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버텨 온 등불이 꺼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시작되었으나 오웬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앞으로 옮길 뿐이었다.
들리는 것은 자신의 숨소리와 신발이 바닥에 부딪치며 발생하는 작은 소음뿐. 깨어날 수 없는 긴 악몽 속을 걷는 듯했다. 그러나 오웬은 확신했다. 이 길이 프리아에게로 자신을 데려다줄 것이다. 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분명 그를 찾을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리라.
평평하던 길이 완만한 경사로 바뀌고 비탈길은 곧 딱딱한 돌계단으로 이어졌다. 한참을 걸어 내려간 끝에 오웬은 자신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철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듬어 찾아낸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철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휘이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흘러가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지하 수로인가?’
바깥쪽에서 쏟아져 들어온 물이 오웬의 바짓단을 적셨다. 물이 차갑지 않다. 살짝 식은 목욕물처럼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 지하수가 조금씩 오웬의 옷자락을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온천수가 유입되어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해자의 물. 해자로 향하는 물이 이곳을 거쳐 가는 모양이었다. 오웬은 망설임 없이 계단 아래, 지하 수로로 발을 들여놓았다.
물은 곧 오웬의 어깨까지 차올랐다. 프리아 또한 이 수로를 지나왔을까. 젖은 몸으로 계단을 걸어 올라와 이윽고 온실에 당도했을까. 부디 그날의 온실이 따뜻했기를, 난로의 불이 꺼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다행히 물의 흐름은 빠르지 않았다. 오웬은 헤엄쳐 건널 것을 선택하고 잠겨 있던 몸을 물 위로 띄웠다. 앞으로 남은 거리가 얼마나 될까. 다리에 힘이 빠지던 순간 뻗은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것이 있었다.
오웬은 철 손잡이에 의지하며 천천히 젖은 몸을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몸에 감긴 천에서 물이 흘러내려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오래 쉴 여유가 없다. 체온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미궁일까, 혹은 연옥일까.
시간의 흐름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바람 부는 공동을 이미 빠져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오웬이 지나온 걸음마다 물이 고여 바닥은 더욱 짙은 색으로 변했다. 머릿속을 맴돌던 수많은 상념이 걷혔다. 이 길 끝에 기다리던 이가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웬은 맹목적으로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걸었다.
보이지 않자 나머지 감각이 기민하게 반응하며 오웬을 길 위로 이끌었다. 꽤 오랜 시간 계단을 걸어 위로 올라왔다. 해가 뜬 것일까. 석벽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거미줄투성이 통로를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통로의 끝. 그 앞은 막혀 있으나 오웬은 직감적으로 그가 찾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장치가 어딘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주의 깊게 통로를 살피던 오웬의 시선이 벽에 붙은 촛대에 가닿았다. 변색되어 어둡게 변했으나 한때는 광택을 자랑했을 황동 촛대를 잡아 기울였다. 벽 안쪽에서 차르르,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둔중한 소음과 함께 앞을 가로막았던 벽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빛 속에 서 있는 프리아의 모습을 오웬은 보았다고 생각했다.
“프리아!”
오직 먼지만 떠돌 뿐인 텅 빈 방. 프리아의 환상도 사라지고 창으로 내리쬐는 겨울 해 아래 오웬은 자신이 홀로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벽의 한 면을 다 차지하는 대형 초상화가 낯익었다. 지난번 유폐궁을 찾았을 때 무의미하게 둘러보았던 여러 방 중의 한 곳이었다. 다정한 모자의 초상화. 저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출생과 동시에 어머니를 잃어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는 이야기를 프리아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유폐궁에서 온실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는 분명 자신의 선조 중 누군가가 몰래 이곳을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혹은 이곳에 갇힌 이에게 잠시간의 자유를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 주었을까.
먼 온실까지 오는 수고를 감수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화원을 만들어 주거나 성의 곳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 이 황가의 사내들은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할 뿐인 멍청이들이었다.
오웬은 쓴웃음을 지으며 방문을 열어 복도로 나아갔다. 프리아의 방이 있던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오웬의 귓가에 항변하는 젊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더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겠어요, 시녀장님. 폐하께서 저렇게 프리아 님을 잊지 못하고 계신데. 프리아 님은 모습을 감추신 것이지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드리는 건 폐하를 혼란스럽게 해 드릴 뿐이다. 프리아 님의 생존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찾고 나서 말씀드려도 늦지 않아.”
