중을 들었다.

“아니, 이 꼴이 다 무어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되겠습니다. 어서 목욕물부터 준비해야겠어요.”

“목욕은 이미 했어. 미지근하니 제법 할 만하더군.”

오웬은 해자로 이어지는 수로의 물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시종장은 알아듣지 못하고 유폐궁의 시설이 엉망이라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환복을 마친 오웬이 응접실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그동안 떨어져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델이 오웬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짓이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남았나?”

“프리아 님을 어서 찾으셔야 합니다. 몸이 온전치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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