“유디스 님에게라도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저보다 오래 프리아 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분이셨으니 그 슬픔이 오죽하겠어요? 프리아 님께 충직하신 분이었다고 하니 도움이 될 거예요.”
“그건 바로 폐하께 말씀드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어떤 성격인지는 방을 잠시 같이 썼던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확실히 유디스에게 털어놓았다면 내가 좀 더 빨리 알게 되었겠지. 오웬은 시녀장 마르타의 견해에 동조하며 응접실의 방문을 밀어젖혔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며 죄를 청하러 온 마르타를 돌려보낸 것은 오웬 자신이었다.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를 벌하는 일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에게까지 진실을 감추고 뒤로 프리아를 찾고 있었다니. 애첩을 잃고 반쯤 미쳐 있던 황제에 대한 배려에 감사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폐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마르타와 에델은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들은 시종에게서 유폐궁에 가 있으라는 황제의 전언을 받고 수시간째 이곳에서 대기 중이었으며 갈수록 심각해지는 황제의 기행이 오늘 유폐궁으로 목적지를 정한 걸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지?”
급한 마음에 소지하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내민 에델에게 코웃음을 치며 오웬이 시간을 물었다.
“오전 10시이옵니다.”
“정오까지는 돌아갈 수 있겠군.”
욕실에 다녀온 마르타에게 수건을 받아들면서 오웬은 벽난로 앞 장의자에 몸을 뉘었다. 황제가 성문으로 올 것이라 생각한 시종들은 멀리 바깥에 나가 있었다. 유폐궁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 한 명에게 에델이 마르타의 지시를 전했다. 갈아입을 옷과 따뜻한 식사 거리를 준비해 오란 내용이었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환궁 직후 유폐궁을 찾았던 황제는 금방이라도 해자에 뛰어들 기세였다. 기어코 그가 오늘 입수를 실행에 옮긴 것이라 생각한 마르타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친놈을 보는 듯한 눈이군. 뭐, 반쯤은 사실이긴 하니까.”
“아니옵니다, 폐하. 제가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추적에 진전은 있던가?”
오웬의 질문을 들은 마르타는 잠시 동요했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황제가 문 앞에서 이야기를 다 들은 것이 확실하니 더는 감출 필요가 없었다.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몸을 의탁하신 듯합니다.”
“이를테면?”
“근교의 수도원은 모두 뒤져 보았으나 모습을 본 이가 없었습니다.”
“알훼니아의 대공가는?”
“공식적으로 프리아 님의 사망을 공표하지 않은 상태라 대공가에서는 소식을 모르고 있다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찾기 쉬웠을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알훼니아로 향하는 길목마다 사람을 배치해 두었다.
“내게 사실을 숨긴 이유가 뭐지? 무덤이나 파헤치고 다니는 꼴을 보는 게 즐거웠던가?”
날선 황제의 말투에 마르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일 자신이 후궁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고했다면 황제는 모든 일을 팽개치고 추적에 골몰했을 것이다. 태후와의 관계도 한층 악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후궁이 이미 살아 있지 않을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했다.
“살해당하셨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스스로 모습을 감추신 것인지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하신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제 발로 떠난 것만은 확실해.”
어찌 그리 확신할 수 있을까? 오직 살아 있기를 바라는 희망만으로? 순간 마르타의 표정을 스치고 지나간 동정을 눈치챈 오웬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네가 나에게 숨긴 것이 있으니 나 또한 사실을 다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아직 황제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마르타가 올가의 의심스러운 행동에 대해 고하려는 순간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프리아의 초상이 필요해. 얼굴이 알려지면 신변이 위험할 수 있으니 방은 붙이지 않겠지만 믿을 만한 자들에게는 소지하게 할 생각이다.”
“초상을 내어 주신다면 화공을 시켜 복제품을 준비하겠습니다.”
올가의 그림을 떠올리고 잠시 얼굴을 찌푸렸던 마르타가 황제의 지시에 응했다. 후궁의 외모가 워낙 눈에 띄어 설명만으로도 목격자를 쉽게 찾아낼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아직까지 진전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초상이 없어.”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오웬이 괜히 잘 타고 있는 장작을 노려보았다. 본인은 그렇게 초상을 갖고 싶다 탐내 놓고 정작 오웬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았다. 불공평하다.